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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 년 전 초상화, 드라마는 말하지 않은 진실

[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SBS 드라마 <홍천기>

21.09.20 16:41최종업데이트21.09.20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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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사극 <홍천기>는 주인공의 그림 모사 활동을 다소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아버지 병구완을 위해 화가 홍천기(김유정 분)가 그림을 모사해 판매하는 모습이 이 드라마에서는 그렇게 비치고 있다.  
 

SBS <홍천기> 한 장면. ⓒ SBS

 
홍천기가 화랑에 가서 은밀히 그림을 매매하는 장면이 8월 31일 제2회 때 있었다. 이때 화랑 경영자 정쇤내(양현민 분)는 홍천기가 갖고 온 작품을 펼쳐 보면서 "실로 진위를 구별하기 어려운 솜씨다. 내가 이래서 우리 홍 화공을 좋아해"라고 한 뒤 "뭐랄까, 화공으로서의 자존심이 없달까? 아주 그냥 똑같아!"라고 감탄을 한다.
 
정쇤내는 홍천기가 모작품을 몰래 판매하는 행위를 놓고 '화공의 자존심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남의 작품을 완벽히 베껴내는 것을 두고 화가의 자존심을 운운했다. 정쇤내의 눈에 홍천기가 정통 화가로 비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주 그냥 똑같아!"라는 정쇤내의 말은 분명히 칭찬은 칭찬이다. 하지만, 부정적 평가를 저변에 깔고 있는 칭찬이다. 정쇤내가 볼 때 홍천기는 그런 애매한 칭찬을 받을 수밖에 없는 화가였던 것이다.
 
제2회에서는 관헌들이 정쇤내의 화랑에 들이닥쳐 모작품 단속을 하는 장면도 있었다. 포도청에서 나온 듯한 관헌들의 통솔자가 "맡겨진 고화를 모작해 진품인 양 판다는 신고가 들어왔다"며 "다들 샅샅이 조사하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물론 이 시대에도 모사품을 진품인 양 판매하는 행위는 당연히 단속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처럼 모작 활동 자체가 부정적으로 평가되지는 않았다. 이 드라마 속의 장면들은 그림 모사에 대한 조선시대의 관념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다분히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조선시대 미술 활동을 바라본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정도전의 스승이자 정적이었던 목은 이색의 초상화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고려 말 온건 개혁파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던 이색은 위화도 회군(1388년)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정도전 그룹을 견제한 일로 인해 유배와 석방을 되풀이하다가 불운하게 인생을 끝마쳤다.
 
뛰어난 모사 기술
 

이색 초상 ⓒ 퍼블릭 도메인

 
 
이색이 세상을 떠난 해는 조선 건국 4년 뒤인 1396년이다. 지금으로부터 625년 전이었다. 그런데 그의 초상화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현재, 보물 제1215호로 지정돼 있다.
 
625년 이전에 그려진 초상화가 오늘날까지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보관 기술의 우수성 때문만은 아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무엇보다 모사 기술 덕분이었다. 현존하는 이색 영정이 모사된 시점에 관해 문화재청이 펴낸 <한국의 초상화: 역사 속의 인물과 조우하다>는 "누산영당본은 1654년 사대부 화가인 허의(1601~?)와 17세기 유명한 화사(畵師)인 김명국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 설명은 이색의 후손이 건립한 충남 예산군 누산영당에 보관돼온 보물 제1215호에 관한 것이다. 이 설명에 따르면, 오늘날 전해지는 이색 초상화는 1396년 이전에 그려진 게 아니라 조선 효종 임금 때인 1654년에 그려진 것이다. 1654년 당시의 저명 화가인 김명국이 당시에 존재하던 이색 영정을 모사했던 것이다.
 
이런 예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오늘날 전해지는 옛날 미술품들은 그것이 오래 전에 제작된 것일수록 원본보다는 모사품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 문화재 속에 이런 모사품이 한둘이 아닌 것은 옛날 사람들이 그림 모사를 예술품 전승의 방식으로 인정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카메라도 없었고 교통·통신도 발달하지 않았고 대중 매체도 없었던 시대에, 유명한 미술품을 감상하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모사품을 입수하는 길밖에 없었다.
 
