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뮤지컬 <곤 투모로우> 프레스콜 지난 9월 22일,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 뮤지컬 <곤 투모로우>의 프레스콜 현장에서 배우들이 열연하고 있다. <곤 투모로우>는 오태석의 희곡 <도라지>를 원작으로 삼아 각색한 뮤지컬 작품으로, 갑신정변 이후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분투했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누아르 뮤지컬이다. 올해 창작 초연으로 9월 13일 개막하여 지난 6일 폐막했다.  강필석·임병근·이동하·김무열·이율·김재범·조순창·박영수·김민종·김법래·임별·강성진·김수로·정하루 등.

▲ 최적의 시기 열강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던 시절, 그 틈바구니에 작은 균열이 보였다. 이 균열을 이용하면 독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능성은 있었다. 그러나 너무 순진한 가능성이었다. ⓒ 곽우신


"지금이 우리가 독립할 최적의 시기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서둘러 모든 제도를 혁신하고, 분열된 국론을 수습하고, 밖으로는 세계에 독립을 알리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1884년, 제국주의 열강들이 야욕의 이빨을 드러냈다. 전쟁의 시대가 도래했다. 야수들이 싸우는 그 틈바구니에서, 조선은 독립을 향한 작은 염원을 품는다. '비운의 왕' 고종은 '한 명의 혁명가' 김옥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뮤지컬 <곤 투모로우> 프레스콜 지난 9월 22일,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 뮤지컬 <곤 투모로우>의 프레스콜 현장에서 배우들이 열연하고 있다. <곤 투모로우>는 오태석의 희곡 <도라지>를 원작으로 삼아 각색한 뮤지컬 작품으로, 갑신정변 이후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분투했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누아르 뮤지컬이다. 올해 창작 초연으로 9월 13일 개막하여 지난 6일 폐막했다.  강필석·임병근·이동하·김무열·이율·김재범·조순창·박영수·김민종·김법래·임별·강성진·김수로·정하루 등.

▲ 개각 김옥균의 개각이 단행된다. 고종은 "허한다"고 답한다. 이 혁명에 마음을 주었다. 왕의 마음을 받은 청년들이 불타오른다. 그러나 그것이 헛된 산화일 줄 누가 알았으랴. ⓒ 곽우신


"좌의정 이재원."
"허한다."
"우의정 홍영식."
"허한~다."
"전후영사 박영효."
"허~한다."
"좌우영사 서광범."
"허한다! 내 너를 믿는다. 그러니, 내 마음이라도 가져가라."

뮤지컬 <곤 투모로우> 프레스콜 지난 9월 22일,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 뮤지컬 <곤 투모로우>의 프레스콜 현장에서 배우들이 열연하고 있다. <곤 투모로우>는 오태석의 희곡 <도라지>를 원작으로 삼아 각색한 뮤지컬 작품으로, 갑신정변 이후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분투했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누아르 뮤지컬이다. 올해 창작 초연으로 9월 13일 개막하여 지난 6일 폐막했다.  강필석·임병근·이동하·김무열·이율·김재범·조순창·박영수·김민종·김법래·임별·강성진·김수로·정하루 등.

▲ 박영수의 고종 <곤 투모로우> 속 고종은 유약한 인물이다. 자신이 꾸는 꿈은 있지만, 그 꿈을 펼치기에는 심지가 굳지 않다. 그는 끊임없이 흔들리고, 방황한다. 김옥균을 그림자처럼 여겼던 그는, 그 그림자에게 배신당했다는 생각에 몸부림친다. <잃어버린 얼굴 1895>에 이어 이 극에서도 고종을 맡아 연기한 박영수는 자타공인 고종 전문 배우, 고종 장인으로 발돋움했다. ⓒ 곽우신


주군께서 주신 마음을 가슴에 품고, 개각이 단행됐다. 우정총국의 불이 오른다. 혁명의 불꽃이 타오른다. 그러나 그 불은 구체제를 채 태우기도 전에 일본의 배신으로 허무하게 꺼져버리고 만다.

"하늘이 나를 버린단 말인가!"

급진개화파의 수장 격이었던 김옥균은 그렇게 혁명에 실패한 후,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인천으로 피신하지만 이마저 여의치 않아 일본으로 몸을 의탁한다. 한때 김옥균을 믿었던 고종은 큰 실망과 배신감, 여기에 주변의 압력까지 더해져 김옥균 암살령을 내린다. 고종의 명을 받은 '암살자' 홍종우. 평등한 나라 프랑스에서 행복한 날을 보내면서도, 자꾸만 조선을 그리워하던 그에게 고종의 서신이 도착한다. 그렇게 멈췄던 혁명의 시계가 다시 돌아가며, 뮤지컬 <곤 투모로우>가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끊임없는 자기 혁신, 이지나의 또 다른 실험

뮤지컬 <곤 투모로우> 프레스콜 지난 9월 22일,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 뮤지컬 <곤 투모로우>의 프레스콜 현장에서 배우들이 열연하고 있다. <곤 투모로우>는 오태석의 희곡 <도라지>를 원작으로 삼아 각색한 뮤지컬 작품으로, 갑신정변 이후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분투했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누아르 뮤지컬이다. 올해 창작 초연으로 9월 13일 개막하여 지난 6일 폐막했다.  강필석·임병근·이동하·김무열·이율·김재범·조순창·박영수·김민종·김법래·임별·강성진·김수로·정하루 등.

▲ 옥균과 종우 고종의 암살령을 받고 일본에서 옥균에게 접근한 종우는, 위험에 빠진 옥균을 구하며 그의 신임을 얻는다. 자신의 희망이었던 옥균을 실제로 본 종우. 그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 곽우신


뮤지컬 <곤 투모로우>는 9월 13일 개막하여 지난 6일,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그 커튼을 내린 창작 초연 작품이다. 김수로 프로젝트의 19번째 공연인 이 <곤 투모로우>의 연출은 국내 공연계에서 손꼽히는 인물인 이지나가 맡았다.

