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2008)와 <황해>(2010)로 공고하게 세워진 나홍진 감독의 잔혹한 세상 속 주인공은 '김윤석-하정우' 콤비였다. 쫓는 사람으로 때로는 쫓기는 사람으로 공간을 가로지르는 두 남자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관객들에겐 잊을 수 없는 충격으로 남아있다.

6년이 흘렀다. 보통의 감독이라면 절치부심 그 시간을 보냈을 터. 다시금 대중 앞에 자신의 세상을 선보인 나홍진 감독은 배우 곽도원(42)의 손을 잡았다. 곽도원이 누구인가. <황해>에서 김구남(하정우 분)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김승현 교수 아니던가. 잠시 등장하고 사라진 한 조연을 나 감독이 소환했다.

9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곽도원이 잠시 말을 잇지 않았다. 그리고 내뱉은 말은 "나홍진 감독이 끝까지 믿어줬습니다"였다.

"나 감독이 끝까지 믿어줬습니다"

  영화 <곡성>에서 경찰 종구 역의 배우 곽도원이 9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 3일 언론 시사 이후 최근까지 그는 "잠을 제대로 못 자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주연의 책임감이 이런 걸까. 질문 하나에도 그는 대답을 길게 하며 최대한 상대방을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 이정민


제작사 폭스 측에선 반대했다. 모처럼 거액을 들인 한국영화 투자인데 인지도가 떨어진다고 판단했을 터. 나홍진 감독은 통역을 데리고 장시간 설득했다. 대체 왜 곽도원이었을까. "평상시의 소심해 보이는 느낌인데 위기시엔 처절한 의지가 엿보이는 인물" 그리고 "악역과 코미디 연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배우"라는 생각에서였다.

<곡성>에서 그가 맡은 역할 종구는 말 그대로 가족밖에 모르는 시골 청년이다. 부지 간에 찾아온 원인 모를 딸의 광기 증상에 종구는 사방팔방을 뛰어다닌다. 그 사이 마을 사람 몇몇이 죽어나가고, 딸 역시 죽을 위기에 놓인다.

영화에서 유독 종구의 절규가 가슴에 박힌다. "대체 왜 내 아이에게 이런 비극이 찾아온 것인가!" 그의 외침은 곧 질문이 되어 관객에게 돌아온다.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 이게 진짜 믿을 수 있는 걸까요. 눈에 보이지 않잖아요. 사랑 또한 그렇고. 이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누군가는 일생을 걸기도 하고 누군가는 아파하며 밤새 술을 마시기도 합니다. 그 보이지 않는 감정들이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요. <곡성>은 그것들에 대한 이야깁니다.

어른이 되면 일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잖아요. 그런데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과한 일이 생기는 순간이 있어요. 그럴 때 인간은 어디까지 뚫고 나가야 할까요. 어른이지만 사고로 소중한 사람을 잃고 별안간 이상한 일이 일어나니 묻는 거죠.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일이 생기는지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영화 <곡성>의 한 장면 영화 <곡성> 속 종구(오른편, 곽도원 분)는 순박한 시골 청년의 대명사다. 그에게 우연히 다가온 여러 사건사고들의 인물의 비극성을 극대화시킨다.

영화 <곡성> 속 종구(오른편, 곽도원 분)는 순박한 시골 청년의 대명사다. 그에게 우연히 다가온 여러 사건사고들의 인물의 비극성을 극대화시킨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곽도원의 말을 보다 깊이 파고들기로 했다. 분명 나홍진 감독은 보통의 청년이자 아빠 이미지를 간직한 그를 강렬하게 원했다. 그래놓고 가장 비극적인 슬픔으로 밀어 넣어 버렸다. 영화 속 캐릭터는 당연히 왜냐고 물을 수밖에 없고, 진범 혹은 원인을 찾아 없앨 수밖에 없다. 그런데 범인을 찾았다고 확신한 순간, 지목당한 자가 묻는다. "정말 내가 악마라고 생각하나?"라고.

"영화에서 범인이 중요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종구를 비롯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묻기 때문이죠.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은 건 죄입니까? 혹은 아닙니까? 결국 이건 왜에 대한 이야기에요. 생각해보세요.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크든 작든 욕심을 갖기 마련인데, 한 시골 사람이 유유자적하며 살다가 그런 일을 당해 봐요. 기자님이라면 누구의 책임인지 묻지 않을까요?"

