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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라고 증거도 없이 살인죄?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에 들어서면] 넷플릭스 <해안의 살인>

21.07.14 16:39최종업데이트21.07.14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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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의 살인> 영화 포스터 ⓒ 넷플릭스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스페인 다큐멘터리 <해안의 살인>은 동성애 혐오정서가 평상시엔 별로 드러나지 않다가 특수한 기회를 잡으면 폭발적으로 작동하게 되는 문제를 폭로하는 작품이다. <해안의 살인>은 살인사건의 수사과정과 재판과정에서 동성애자 이름이 한 번 거명되자, 그 사람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실제론 무죄임에도 유죄로 판단받고, 진범 체포 이전까지 실형을 살았던 실제사건을 보여준다. 넷플릭스에서 관람할 수 있으며, 상영시간은 1시간 28분이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1999년),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작은 해안가 마을, 열아홉 살 소녀 로시오가 잔혹하게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그런데 로시오가 실종 25일 만에 완전히 부패된 시신으로 나타나는 바람에 수사팀은 매우 난감했다. 범인을 추리할 만한 단서를 거의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수사팀은 시신의 자세가 전형적인 성폭력 피살자처럼 보인다는 점을 갑자기 의심하기 시작했다. 범인이 수사에 혼란을 야기할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연출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더니, 나중엔 수사방향을 성폭력에만 집중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내 수사팀은 로시오 살해사건을 '증오, 복수' 범죄로 분류하고 수사방향을 그쪽으로 확정하기에 이른다. 수사팀은 로시오 주변인물들에 대한 탐문수사를 실시했다. 가까스로 애도기간을 마친 로시오의 유가족과 그녀의 주변사람들이 용의선상에 올랐다.
 
수사팀이 최종 용의자로 간추린 사람은 3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여성 동성애자 돌로레스였다. 돌로레스는 로시오의 어머니 알리시아와 수년간 연인관계였다. 돌로레스는 한때 알리시아와 동거하며 알리시아의 자녀들을 함께 양육하기도 했다. 그런데, 돌로레스는 알리시아의 딸 로시오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고, 살인사건 발발 1~2년 전엔 알리시아와 결별한 터였다.  
 
수사관들은 대번에 돌로레스를 진범으로 확신했다. 결정적 증거는 없이 막연한 정황증거만 가득했지만 날이 갈수록 수사관들의 확신은 단단해졌다. 돌로레스의 체포과정과 심문과정이 언론에 낱낱이 보도되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는 마음으로 동성애 혐오정서를 되새김질하듯 은근히 환기했다. 무죄추정원칙 같은 것은 깡그리 무시됐다.

증거와 단서를 통한 입증과정조차 필요없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가혹한 여론재판이 시작됐다. 사건현장에서 발견된 담배꽁초에서 남성의 DNA가 확인되었고, 자동차 타이어 흔적과 돌로레스 소유의 자동차 타이어 무늬가 완전히 불일치했지만, 수사팀과 대중여론은 물론 재판부마저 그런 물증들을 무시했다.   

반대되는 증거 줄줄이 나와도... 15년형 선고한 재판부
 

▲ 스크린샷: 파란옷 입은 여성이 돌로레스 바스케스 ⓒ 넷플릭스

 
돌로레스는 이른바 여성답지 못한 얼굴, 표정, 말투, 습관을 갖고 있었다. 정숙한 여성이란 고정관념에 들어맞지 않는 여성이었다. 그런데다 자연스럽게 커밍아웃을 한 상태도 아니어서 더 수상쩍어 보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로시오의 어머니 알리시아는 돌로레스가 체포되자 즉시 돌로레스를 진범으로 확신하며 돌로레스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그래서 알리시아와의 결별에 대한 보복으로, 또 알리시아와의 관계를 로시오가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 돌로레스의 범행동기로 제시되었다.