이지나 '표' 작품은 균일하지 않다. 완성도의 편차가 있기에 결과물이 아쉬울 때도 분명 있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이지나 연출의 최고 장점은, 자기만의 색깔을 내면서도 작품별로 균일하지 않다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물론 사진이나 프레임을 활용한 무대 연출을 자주 쓰기는 하지만, 그 쓰임새와 느낌이 작품별로 사뭇 다르다.)

대신 그는 끊임없는 '실험'에 집중한다. '쇼 비즈니스'라는 틀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소재와 주제의식을 뮤지컬이라는 무대 위에서 표현하려고 노력한다. 2016년 그녀가 연출한 여러 작품 중에서 특별히 비슷한 작품이 없다. 연극 <지구를 지켜라>는 키치한 B급 감성으로 현실을 풍자하는 데 방점을 찍었고, 뮤지컬 <도리안 그레이>는 유미주의라는 예술 철학적 주제를 풀어내는 시도였다.

<잃어버린 얼굴 1895>와 <곤 투모로우>가 동시대를 그린 작품이기는 하지만,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잃어버린 얼굴 1895>는 명성황후의 사진과 관련된 미스터리 스릴러에 가깝다. 명성황후라는 역사적 실존 인물의 양면을 담으면서, 그에 대한 평가를 관객에게 맡긴다. 반면 <곤 투모로우>는 선명한 누아르다. 고종을 제외하면 인물에 대한 표현도 보다 명료하다. 꺾여 버린 조선 청년의 꿈들을 비극적으로 그리며 더욱 시대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괜히 제5회 예그린뮤지컬어워드(아래 예그린어워드) 6개 부문에 후보로 지명된 게 아니다. (정작 한 개도 못 탄 점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아쉽다. 대체 왜!)

뮤지컬 <곤 투모로우> 프레스콜 지난 9월 22일,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 뮤지컬 <곤 투모로우>의 프레스콜 현장에서 배우들이 열연하고 있다. <곤 투모로우>는 오태석의 희곡 <도라지>를 원작으로 삼아 각색한 뮤지컬 작품으로, 갑신정변 이후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분투했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누아르 뮤지컬이다. 올해 창작 초연으로 9월 13일 개막하여 지난 6일 폐막했다.  강필석·임병근·이동하·김무열·이율·김재범·조순창·박영수·김민종·김법래·임별·강성진·김수로·정하루 등.

▲ 김재범의 홍종우 일본을 거쳐 프랑스에서 유학하는 홍종우는 행복한 삶을 산다. 커피향 나는 이곳에서 그는 자유와 평등을 만끽한다. 그러나 한구석에는 계속 조선에 대한 갈망이 있다. 조선은 과연 프랑스처럼 자유와 평등이 꽃피는 나라가 될 수 없는 것일까. 그곳은 정녕, 갈 수 없는 나라일까. ⓒ 곽우신


물론, <곤 투모로우>도 찬찬히 뜯어보면 곳곳에 단점이 있다. 별다른 변주 없이 일관되게 직진하는 극의 톤은, 자칫 이 극을 단조롭고 지루하게 비칠 여지를 준다. 캐릭터별 비중의 설계도 아쉽다. 굳이 트리플 캐스팅까지 한 '와다' 역의 경우 극이 끝날 때까지 별 존재감을 내비치지 못하며, 그저 전달자로서 잠깐 기능할 뿐이다. 특히 시대의 혁명을 그린 작품에 별도의 이름을 갖고 활약하는 여성 인물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은(엄 상궁이 호명되는 건 아주 잠깐에 불과하다) 의아한 일이다.

그러나 <곤 투모로우>는 이런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은 작품이다. 예그린어워드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배우 강필석(관련 기사: '비운의 혁명가' 김옥균... 비참했던 최후와 남겨진 메시지)을 필두로, 배우별로 자기만의 인물을 만들어가며 색다른 매력을 선보였다. 덕분에 배우별 다양한 페어 조합을 통해 관객만의 재미 찾기에 일조했다. 배우의 열연은 묵직한 선율 그리고 호소력 짙은 가사와 맞물려 대체 불가한 <곤 투모로우>만의 아우라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도라지'는 아래로부터의 국민들이 시작하는 혁명을 상징하는 매개체이다. 국민이 움직여 주지 않으면 기우는 나라를 다시 세울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 이지나 연출, 뮤지컬 <곤 투모로우> 프로그램 북 'Special Interview' 중에서

무엇보다 시대적 맥락에서 울림을 만들어낸다는 측면에서 가장 큰 점수를 주고 싶다. 오태석의 원작 <도라지>를 바탕으로, <곤 투모로우>는 가버린 내일을 붙잡기 위해 분투하는 청년들의 꿈을 보여준다. 어두운 시대 탓에 끊임없는 좌절과 실패를 겪어야만 했던 그들. 산화를 각오하는 청춘들의 비장미가 남다르고, 2016년 오늘에도 적용 가능한 암울한 정치사회적 상황이 또 다른 울림을 자아낸다.

갈 수 없는 나라, 가본 적이 없는 나라

"무엇이 그 빛을 꺾었나. 무엇이 그 길을 막았나. 삼일 겨우 삼일만 허락된 꿈. 이리도 원하는데 갈 수 없는 나라. 빛나는 아침을 함께 할 그 날이 언젠가 오려나. 그 날이 오려나. 닫힌 문을 여는 두 손. 갈 수 없는 나라. 갈 수 없는 나라." - 뮤지컬 <곤 투모로우> 제1막 No.07 '갈 수 없는 나라' 중에서

역사와 달리 <곤 투모로우> 속 청년 홍종우는 김옥균에게 희망을 품었다. 그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김옥균은 실패했다. 그리고 우리가 꿈꾸는 그 세상은 갈 수 없는 나라라며 한탄한다. 그렇게 좌절했던 홍종우를 일으켜 세운 게 바로 김옥균이었다. 김옥균을 죽이기 위해 만난 홍종우는 오히려 김옥균에게 감화되어 그를 따른다.

