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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서" 고향 온 친구, 충만한 엄마의 밥상이 떠오르다

[오늘날의 영화읽기] 나만의 작은 위로, <리틀 포레스트>에 감사하며

18.03.03 16:50최종업데이트18.03.03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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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봄의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거실에서 뒹굴뒹굴하면서, 엄마의 아침을 가만히 지켜본다.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딸은 도시에서의 피곤함을 핑계로 투정을 부리며, 엄마가 챙겨주시는 것들을 받아낼 뿐이다.

▲ 엄마의 밥상은 언제이고 최고의 '약'엄마는 무척이나 바쁘십니다. 땅에서 거둬낸 것들로 상을 차리고, 마흔이 넘은 큰 딸을 위해 밥을 지으십니다. 도시에서 지쳐 내려온 고향에서, 가장 큰 위로가 되는 것은 엄마의 밥상이네요.ⓒ 이창희


"엄마! 엄마!"

종종 시야에서 사라지는 엄마를 애타게 찾고 있자면, 엄마는 두 손 가득히 무언가를 챙겨서 들어오신다. 봄과 함께 땅에서 조금씩 올라오는 냉이를 한 움큼 쥐어 들고 오시기도 하고, 겨울을 이겨낸 시금치를 뜯어오시기도 한다. 냉장고를 가득 채워놓은 식재료들은 '마트 표'가 아니라 엄마가 직접 땅에서 장만하고 저장해 놓으신 것들이 대부분이다. 부엌에서 들리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자면, 냉이가 끓고 시금치가 데쳐지는 냄새가 솔솔 전해진다. 가을 밭에서 손수 지으신 참깨로 직접 짜내신 참기름의 고소한 향기가 느껴지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향할 때가 되었음을 안다.

"엄마, 상 들고 갈까?"
"응. 잠깐만, 밥만 푸면 돼."


엄마와 나의 작은 상 위에는 부엌에서 들려온 소리들이 만들어낸 것들이 옹기종기 올라와 있다. 햇살과 함께 자라난 냉이는 두부와 조개가 가득한 찌개로 변했고, 겨울의 추위를 이겨낸 시금치는 '설탕을 뿌린 것'처럼 단 맛을 품은 나물로 변했다. 여기에, 가을 들판을 노랗게 물들였던 아빠의 논에서 수확된 쌀은, 어느 때보다 좋은 '밥 냄새'를 풍기며 수저 옆의 빈자리를 채운다. 완성이다! 허리가 아프다며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던 '다 큰 딸'은 이때만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먹거리로 가득한 상을 번쩍 들고 부엌을 나선다.

"먹자. 또 풀밖에 없네."

엄마는 '특식'이 없는 상이 멋쩍은 듯 웃으시지만, 나는 이 작은 상이 어떤 푸짐하고 비싼 식당의 차림보다 '충만할 것'을 이미 알고 있다. 맞다, 이거다. 힘들 때마다 기억나던 향기는, 지쳐 쓰러질 것만 같던 때마다 기억해 내곤 했던 고향은, 바로 엄마의 이 '푸짐한' 밥상이었다. 아빠와 엄마가 키워내신 것들로 가득했던 고향의 밥상, 그것을 기억하게 하는 영화를 만났다.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리틀 포레스트>(2018)를 임순례 감독이 리메이크했다니, 어떻게 변했을지도 궁금했다.

"진짜, 왜 온 건데?"
"배가 고파서 왔어. 정말, 허기져서 온 건데."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혜원(김태리 분)이 궁금하여 친구가 묻는다. 혜원은 '배가 고파서'왔다고 대답한다. 친구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다시 묻지만, 나는 그 답의 의미를 바로 알아챘다. 도시에서의 '분주함'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허기'를 말이다. 그리고 그 순간,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던 엄마의 밥상이 전해주는 충만함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혜원이 찾아온 고향은 그녀가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던 것처럼 '좋은 것'만으로 그녀를 맞이한다. 물론, 카메라 뒤에 숨어있는 '좋지 않은 것'들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나는 힘들게 살아온 그녀를 품어주는 고향집이 너무나 반갑다. 그녀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는 마을의 어른들도 오랜 세월을 같이 나눴던 죽마고우들의 우정도, 모두 내 기억속에 남아있는 '고향'의 일부였으니 말이다.