또 모사는 미술품을 후대로 전승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카메라가 있고 교통·통신이 발달하고 대중매체가 있는 지금 상황에서도 미술품을 천년만년 원상대로 보관하기는 힘들다. 사진기로 찍어두거나 붓으로 베끼는 일은 그래서 부득이할 수밖에 없다. 이 부득이함은 옛날로 갈수록 더 절실했다.

문화 전달의 기법
 

물론 옛날이라고 해서 위작이 허용됐던 것은 아니다. 작품의 창작자를 조작하는 위작 행위는 어느 시대건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옛날 사람들이 인정한 모사는 원저작자의 신원을 드러내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런 전제 하에서 모사가 문화 전달 기법으로 용인됐던 것이다.
 
<홍천기> 속의 정쇤내는 "뭐랄까, 화공으로서의 자존심이 없달까? 아주 그냥 똑같아!"라며 칭찬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말을 내뱉었다. 이 대사는 조선시대의 관념을 잘 반영한 것이 결코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모사 활동이 직업 화가의 필수 코스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2019년에 <동양예술> 제43호에 실린 고연희 성균관대 교수의 논문 '조선시대 모사의 양상과 미술사적 의미'는 "전근대기의 모사는 그림 학습의 기본 단계였다"며 "이는 모사가 회화의 한 요소이자 기본자세의 하나로 인식된 오랜 역사에 기인한다"고 설명한다. 이 논문은 "5세기 말의 사혁(謝赫)이 제시한 그림의 육법(六法) 중의 하나가 전이모사(轉移摹寫)였다"고 한 뒤 이렇게 서술한다.
 
전이모사는 옛 것을 존중하여 배우고 반영하는 회화 제작법이며, 공자가 말한 술이부작(述而不作)의 가치관 즉 동아시아의 존고관(尊古觀)과 상통하는 가치를 기저에 두면서 실제로 회화 학습에서 전습(傳習) 혹은 모습(模習)으로 불린 훈련 단계를 요구했다.

<논어> 술이(述而) 편에서 공자는 자신이 옛 사람의 가르침을 저술했을 뿐 새롭게 창작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겸양을 담은 이 표현은 옛 것을 숭상하는 존고관을 반영했다. 그런 존고관이 옛 화가들의 그림 모사에도 반영됐다는 것이 위 논문의 설명이다.
 
모사 연습이 필수였다는 점은 연산군의 아버지인 성종의 그림 솜씨에 대한 평가에서도 느낄 수 있다.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을 동생으로 둔 허봉의 <해동야언> 제2권은 성종이 취미로 '먹 장난'을 한 사실을 소개하면서 그의 그림에 관해 이런 평가를 내렸다.
 
이는 모두 하늘이 준 재능이다. 베끼는 연습을 힘들게 하지 않았는데도, 오묘함이 옛 규범에 다다랐다.
 
모사는 옛 사람의 기술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사는 자신을 옛 사람과 연결하는 과정이 된다. 그런데 성종은 모사 과정을 거치지 않았는데도 고전적인 대가들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동야언>은 평가했다.
 
임금에 관한 평가이므로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사 훈련을 하지 않았는데도 실력이 대단했다'고 평가한 부분이다. 모사가 필수 코스였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글이라고 할 수 있다.
 
성종처럼 그림을 잘 그렸다는 평가를 받은 또 다른 군주 중 하나는 그의 증손자인 선조다. 선조의 사위이자 문인인 박미의 <분서집>에 따르면, 선조는 난과 대나무를 잘 그렸다. 그런데 선조는 증조부와 다른 데가 있었다. 성종과 달리 모사를 많이 했던 것이다.
 
<분서집> 제11권은 "연경(베이징)에서 비싼 값을 주고 난죽보(蘭竹譜)의 희귀본을 구해 놓고 평소에 항상 베끼기 연습을 하며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말한다. 중국에서 구해온 그림책을 놓고 모사를 열심히 했던 것이다.
 
이처럼 옛날에는 모사가 당연한 일로 인식됐다. 모작품을 갖고 부당이득을 취하면 형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는 있었어도, 모사 자체는 화가의 필수 코스로 인식됐다. 만약 그것이 백안시됐다면, 인류가 남긴 예술작품들의 상당수는 오늘날까지 보존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림 모사를 둘러싼 드라마 <홍천기>의 장면들은 옛날 사회의 분위기를 온전히 반영하기 힘들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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