뮤지컬 <곤 투모로우> 프레스콜 지난 9월 22일,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 뮤지컬 <곤 투모로우>의 프레스콜 현장에서 배우들이 열연하고 있다. <곤 투모로우>는 오태석의 희곡 <도라지>를 원작으로 삼아 각색한 뮤지컬 작품으로, 갑신정변 이후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분투했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누아르 뮤지컬이다. 올해 창작 초연으로 9월 13일 개막하여 지난 6일 폐막했다.  강필석·임병근·이동하·김무열·이율·김재범·조순창·박영수·김민종·김법래·임별·강성진·김수로·정하루 등.

▲ 망설이는 종우 옥균의 암살을, 종우는 망설인다. 그 역시, 옥균에게 새 날의 희망을 봤던 여러 청년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적 사실과는 다소 다르지만, 누아르라는 장르 안에서 이들의 의기는 뜨겁게 융화된다. ⓒ 곽우신


뮤지컬 <곤 투모로우> 프레스콜 지난 9월 22일,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 뮤지컬 <곤 투모로우>의 프레스콜 현장에서 배우들이 열연하고 있다. <곤 투모로우>는 오태석의 희곡 <도라지>를 원작으로 삼아 각색한 뮤지컬 작품으로, 갑신정변 이후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분투했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누아르 뮤지컬이다. 올해 창작 초연으로 9월 13일 개막하여 지난 6일 폐막했다.  강필석·임병근·이동하·김무열·이율·김재범·조순창·박영수·김민종·김법래·임별·강성진·김수로·정하루 등.

▲ 다시 한 번, 희망을 거짓 밀서를 통해 김옥균을 꾀어내는 홍종우. 김옥균은 청나라로 가는 배를 타며, 한 번 더 꿈꿀 수 있음에 감사해 한다. 희망에 가득차 있는 옥균을 보며 종우는 내심 괴로워한다. 하지만 정작 선택의 순간에서, 옥균은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다. 자신의 뜻을 종우가 이을 것이라 믿기에. ⓒ 곽우신


실상 인류는 단 한 번도 그 나라에 가본 적이 없다. 모두가 자유롭고,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행복한 나라. 그런 나라는 사상가가 쓴 책에 혹은 혁명가의 머릿속에만 존재했다. 비단 1884년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홍종우가 그렇게 평등하다고 생각했던 프랑스는 르펜의 극우정당이 선전하고 각종 테러가 자행되는 땅이 되어 버렸다. 의회주의가 꽃폈던 영국에서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투표권을 가진 건 1928년이었고, 그렇게 넓어진 투표권은 '브렉시트'라는 참담한 결과를 낳았다. 토크빌이 깊이 매료되어 그 장단점을 상세히 파헤쳤던 미국의 민주주의는 9일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선 후보의 당선을 막지 못했다.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듯이.

"끝이 아닌 시작, 또 새벽은 열리고 다시 시작될 꿈이여. 빛이 보인다, 내 두 눈에. 가슴이 뛴다, 내 심장에. 또 다른 시간, 죽어 얻는 삶 빛을 향하여. 다시 얻는 삶 빛을 향하여." - 뮤지컬 <곤 투모로우> 제2막 No.19 '죽어 얻는 삶' 중에서

김옥균은 말한다. 나면 어떻고, 너면 어떠냐고.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온다면, 그 내일이 가까워지는 데 조금이라도 일조할 수 있다면 지금 죽어도 상관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홍종우가 대신 이어주기를 바란다. 자신의 시체라도 딛고 이 역사의 수레바퀴가 앞으로 굴러갈 수 있기를 바란다.

"빛 사라져도 난 마지막 꿈을 꾼다. 빼앗긴 이 땅에. 두 발을 딛고서. 내 몸이 사라져 대지 위에 지고, 내 몸이 피 흘려 저 산 아래 져도. 난 도라지 꽃 뿌리 되어 꽃 피우리. 삼천리 강산에 새 하얀 꽃. 그 하얀 꽃이 온 세상을 뒤덮을 때, 날 데려가라 그 곳으로." - 뮤지컬 <곤 투모로우> 제2막 No.24 '돌아올 수 없는 길' 중에서

새 날을 꿈꾸던 혁명의 의지. 그 빛나던 의지는 홍종우에게까지 전해지고, 함께 뜻을 모은 동지들에게도 전달된다. 외세에 빌붙어 나라를 좀 먹는 이들을 처단한다. 하지만 아무리 김옥균의 의지를 잇기 위해 허우적거려도, 이미 멸망의 늪에 빠져버린 국가를 구할 수는 없었다. 이미 정부를 장악한 이완 총리는 고종의 손발을 묶고, 헤이그 특사 파견과 아울러 작전을 수행하던 동지들의 목숨도 끝나고 만다.

"세상 끝에 몰린 절망, 의미 없이 끝난 죽음, 부질없이 끝난 몸부림. 마지막 한 서린 통곡.  대답 없이 끝난 절규. 부질없이 흘린 피눈물. 온 세상 뒤덮인 통곡. 세상 끝난 날. 이 하늘 닫혀 끝난 날. 어디로 가야 하나. 무너져가는 세상 이제 어디로 가나." - 뮤지컬 <곤 투모로우> 제2막 No.26 '어디로 가야 하나' 중에서

이완 총리를 제거하기 위해 홍종우는 목숨까지 버렸지만, 결국 그 탄환은 이완의 심장에 닿지 못했다. 그렇게 홍종우의 눈 안에서 반짝이던 빛도 그의 목숨과 함께 점멸한다.

우리 비록, 또 실패할지라도...