인과응보 혹은 나비효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곽도원은 최근 종교를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한 사연을 전했다. "연기도 그렇고 뭔가 비우고 욕심을 버리는 게 참 어렵다"며 그는 "뭔가 배우 역시 도를 닦는 과정 같다"고 말했다. 어쩌면 종교 자체는 그에겐 하나의 상징으로 보였다.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혹은 한 차원 높은 깨달음을 위해 그는 잘 버리고 싶어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인터뷰 중 그는 조심스럽게 국내에서 벌어진 비극적 사고를 언급했다.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 규칙을 잘 지키던 사람들이 억울하게 누군가에게 당한 사고들까지. 영화 <곡성>을 통해 곽도원은 또 다른 질문들을 던지고 있었다.

미친듯 몰입하다

  영화 <곡성>에서 경찰 종구 역의 배우 곽도원이 9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황해>의 조연이었던 그는 추운 겨울날 3일 동안 내리 차가운 계단 위에서 죽은 연기를 해야 했다. 나홍진 감독과의 첫 경험이었다. "그 짧은 만남을 나홍진 감독이 기억하고 날 불러준 것"이라며 그가 <곡성> 캐스팅에 대해 입을 열었다. ⓒ 이정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곡성>으로 그는 사활을 걸었다. 단독으로 끌어가는 첫 주연작이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치밀한 나홍진 감독 앞에서 차마 허투루 할 수 없어서기도 하다. 곽도원은 "미친듯이 했다고 자부하는데 나홍진 감독은 더 했다"며 "정말 죽을 것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한국 투자사도 아닌 외국 투자사를 설득해서 제가 들어가게 된 거잖아요. 진이 빠질 때까지 연기했죠. 4개월 전에 미리 다 계획을 짜놓고 막상 촬영에 들어가서 6개월을 장장 찍었으니. 나중에 알고 보니 나홍진 감독은 촬영이 끝나면 응급실로 갔고, 링거를 맞고 다시 다음날 현장에 나온 거더라고요. 소문이 안 나게 단단히 일러두었다는데 제작진 한 명이 귀띔해 준 겁니다. 아니 자기가 무슨 이순신이야? (웃음)

저도 진짜 잘하고 싶었어요. 배우는 원래 스스로 다양한 색깔을 갖고 있는 사람이길 소망하거든요. 예전에 <점쟁이들> 때였나. 김수로 형과 이런 애길 한 적 있어요. '어떤 알약 한 알만 먹으면 세계 최고로 연기를 잘할 수 있다고 치자. 근데 약효가 일주일만 가.' 얼마에 살래요? (웃음) 천만 원이라도 사겠다고 수로 형이 말하더라고요. 이 얘길 둘이서 얼마나 진지하게 했는지 참. 그만큼 배우 입장에선 간절하죠.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고 싶은 겁니다."

5년 전 <범죄와의 전쟁> 때 만났던 그를 기억한다. 20대를 극단에서 보냈고, 각종 단역을 도맡던 시기를 말하며 "찌글찌글했지만 즐거웠던 때"라고 말한 적이 있다. 연극에 빠져 어머니의 임종을 못 지킨 걸 그는 그렇게 후회하고 있었다. 작품으로 우뚝 선 지금의 그에게 "조금은 당당해져도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원한 죄인이지. 꿈에라도 어머니가 나타나셨으면 좋겠다, 술상이라도 올리게"라고 희미한 웃음과 함께 그가 답했다.

그 정도로 그는 연기를 사랑한 사람이다. <곡성>을 통해 곽도원을 처음 접한다면 이후에 나올 <아수라>와 <특별시민>을 볼 때까지 기대를 품고 있길. 곽도원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것에 목숨을 건 사람이니 말이다.

  영화 <곡성>에서 경찰 종구 역의 배우 곽도원이 9일 오후 서울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켜보자. 나홍진 감독 말대로 그는 악역부터 코믹 캐릭터까지 소화 가능한 폭 넓은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다. ⓒ 이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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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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