"남이 정해주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어."

고향에 왜 돌아왔는지를 묻는 혜원에게 재하(류준열 분)가 대답한다. 갑자기 눈물이 쏟어졌다. '남이 정해주는 삶' 안에서 괴롭다 느끼지만, 이것을 떠나면 인생에서 패배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나에게 하는 말 같이 들렸나 보다. 우리는 왜 남이 정해놓은 틀 안에서 나의 삶을 계속 '남의 눈'으로 평가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내 인생의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을 왜 나의 기준으로 보지 못할까?

"처음에 떠나고자 결심했을 때, 불안하지 않았어요?"
"불안했죠. 하지만, 서울에서의 삶이 너무 힘들었어요. 매분 매초를 헤아리면서 살아야 하는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죠. (지금은?) 너무 좋아요. 제가 제시간을 제 방식으로 쓰고 있거든요. 돈이요? 정말 신기하게도, 굶어죽지는 않아요. 딱,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들어온다니까요! 문제는 (돈이) 아니에요."


가끔 서울에 가게 되면 게스트 하우스에 머물 때가 있다. 지난 번에 만난 청춘은 서울의 삶을 정리하고 제주로 내려갔다고 한다. 아침의 짧은 대화에서 그녀는, 여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는 '불만 가득한' 마흔에게, 용감하고 씩씩한 경험을 나눠주었다. 역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이 순간엔, 이런 멋진 가르침을 던져준 청춘이 나의 스승이었으니 말이다. 원하는 것을 선택한 다음이 두려워 멈칫거리며 살다 보니, 이미 마흔이 훌쩍 넘어버린 나에게 그녀의 환한 웃음과 밝은 목소리는 여전히 큰 숙제로 남아있다.

임순례 감독의 영화 <리틀 포레스트>(2018) 한 장면ⓒ 영화사 수박


"사랑하는 내 딸아. 나는 네가 이 땅에 굳건하게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랐단다." (혜원 엄마)
"금방 다시 돌아올 거 같은데? 내가 보기에 혜원이는 '아주심기'를 준비하고 있을 뿐이야." (재하)


영화에서는 내내 그들이 내딛고 있는 '땅'과 그 땅에 뿌리내리고 있는 '생명'을 얘기한다. 매 순간을 바쁘게 살지만, 결코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도시에서의 삶과 대척점에서 그들이 품어내는 생명력은, 결국, 대지의 여신 가이아에게서 허락된 것이 아닐까? 혜원에게 혜원의 엄마가 심어주고 싶었던 그 굳건한 '뿌리내림' 말이다. 혹시라도 지금 당신이 허기를 느끼고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 때문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누군가가 강요한 강박 안에서 끝없이 자신을 소진해 가며 살아가는 삶이, 당신에게 빼앗아가는 활기가 그 원인은 아닌지 말이다.

나에게 엄마의 밥상은 언제이고 '약'이었다. 내가 느낄 수 있는 생명력은 언제나 '자연'이 허락한 것이었다.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제주도로 내려가 새로운 활력을 찾아낸 젊은 스승의 이야기도, 내가 기댈 수 있는 '나만의 작은 숲'을 만들겠다 결심하는 혜원의 이야기도 모두 같은 곳을 향해 있다. 결국, 활력으로 채워진 삶은 스스로가 선택한 삶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에만 얻어진다는 것 말이다. 나는 혜원이 선택한 '아주심기'가 굳건하게 그녀의 땅 위에 뿌리를 내릴 것을 믿는다. 그리고 오늘은, 엄마의 밥상이 전해줄 위로를 기대하며 집으로 향한다. 언젠가는, 나의 고향에 굳건하게 뿌리내릴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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