뮤지컬 <곤 투모로우> 프레스콜 지난 9월 22일,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 뮤지컬 <곤 투모로우>의 프레스콜 현장에서 배우들이 열연하고 있다. <곤 투모로우>는 오태석의 희곡 <도라지>를 원작으로 삼아 각색한 뮤지컬 작품으로, 갑신정변 이후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분투했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누아르 뮤지컬이다. 올해 창작 초연으로 9월 13일 개막하여 지난 6일 폐막했다.  강필석·임병근·이동하·김무열·이율·김재범·조순창·박영수·김민종·김법래·임별·강성진·김수로·정하루 등.

▲ 김무열의 홍종우 제주목사가 된 이후 동지들과 함께 고종의 뜻을 받드는 종우. 그는 친일파를 암살하고, 조국의 등불이 꺼지지 않기 위해 분투하지만 결국 이완의 사살에 실패한다. 왕은 타의에 의해 또 한 번, 자신을 믿는 이들을 배신했다. ⓒ 곽우신


뮤지컬 <곤 투모로우> 프레스콜 지난 9월 22일,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 뮤지컬 <곤 투모로우>의 프레스콜 현장에서 배우들이 열연하고 있다. <곤 투모로우>는 오태석의 희곡 <도라지>를 원작으로 삼아 각색한 뮤지컬 작품으로, 갑신정변 이후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분투했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누아르 뮤지컬이다. 올해 창작 초연으로 9월 13일 개막하여 지난 6일 폐막했다.  강필석·임병근·이동하·김무열·이율·김재범·조순창·박영수·김민종·김법래·임별·강성진·김수로·정하루 등.

▲ 옥균의 사당 앞에서 홍종우가 결국 실패했음을, 이완이 살아있음을, 조선의 명운이 다했음을 알리는 와다. 김옥균의 영은 와다의 이야기를 듣고 씁쓸해한다. 동시에, 좌절하지 않는다. 도라지꽃이 피어날 그때를, 자신의 죽음이 헛되지 않을 것임을 여전히 믿고 있다. ⓒ 곽우신


이완으로 상징되는 거악은 지금도 현재 권력으로 실존한다. 우리는 제2, 제3의 이완이 청와대에서, 국회 의사당에서, 재벌 총수의 비밀 사택에서 숨 쉬고 있음을 알고 있다. 아스팔트의 목소리는 잦아들고, 촛불은 물대포에 의해 꺼지고, 투표로 모인 우리의 뜻은 한순간에 사표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니 어쩌면 우리는, 또 실패할지 모른다. 오는 12일에 광화문 광장으로 집결할 의지도, 저 거악을 우리 손으로 끌어내리고야 말겠다는 외침도,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내 살을 찢고 내 피를 삼켜 다시 살아라 이곳에. 하얀 빛 구름 하얀 옷 사람들 함께 난 죽어서도 비 되어 다 뿌려지리. 흩어져 버려진 내 몸 이곳에 오게 하리. 조각난 내 뼈와 살 다시 날 살게 하리. 푸르런 하늘 푸르런 물결 속에서 난 내 뼈와 살, 내 뼈와 내 핏물 흘리리라. 흘려서 비 되어 살아나리. 그곳에서 난 다시, 다시." - 뮤지컬 <곤 투모로우> 제2막 No.27 '저 바다에 날' 중에서

그런데 이상하다. 홍종우의 죽음을 전달받은 김옥균의 혼은, 좌절이나 절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극을 닫는 노래는 '내일은 없다 리프라이즈(Reprise)' 같은 곡이 아니다. 언젠가 다시 피어나리라고, 살아나리라고 다짐하는 극의 마지막 노래는 오히려 희망과 환희로 차 있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미 알고 있다. 국권이 침탈되고 민족의 운명이 외세에 넘어간다. 수많은 사람이 고통에 신음한다. 하지만 36년의 세월 동안 지치지 않고 싸워 온 이들이 있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광복을 맞이한다.

역사는 무수한 실패의 반복 속에 작은 성공이 켜켜이 쌓이며 진보한다. 근현대사의 질곡에서, 부정선거는 혁명으로, 겨울공화국은 봄으로, 군부의 잔재는 민주정부의 탄생으로 맞부딪혀 싸웠다. 우리가 경계를 늦추는 사이에 시계는 때때로 거꾸로 흐르지만, 그만큼 다시 앞으로 전진할 기회는 반드시 오고야 만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해야 할 건 좌절이나 절망, 냉소와 포기가 아니다. 비록 실패할 가능성이 있어도 정변을 일으키고, 내 목숨 버리더라도 저 잘못된 거악을 향해 뜨거운 총구를 겨누는 것이다. 그 모든 과정이 이 땅에 도라지를 심는 일이다. 아무리 추운 겨울이어도 그 도라지들의 흰 꽃이 만개할 날은 오고야 만다.

우리가 박근혜 대통령을 실제로 하야하게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는 그 다음 문제다. 중요한 건, 지금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옥균이 태웠던 그 빛나는 의지가 홍종우에게, 독립열사에게, 민주투사에게 이어진 것처럼 지금 우리에게 와 있으니까. 우리가 할 일은 그들이 그랬던 것처럼, 도라지를 심는 일일 것이다. 아니, 우리가 도라지가 되는 것이다. 거리로 나서는 우리 하나하나가 곧 피어나고야 말 도라지가 될 테니.

밤이 어둡다. 날이 춥다. 하지만 새벽은, 오고야 만다. 빼앗긴 들판에 봄은 반드시 온다. 김옥균을, 홍종우를, 더는 외롭게 두지 말자.

