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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를 죽인 살리에리, 그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리뷰] 영화를 볼 땐 몰랐던, 연극 <아마데우스>가 알려준 특별함에 대하여

18.04.15 11:25최종업데이트18.04.15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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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마데우스>(1984)의 한 장면. 나는 열아홉 살 당시 이 영화를 보고 모차르트에 감정이입했다.ⓒ 시네마 뉴원


이제는 까마득한 1990년의 가을이 떠오른다. 가을의 초입, 대학교 입학시험을 일찍 마친 우리는 남은 몇 달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다.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진정시키려 여러 가지를 시도하셨다. 소위 특수목적고에 다니던 졸업반 우리는 '처음 만난 자유'를 어떻게 만끽해야 하는지 몰랐고, 성적표를 '양', '가'로 가득 채우고도 정신을 차릴 마음이 없었다.

선생님들은 어쩔 줄 모르던 우리에게 영화 <아마데우스>(1984)를 선물했다. 시청각실에 모였던 우리는 톰 헐스가 연기한 모차르트의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19세기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빠져들었다. 귀족들은 나태했고 노곤했으며, 그들이 누리는 예술은 지루한 인생에 활기를 불어넣기 위한 꽃 장식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계급이란 권위는, '천재' 모차르트의 자유로움에 끌리는 감정을 거부했다. 천재는 화려했으나 불손했고, 그들의 삶을 적나라하게 드러냈기에 피하고 싶었다. 세상은 온 힘을 다해 천재를 밀어냈고, 모차르트는 젊은 나이에 쓸쓸히 죽어갔다. 열여덟 살의 나는 '주인공'이라 여겼던 모차르트에게 쉽게 동화되었고 그의 쓸쓸한 죽음을 방조한 살리에리를 증오했다. 천재를 망가뜨린 잔인한 자의 변명이라니, 용서할 수 없었다.

살리에리의 질투, 왜 내 이야기 같았을까

영화 <아마데우스>(1984)의 한 장면. 연극을 보면서 나는 살리에리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시네마 뉴원


그로부터 27년이 지난 후, 나는 지난 8일 원작을 연극 무대로 옮긴 <아마데우스>를 만났다. 분명히 피터 쉐퍼의 동명 소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점은 영화와 같았지만 내용은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열여덟의 내가 집중했던 가엾은 천재의 삶은 안중에도 없었고, 천재를 알아보았다는 이유로 지옥에 갇힌 채 스스로를 갉아먹는 살리에리의 고통이 먼저 느껴졌다.

살리에리는 비엔나의 화려한 귀족들의 삶을 장식하기 위한 '노예의 삶'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그는 모차르트라는 천재의 등장과 함께 비참해졌다. 자신의 재능은 하찮아졌고, 일생을 걸어 이뤄낸 가치들은 무너져 내렸다. 그의 고통은 온전히 모차르트의 천재성을 알아보았기 때문이었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의 인생은 조금 덜 불행했을까? 모차르트를 파괴하기 위한 삶을 선택한 살리에리에겐 파멸밖에 남은 게 없었다. 나는 어느새 살리에리에게서 나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같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만나는 시기에 따라 느끼는 게 다르다. 곧 대학생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들떠있던 열여덟의 아이들에게는, 살리에리의 변명보다 '천재 모차르트'가 겪어야 하는 고난이 크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아마도 젊은 우리가 앞으로 살아야 하는 세상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할까 봐, 우리를 길들이려 할까 봐 두려웠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특별할 줄 알았던 인생이 '그렇고 그런 것'이 되어버린 40대의 나는, 세상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나는 처음부터 특별하지 않았다. 어릴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성적이 잘 나오면 세상이 나 자신을 특별하게 봐줄 거라고 믿었지만, 지금은 내 모습에 실망스러울 때가 많다. 내가 느끼는 불행은 현실 인식에서 비롯된다. 연극의 말미, 신을 부정한 채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망가뜨린 살리에리가 외친 한 마디는 열여덟과 40대의 <아마데우스>를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들었다.

"용서하오. 세상의 모든 평범함을, 내가 용서합니다."

평범한 인생이 뭐 어때서?

영화 <아마데우스>(1984)의 한 장면.ⓒ 시네마 뉴원


우리는 지금껏, 남들의 삶과 비교해 줄 세우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줄 세우기의 맨 앞에 서 있는 사람에게만 '특별함'이 허락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일등이 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불행할 것'을 강요할 뿐이다. 열여덟의 나는 모차르트의 특별함을 갈망했지만, 흐르는 시간과 함께 나는 살리에리의 고통에 집중했다. 살리에리가 느꼈던 불행은 나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억울했다. 줄 세우기의 맨 앞에 서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다. 그 한 명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불행해야만 하다니. 나는 지금껏 일등을 하지 못한 나의 부족함을 자책해 왔다. 그런데 우리가 믿었던 '세상의 방식'이 잘못되었던 것은 아닐까?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살리에리로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 나는 왜 그동안 세상의 방식대로만 나를 몰아세웠을까?

열여덟의 '과학영재'가 40대 '평범한 회사원'이 된 것은 억울할 것이 없다. 다만 스무해 넘는 시간 동안 나 자신의 삶을 갉아먹으며, 자발적으로 '불행'이라는 감옥에 가뒀던 것은 억울하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살리에리로 태어났다 하여 모차르트에 대한 질투로 인생을 낭비하는 것은 바보 같은 선택이다.

늦었지만 나는 이제 내 인생이 그 자체로 특별하다는 것을 안다. 일등은 해 보지도 못한 채, 주변으로 계속 밀려나면서 지금의 내가 되었지만 '내 삶을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낀다.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가 끔찍하게 여겼던 '평범함'은, 결코 모차르트라는 천재성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강요받았던 것뿐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삶을 부러워하며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있으므로 특별하다. 내 인생, 당신의 인생 그리고 우리 모두의 인생에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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