이는 동성애 혐오정서에 힘입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동성애 혐오정서는 심지어 재판과정에서도 빛(?!)을 발했다. 급기야 돌로레스는 15년형을 선고받았다. 수사팀을 비롯해 스페인 사람들은 '정의구현'을 일제히 다함께 기뻐했다.
 
그러나, 반전! 돌로레스는 범인이 아니었다. 범인은 따로 있었다. 토니 킹(혹은 토니 브로미치, 알렉산더 토니 킹)이라는 남성이었다. 그는 과거 성폭행범으로 런던에서 조사받고 실형을 살았던 바 있으며, 무려 '인터폴'이 예의주시하는 인물이었다. 인터폴은 그가 스페인으로 이주하자 스페인 정부당국에 즉시 그 사실을 통보했다. 그러면 인터폴의 그 같은 통보 덕분에 그를 체포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로시오 살해사건 4년 뒤 그가 스페인에서 성폭력 살해사건을 한 건 더 저질렀고, 그가 죽인 여성 소니아의 시신이 발견되는 바람에 그는 붙잡혔다.
 
로시오와 달리 두 번째 피해자 소니아는 실종 5일째에 발견되었다. 시신의 상태는 로시오에 비하여 비교적 온전한 상태여서 잔혹한 폭력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중 결정적 증거는 소니아의 손톱 아래에 있던 남성의 피부조각이었다. 조사결과, 이 피부조각의 DNA가, 앞서 일어났었던 로시오 사건현장 증거물(담배꽁초)의 DNA 샘플과 일치했다. 그리고 때마침 한 여성이 수사팀에 전화를 걸어왔다. 토니 킹과 결혼한 적이 있었던 여성 세실리아 킹이었다.

로시오 사건이 일어났을 무렵 세실리아는 남편의 수상한 행동을 목격했고 증언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때 당시 주위사람들이 세실리아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세실리아를 망상론자로 취급하는 사람들마저 있었다. 그런 데다 동성애자 돌로레스가 진범으로 체포돼 여론의 뭇매를 맞으며 재판을 받는 중이었다. 세실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이후 세실리아는 토니와 이혼했는데, 소니아 살해사건이 일어나자 세실리아는 자신의 합리적 의심을 더는 묵혀둘 수 없었다.
 
세실리아의 제보는 매우 유력했고 적절했다. 토니의 DNA는 두 사건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물에서 채취된 DNA와 일치했다. 마침내 토니가 붙잡혔다. 그러자 소니아의 어머니는, 몇 년 전 로시오 피살사건 때 그를 진작 체포했었더라면 자신의 딸이 죽는 일이 생기지 않았을지 모른다며, 울분을 표했다. 그런데 소니아 어머니처럼 울분을 표할 사람이 또 있었으니, 이미 감옥에서 실형을 살고 있던 돌로레스였다.
 
돌로레스는 몇 년 전 체포, 심문, 재판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과하는 동안 자신이 겪은 고통을 전혀 보상받을 수 없다는 데에 망연자실했다. 수사팀, 동네 주민들, 언론, 재판부 중 그 어느 누구도 자신들의 오인과 오판에 대하여 돌로레스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근거도 없이 유죄로 정죄하며, 동성애를 마치 살인의 증거물인 양 취급했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다. 돌로레스에게 불리한 증언을 서슴지 않았던 돌로레스의 옛 연인 알리시아 또한 수사관들에게 책임을 미루며 뒤로 물러섰다.
 
진범이 붙잡힌 후 돌로레스는 기자회견을 열어 자신의 결백을 공표했다. 자신은 처음부터 계속 결백을 주장해왔노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은 진실이었다. 오직 레즈비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릇된 오해를 받았고, 모진 고초를 당했으며, 비인간적 대우를 받았지만, 그녀는 견뎌냈다. 침몰하지 않았고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기자회견 후 담담하고 단단한 표정을 지으며 일어서는 그녀에게 나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응원의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형벌을 받았지만, 결국 "진실은 결코 침몰하지 않는다"는 진실을 온몸으로 입증해준 한 인간에게!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해안의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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