뮤지컬 <곤 투모로우> 프레스콜 지난 9월 22일,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 뮤지컬 <곤 투모로우>의 프레스콜 현장에서 배우들이 열연하고 있다. <곤 투모로우>는 오태석의 희곡 <도라지>를 원작으로 삼아 각색한 뮤지컬 작품으로, 갑신정변 이후 새로운 나라를 꿈꾸며 분투했던 청년들의 이야기를 담은 누아르 뮤지컬이다. 올해 창작 초연으로 9월 13일 개막하여 지난 6일 폐막했다.  강필석·임병근·이동하·김무열·이율·김재범·조순창·박영수·김민종·김법래·임별·강성진·김수로·정하루 등.

▲ 강필석의 김옥균 갑신정변은 실패했다.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던 청년들의 꿈도 끝났다. 그렇다고 그 꿈이 잘못된 것은 아닐 거다. 민중의 도움 없이 성공하는 혁명은 없다. 또 하나의 혁명이 눈앞에 있다. 이제 우리가, 그 도라지가 되어줄 때이다. ⓒ 곽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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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원고 불태운 문학인들... 권력 입맛에 맞추긴 싫어

[안 뻔한 티켓북] 억압과 폭력의 시대, 예술을 계속 해야 하는 이유... 뮤지컬 <팬레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시대. 희망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낮게 드리운 하늘 아래서 그저." - 뮤지컬 <팬레터> No.08 '신인 탄생' 중에서그런 시대였다.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조선에서 희망은 쉬이 보이지 않았다. 어두운 시대, 그 안에서 치열하게 조선어를 가꾸는 이들이 있었다. 경성의 모더니스트 문인들의 동인 '7인회'. 자꾸 결원이 생기는 바람에 한 번도 7명이었던 적은 없지만(아마도 그건 누군가의 지적처럼 무대 위 의자가 7개가 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아름다운 말로 아름다운 정신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순수예술을 향한 이들의 열정 모두가 빛났지만, 그중에서도 누구보다 반짝이는 문인이 있었다. 천재라고 불리는 소설가 김해진. 7인회에 합류하기로 한 그의 결정에 기존 회원들은 크게 기뻐했다. 김해진을 남몰래 흠모하고 있던 그의 팬이자 작가 지망생 정세훈의 마음은 특히나 더 터질 것 같았다. 7인회의 곁에서 이들의 일을 돕던 세훈은 바로 옆에서 해진과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한다. 그런데 그 만남이, 비극으로 치달을 것이라 누가 생각했으랴.지난 5일, 서울 동국대학교 이해랑예술극장에서 막을 내린 창작 뮤지컬 <팬레터>는 폭압의 시대에 강렬하게 무언가를 사랑했던 이들의 이야기이다.특수한 시공간 속 보편적인 감정에 대하여 세훈은 이전부터 해진을 향해 '히카루'라는 가명으로 팬레터를 보냈다. 해진은 세훈의 팬레터에 크게 고무되어 히카루와 끊임없이 서신을 교환한다. 서로의 진솔한 감정을 나누며 교류하던 어느새, 해진은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는 히카루를 사랑하게 되고 만다. 일방향적 애정의 교차, 세훈은 해진의 문장을 동경하며 사랑을 보내고, 해진은 세훈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 히카루에게 연심을 품게 된다.처음에 세훈은 이 오해를 모두 풀려고 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실망하게 될 해진의 얼굴을 지근거리에서 볼 자신이 없다. 그래서 자기 내면의 히카루를 보다 구체화시켜 나간다. 원고지 안에서만 존재하던 히카루는 점점 명료한 인격이 되어간다. 해진의 '뮤즈'가 된 히카루는 이제보다 적극적으로, 격렬하게 자신의 욕망을 표출한다. 해진은 폐렴과 맞서 싸우면서, 히카루와 함께 자신의 유작이 될지 모르는 소설을 써 나간다.히카루로서 해진과 함께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 스스로 생을 갉아먹으면서 글을 쓰는 걸 더 지켜볼 수 없다는 세훈으로서의 욕망. 두 욕망이 충돌하면서 오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간다. 극은 예정된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그 파국을 목도한 세훈은, 결국 다시는 글을 쓰지 않기로 다짐하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상회로 돌아간다. 전쟁 중에도 사랑이 꽃피듯, 인간은 가장 비인간적인 시대에도 한 줌의 인간성을 유지한다. 뮤지컬 <팬레터>는 1930년대 경성이라는 시공간의 폭력을 특별히 폭로하지도 그렇다고 순화하지도 않는다. 비록 폭압의 시대였지만, 이 순진한 예술가들은 문학의 힘을 믿었다. 그래서 <팬레터>의 이야기는 보편적이다. 설익은 사랑과 설익은 욕망이 뒤범벅된 이 작품은, 온전하고 완성된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한 번쯤 품어봤을 법한 그 풋풋하면서도 어설픈 감정에 대해 노래한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관계없다. 우리는 각자의 뮤즈를 꿈꾸고, 그 뮤즈 때문에 다치고, 그 뮤즈 덕분에 성장한다. 뮤즈를 만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 7인회가 그랬고, 히카루라는 뮤즈를 지나치게 사랑한 해진도, 해진이라는 뮤즈를 너무 아꼈던 세훈도."뮤즈, 달콤하고 뮤즈, 잔인해. 영감을 주고, 생명을 빼앗아가는 그들은 잔인한 천사. 그러나 누가 그들을 감히 거부하겠는가. 내 모든 걸 잃어도 좋으니 오늘 밤 나의 창가에 찾아와주오." - 뮤지컬 <팬레터> No.10 'Muse' 중에서공연 칼럼니스트 권혜은은 지난 10월 19일 <아이즈>를 통해 "<팬레터>의 배경을 우리의 근현대사 중 아무 때를 골라 치환한들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공감 가는 지적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 굳이 이런 배경을 설정해야 했는지 극은 명쾌하게 설득하지 못한다. 이전까지의 김태형 연출이 보여줬던 완성도에 비하면 어딘지 모르게 삐걱거리는 부조화도 간간이 눈에 띈다.하지만, 그 다소 안 맞는 아귀의 우리네 감정을 극이 보여주려고 했기에, 가슴 한구석에 커다란 구멍 하나씩 안고 살아가는 우리를 대변하기에 그렇게 나쁘지 않다. 흔들리던 혼란의 시대만큼이나 그들의 감정도 명쾌하게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러웠을 테니.극의 제일 마지막, 해진은 히카루의 손을 잡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 세훈 앞에 나선다. 히카루는 해진의 손을 잠시 놓고 세훈에게 다가온다. 실수하고, 오해하고, 아팠던 그 마음을 다시 움켜쥐고, 과거의 미진했던 나를 마주한다. 세훈은 잃었던 뮤즈를 다시 찾았다. 그렇게 삶과 죽음, 예술과 사랑에 대해 노래하며 세훈은 자기만의 글을 완성한다.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한다. 그렇게 그도, 이 야만의 시대에 낭만을 노래하는 문인이 된다. 마지막의 감동이 거대한 파도처럼 객석을 휩쓸고 지나간다. 이 감동의 파고가 높은 건, 그 이전의 혼란스러움이 있었기에, 그런 폭력적인 시대였기에 가능했던 게 아니었을까.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뮤즈를 찾고 그 역경을 이긴 끝에 성장한다는 것을 보여줬기에 가능했던 건 아니었을까."오래 살지는 못했지만, 여전히 찬란하게 아름다웠다. 잘게 분해되는 몸 위로 따뜻한 햇살이 덮였다. 영원히 잊히지도 넘길 수도 없는 그 페이지를 붙들고 오늘을 살아. 난 아직도 그 한가운데에, 하루해살이 풀처럼 내 사랑이 죽었을 때, 내 청춘도 죽었고, 차마 돌아보지 못했던 나의 봄을 이제야 보낸다." - 뮤지컬 <팬레터> No.19 '내가 죽었을 때' 중에서그러니 우리도, 이토록 아픈 오늘을 이토록 간절하게 붙잡는다. 다시 오지 않을, 너무 고통스럽고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청춘의 오늘을, 사랑의 오늘을.순수와 참여에 관한 고민, 여전히 유효한 까닭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사이의 논쟁은, 현대에 이르러 일단락되기는 했지만, 우리 문학사에서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논박이었다. 7인회가 가장 아름다운 순수문학을 추구했다면, 그 반대편에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 아래 카프)이 가장 적극적인 참여문학을 주창하고 있었다. 영화 <동주> 속 윤동주와 송몽규의 논쟁도 순수와 참여의 대립이었고, 뮤지컬 <명동 로망스>에도 반영된 박인환과 김수영의 언쟁도 그 연장선에 있었다.그저 예술적인 '미'를 추구할 것인가, 그 예술의 쓰임새와 효용에 관해 이야기할 것인가. 예술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가, 사회적 맥락에서 힘을 발휘할 때 더 의미가 있는가. 예술은 수단이 될 수 있는가, 그 자체로 목적성을 띠는가. 이에 관한 질답이 오가면서 우리 문학은 사회와 소통하면서도 더욱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현대에서 이 물음표가 마침표로 바뀐 이유는 단순하다. 순수와 참여를 무 자르듯이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각자가 지향하는 예술의 목표 지점은 다르다. 한 예술가가 건설하고자 하는 예술 세계 속에서, 순수와 참여의 비중은 제각기 다르게 분배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100% 순수한 예술도, 100% 참여적인 예술도 없다. 예술은 사회와 동떨어져서 존재하는 독립된 섬이 아니기에 온전히 순수할 수 없고, 동시에 예술은 예술 그 자체로 존재하기에 온전히 참여적일 수도 없다.7인회가 추구했던 모더니즘 문학은 어떨까. 그들이 쓰고 읽고 나누었던 글 자체에는 저항의식이나 시대정신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제라는 거악이 조선을 탄압하던 시절, 조선어를 지키고 가꾸려는 그 노력 자체가 곧 저항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빼앗긴 들에 언젠가 봄이 오리라 믿으며, 그 봄이면 피어날 씨앗들을 애써 품고 지키는 게 문인의 역할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시대의 야만 속에서도 낭만과 서정을 지키는 것은 예술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저항이다. "갑자기 투서에다 검열이라니? 왜 이렇게 됐지? 확실한 건, 누군가 있어. 마치 저 위에서 우리를 가지고 노는 듯. 이것도, 저것도, 숨겨, 태워. 엎드려서 잠시만 넘겨. 지금은 이렇게 태울 수밖에. 빼앗긴 들판에도 다시 봄은 올 테니…." - 뮤지컬 <팬레터> No.12 '투서' 중에서투서가 전달되고, 문인들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7인회는 불안해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피땀을 잉크 삼아 쓴 원고들을 어쩔 수 없이 불태운다. 부패한 권력은 예술을 억압한다. 권력의 손아귀에 넣고 권력의 입맛에 맞는 것만 예술로 인정한다. 무엇이 예술인지 아닌지의 잣대는 권력의 손이 아니라 예술가의 손에서 결정되어야 함에도. 그들이 자신들의 글이 사라질까 불안했던 만큼, 그들이 자신들의 문장을 지키고 싶어 했던 만큼, 딱 그만큼 그들은 일제에 맞서 투쟁한 셈이다.2016년, 억압의 시대가 돌아왔다. 박근혜 대통령을 한 번도 독대한 적이 없다는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있을 당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했다는 주장이 <한겨레> 단독 보도를 통해 제기됐다. 인간의 정신을 고양하고, 상상의 한계를 넘어 닿고자 하는 모든 것들을 표현하는 게 예술일진데, 이 정권은 예술조차도 정권의 입맛에 맞는 예술과 아닌 예술로 나눴다. 특정 영화나 예능 프로그램 코너 때문에 CJ를 향한 정권의 외압이 거세졌다는 의혹도 계속 제기되는 건 왜일까. 아니 땐 굴뚝에서 나는 연기일까.그러니, 이처럼 회귀와 탄압이 유행처럼 번지는 시대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낭만을 지켜야 한다. 시대가 야만적이라고 우리의 영혼까지 야만적으로 타락할 수는 없으니까. 글을 읽고, 음악을 듣고, 춤을 추고, 무대를 보는 이 모든 과정, 예술을 만들고 나누는 이 모든 과정이 우리의 '인간다움'을 지키는 길이요, 저 예술의 가치를 모르는 위에 것들과 맞서 싸우는 길이다. 그러니 우리, 그날이 올 때까지 이 아름다웠던 무대를 기억하자. 끝까지 펜을 놓지 않은 해진처럼, 다시 문학을 노래하는 세훈처럼.뮤지컬 <팬레터>의 김태형 연출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1인이다."더 멋지게, 더 현대적으로. 예술만은 자유로워도 괜찮아. 너희의 글은 무슨 의미냐, 혹은 이런 시도 미친 짓이니 때려치워라 따위 말들을 하지만, 부끄럽지 않나?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게. 가난해도 사랑은 알지. 빼앗긴 땅에도 봄은 올 테니. 아무리 점령당한 땅이라 해도 예술마저 점령당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삭막한 이 도시에도 조금은 낭만과 예술이 남기를…." - 뮤지컬 <팬레터> No.04 'Number 7' 중에서

이 정부는 단 한 번도, 진실을 말한 적이 없다

[안 뻔한 티켓북] 가장 정치적인 연극, 시공간을 뛰어넘다 <두 개의 방>

미국인 마이클은 레바논에서 납치됐다. 미국의 외교 정책은 중동의 많은 사람에게 반감을 샀다. 이제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은 세계 최강대국 소속 국민이라는 '지위'로 작동하지 않는다. 주변의 증오가 오롯이 꽂히는 위험한 정체성이 된다. 마이클은 테러리스트의 인질이 되어 손발이 묶이고 눈이 감긴 채 갇히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 레이니를 향해 끊임없이 속삭인다. 마치 바로 옆에 아내가 있는 것처럼.레이니는 마이클의 납치 소식에 미쳐버릴 것만 같다. 하지만 국무부에서 자신의 담당관으로 파견된 엘렌은 매번 똑같은 소리만 할 뿐이다.엘렌 "우리 정부는 남편을 부인 품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모든 윤리적인 수단을 동원해 노력하고 있습니다."시간은 흐르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정부는 언제나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침묵하고 있으라고 레이니에게 강요한다. 그러던 시점, 기자 워커가 레이니에게 접근하여 이야기한다. 남편을 구하고 싶으면 말해야 한다고, 정부를 괴롭혀야 한다고. 심적으로 갈등하며 괴로워하는 레이니는 마이클에게서 위안을 얻는다. 원래 마이클이 쓰던 방의 가구를 모두 치우고,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마이클과 대화를 한다. 마치 바로 옆에 남편이 있는 것처럼.지난 10월 20일 서울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개막하여 지난 13일에 막을 내린 연극 <두 개의 방>은, 마이클이 갇혀 있는 방과 마이클이 떠난 방을 이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정치적인 다분히 정치적인 연극 "모든 연극은 정치적이다."연극 <두 개의 방>의 극작가 리 블레싱은 연극을 이렇게 정의했다. <두 개의 방>은 다분히 정치적인 작품이다. 198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정부의 거짓말을 폭로하며 국가의 의무를 되새긴다. 개인사적 비극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며, 권력이 그리는 큰 그림 안의 퍼즐 조각 혹은 작은 톱니바퀴 하나 정도로 치부되는 국민 개인의 아픔을 정면으로 드러낸다.물론 <두 개의 방>은 그다지 대중적인 작품이 아니다. 자유소극장이라는 무대가 넓은 공간이 아님에도 공간감이 주는 무게가 관객을 짓누른다. 그만큼 극단적으로 단출한 무대 장치 그리고 소품들이 배우 개개인의 연기로 많은 것을 설명하고 설득해야 하는 난제를 남긴다. 역사적 배경이나 자연 과학적 지식의 파편들은 별다른 설명 없이 불친절하게 흩어진다. 웃음기 없는 서사는 묵직한 메시지와 함께 관객의 앉은 자리를 다분히 불편하게 만든다. 극 자체가 정적인데 동선도 별다를 게 없는 데다가 암전은 너무 많다. 그 탓에 극은 무채색이라 할 만큼 톤이 단조로워진다. 조금 더 많은 이가 소화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는다.그런데 왜일까. 극이 끝나고 배우들이 인사를 하는 시간에 내 손은 빨개지도록 열정적으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전작 <히스토리 보이즈>와 <글로리아>에서 잘 보여줬듯이, 노네임씨어터컴퍼니는 자기만의 색깔(그리고 취향)을 확실하게 지닌 집단이다. 노네임이 선택한 대본은 대개 무수한 대사 속에 여러 지식들이 산탄총처럼 발사된다. 그 탄환의 궤적을 굳이 관객이 모두 따라갈 필요는 없지만,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피다 보면, 그 총알 하나하나가 모두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세상을 향해 도발적인 화살을 날리는 작품은, 궤적을 그물망 삼아 위태로우면서도 슬픈 '아우라'를 완성한다. 이번 <두 개의 방> 초연 역시, 노네임다운 선택이었다고 평할 만하다. 속도감은 천양지차이지만, 여러모로 영화 <베리드>를 연상케 하는 대본이다. 중동, 테러리스트, 인질, 정부의 거짓말, 비극적 파멸까지…. 영화 <베리드>가 관객 성향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뉘듯이, 취향이 맞지 않는 관객이라면, 120분이라는 시간 동안 객석을 지키는 게 꽤나 고역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까다로운 작품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관객이라면 나오는 길에 프로그램 북과 대본집을 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민낯의 연기력으로 승부를 봄에도 빠져들 수밖에 없는 배우들의 열연이 우선 돋보인다. 텍스트는 언뜻 동어 반복적이고 상투적인 듯하지만 곱씹을수록 깊고 씁쓸한 중독성을 띈다.특히 198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 텍스트가 2016년 대한민국의 콘텍스트에서 더 큰 빛을 발하는, 시공간의 확장성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잘 쓰인 정치적인 연극은 그 소재가 '유통기간'이라는 것에 묶여 있지 않다. 1988년에 쓰인 작품이 지속적으로 공연되고, 아직도 관객들이 우리와 관련이 있다고 느끼는 이유 중 하나는 세계적으로 만성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 연극 <두 개의 방> 프로그램 북, 작가 리블레싱 인터뷰 발췌 부문 중에서시공간을 관통하는 강한 기시감 엘렌 "정부는 모든 통로를 통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있어요."본래라면 진실이어야 할 이 선언.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작동한다. 국민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국가가 보호해주리라 믿고, 자신의 권리 중 일부를 양도한다. 국가는 국민 위에 군림하지 않으며, 국민은 국가가 행사하는 정당한 권력을 존중한다. 그것이 이 '계약'의 기본이다. 그런데 그 계약을 국가가 파기했다. 국민을 구하는 것을 포기했다.엘렌 "미국 시민들은 우리가 무모한 행동을 할 때, 미국 정부가 항상 우리를 구해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각자 개인 차원에서- 그 대가를 지불해야 할 때가 있다는 걸 말입니다.이 기시감은 무엇인가. 한 배가 바다에서 가라앉고 있을 때, 수백의 목숨이 수장되고 있을 때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진도 체육관에 내려온 권력자는 "200여 명의 잠수부"가 투입되는 등 "많은 인력과 장비가 총동원"됐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하는 말을 국가기간통신사는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 적어 보도했다. 정부가 재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리라 우리 국민은 믿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안다.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이었음을. 이에 대해 정작 국가가 하는 말의 수준은 천박했다.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가 그랬고, "빨리 그쪽에서 벗어나라고 소리 질러도 애들이 어려서 철이 없어서 그런지 위험하다는 걸 못 느꼈는지"가 그랬다. 국가의 탓이 아니라, 철이 없는 아이들의 탓이라는 듯이. 워커 "정부의 중동 정책. 그것 때문에 남편이 인질로 잡혀 있는 겁니다. 딴 게 아니라."엘렌 "말도 안 돼."워커 "우선순위 면에서 본다면, 마이클은 석유 보다 아래고, 미국-소련 관계 보다 아래고…."엘렌 "이 사람은 뭘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네요."워커 "미국-이스라엘 관계, 미국-시리아 관계보다 아래고…."엘렌 "레이니…."워커 "미국-이란 관계…."구난 상황에서 국가의 우선순위는 무엇인가. 국민의 생명은 대체 몇 번째였을까. 한시가 급박한 구조 상황에서도 VIP에게 보고할 '숫자' 파악을 더 중요시했던 걸 보면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부의 속성은 비슷한 것 같다. 하지만 수많은 생명을 잃었음에도 국가의 실패를 전면적으로 인정하는 경우는 드물다. 국가는 항상 최선을 다했고,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엘렌 "상부의 계획이 잘못되었다거나, 상관이 전략적으로 실수를 해서가 아니라, 운이 나빴을 뿐이었다."워커 "그걸 믿어요?"엘렌 "그럼요."우리가 진실에 대해 묻는 이유사실, 우리가 들어야 했어야 할 말은 따로 있다. 국가가 해야 할 말 역시 따로 있다. 실패를 인정하고, 진실을 알리고, 용서를 구하고, 재발을 방지하는 것. 레이니가 엘렌에게 듣고 싶었던 말은 사실 따로 있었지만, 엘렌은 워커에게 '비공식적'으로 실패를 자인할 뿐이다. 레이니는 그 말을 문밖에서야 들을 수 있었다.엘렌 "우리 계산이 틀렸어요. 우리는 마이클의 목숨이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가치는 없다고 판단했어요. 그래서 모든 인질들의 위험 수준을 높인 거죠. 그게 우리의 선택이었어요." 사과하지 않는 나라, 책임지지 않는 나라, 국민을 지키지 않는 나라, 국민을 죽음으로 내모는 나라. 우리는 그런 국가와 정부를 목도하고 있다. 그 사이에 마이클이 끼어 있었다. 마이클처럼 국가에 의해 포기된, 내버려진 인물은 무수히 많다. 당장 우리 머릿속을 스쳐가는 그들의 명단이 있으니.워커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요? 역사가 일어나는 건, 아주 가끔, 엄청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어떤 말 한마디를 들을 준비가 되어있을 때예요. 그 사람들이 들을 준비가 된 그 말을 당신이 가지고 있다면, 그건 엄청난 힘이죠."우리는 지금 역사의 한 가운데 있다. 백만의 시민이 광장에 모인 것처럼, 거리를 밝히는 촛불이 들불마냥 번져나가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 권력자를 향해 던질 날카로운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고, 그 말에 책임질 사람이 해야 할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워커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한 번도 진실을 말한 적이 없어요. 부인도 그건 잘 아실 텐데."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사라진 7시간에 대해 묻고 있다. 정부는 이 문제에 대해 단 한 번도 진실을 말한 적이 없다. 보고를 받았고, 청와대에 있었고, 응당 당연한 조치를 취했다는 말을 엘렌처럼 반복할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변호인은 "대통령이기 전에 여성으로서의 사생활이 있다는 점을 고려해 달라"고 말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여전히 사라진 진실에 대해 묻고 있다. 침묵을 깨고 결국 나서서 목소리를 낸 레이니처럼.아직 이 나라에는 수많은 마이클이 눈을 가린 채, 손발이 묶인 채 갇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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