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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이혼을 앞둔 열 살 소녀의 섬세한 마음

[넘버링 무비 215] 영화 <흩어진 밤>

21.07.03 12:48최종업데이트21.07.03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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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흩어진 밤> 메인 포스터 ⓒ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아빠는 거실 소파에 엄마는 부엌 식탁 의자에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있다. 삭막한 거실에는 TV 소리만이 정적을 채울 뿐 두 사람 사이에 대화는 들리지 않는다. 딸 수민(문승아 분)만이 그 사이를 오가며 부지런히 말을 건다. 요즘 지내고 있는 집의 주소를 거실의 아빠에게서 물어 부엌의 엄마에게 달려가 말하는 식이다. 하지만, 냉랭하게 굳어버린 분위기는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잠시 후에 두 사람은 아들 진호(최준우 분)와 딸 수민을 거실에 앉혀 놓고 무거운 이야기를 꺼낸다. '엄마 아빠가 할 말이 좀 있는데, (…) 그러니까 엄마하고 아빠가 각자 다른 집에 산다는 것뿐인데. 아, 그게 헤어진다는 게 아닌 건 아니고…'

아직 제대로 정리도 되지 않은 부모의 이야기지만 두 아이는 생각보다 담담하다. 이미 징조는 있었다. 엄마는 밤마다 술을 들이켰고, 아빠는 한 달이나 집을 떠나 있었고. 심지어는 어디로 이사를 간다는 말도 없이 모르는 사람들이 집을 찾아와 여기 저기를 둘러보고 가기도 했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은 이 집에 드리우기 시작한 짙은 그림자의 존재를 이미 눈치채고 있었던 것 같다. 부모에 의해 가족의 해체에 대한 문제는 결정이 되었으니, 이제 모양의 문제가 남았다. 어떤 모습으로 헤어질 것인지에 대한 결정. 쉽게 이야기하면, 누가 아빠와 살 것인지, 또 누가 엄마와 살 것인지를 정하는 문제다.

영화 <흩어진 밤>은 부모님이 이혼을 결심한 후 엄마, 아빠 그리고 오빠 진호까지, 네 가족이 더 이상 함께 살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된 막내 수민의 일상을 통해 가족의 해체를 바라보는 아이의 심리를 세심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영화 <흩어진 밤> 메인 포스터 ⓒ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02.
'그러면, 오빠랑 나랑 떨어져서 한 명은 아빠랑, 한 명은 엄마랑 살게 되는 거야?'

영화에서 부모의 관계에 조금 더 적극적인 것은 오빠보다 동생 수민이다. 오빠 진호가 아빠와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음과 동시에 공부를 핑계로 엄마의 편에 가까이 서 있는 것과 달리 수민은 아직까지 부모의 사이에 끼어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진호가 아버지와의 관계에 조금도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돌잡이로 비행기를 잡았다는 고리타분한 이유이기는 했으나 어쨌든 아버지로부터 받은 드론을 지금까지 아끼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몇 살 차이 나지는 않지만, 그 몇 년의 시간을 아버지와 조금 더 부대끼며 그의 모습,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의 부정적인 면들로 인해 포기한 마음이 조금 더 많다고 하는 쪽이 더 적절하다. 부모의 이별을 환영하는 쪽은 아니지만, 만약 그렇게 되어야 한다면 아빠보다는 엄마의 편에 함께 있고 싶은 마음, 딱 그 정도의 위치에 놓여있다.

반면, 오빠가 내려놓은 그런 마음들을 수민은 아직 붙잡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와 오빠가 엄마와 공부를 하고 있으니, 말없이 아빠가 혼자 나가 살고 있는 집으로 향했던 것도 같은 이유다. 오빠와 달리 아직까지는 아빠의 눈치를 살핀다는 뜻이기도 하다. 엄마와 아빠 누구와도 헤어지기 싫은 마음. 그런 마음은 영화 전반에 걸쳐 등장한다. 처음에 거실과 부엌 사이를 오간 것도 그녀, 박물관 벤치에서 아빠의 음료를 챙기던 것도 그녀다. 엄마와 아빠, 두 사람이 사랑했던 시간에 서로 주고받은 편지를 몰래 전하는 것도 그 때문이고, 두 사람 모두에게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느냐고 나지막이 물어오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03.
그런 마음으로 혼란스러운 때를 지나고, 또 누가 누구와 함께 살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순간에 지금 살고 있는 집을 팔고 엄마가 살 집으로 방 2개가 있는 곳을 구한다는 이야기는 수민에게 큰 고민을 안긴다. 큰 방을 나눠서 쓸 수도 있다는 말에 그 방을 오빠와 둘이서 나눠 쓰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오빠와 자신이 엄마와 함께 산다는 가정 하에) 그것 역시 자신의 긍정적인 추측일 뿐이다. 오빠와 자신 둘 중 한 명이 엄마와는 함께 살지 못하게 된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게 하는 것은 아니니까.

수민의 시각에서 가족의 해체를 막고 싶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떨어지고 싶지 않은 것은 오빠 진호다. 사립 학원의 영어 선생님으로 바쁜 엄마와 박물관의 학예사로 무뚝뚝한 아빠를 대신해 준 사람. 영화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수민은 오빠의 곁을 떠나는 법이 없는데, 특히 엄마가 일하는 학원에까지 오빠를 찾아 오던 장면은 수민의 그런 마음을 가장 잘 반영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10살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아이인 점을 생각하면, 엄마의 가까운 쪽에 놓여 있는 오빠에게 엄마를 빼앗기고 싶지 않음 마음도 일면 없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아이들의 이런 복잡한 사정은. 특히 진호에게 있어서, 엄마가 없는 아빠와의 하루가 처음으로 그려지던 날에 그 이유가 일면 드러난다. 아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어디 좋은 곳에 한번 같이 가본 적도 없고, 가게 되더라도 즐거웠던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이다. 심지어 아빠는 항상 자기가 일하는 박물관에만 데리고 오곤 했었다. 이것으로 지금 마주하게 된 가정의 해체, 그 일의 잘못이 모두 아빠에게 있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적어도, 서로 누군가와 함께 살고 싶어서 내적 갈등을 겪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살고 싶지 않아서 다른 한 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리게 만든 원인은 아빠였음이 분명하다.
 

영화 <흩어진 밤> 메인 포스터 ⓒ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04.
이제 아이들은 수민의 열 번째 생일을 축하하러 온 할머니 앞에서도 행복한 가정을 연기하는데 동원된다. 가족의 해체를 목전에 두고 어려운 마음을 담게 된 것도 모자라 그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고 드러내지도 못하게 되고만 것이다. 엄마는 이 상황에 대해 이런 것은 거짓말이 아니라고, 다 크면 알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수민이 지금 열 살이라는 점이고 부모의 그런 강요로 인해 도움을 요청(엄마와 아빠의 관계를 중재해 줄 수 있는 대상)할 기회까지 놓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수민은 진호와 함께 도망을 친다. 자신들의 답답한 마음을 잠깐이라도 느껴보라는 듯이. 가정의 해체가 위(부모)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아래(자식)으로부터 시작되어도 지금처럼 담담하게 대할 수 있느냐고 묻기라도 하는 듯이 말이다. 물론 효과적이지는 못했다. 엄마는 두 사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왜 늦게 돌아왔냐고 타박을 할 뿐이다. 이런 일탈 행동을 처음 했기 때문이리라. 지레 겁을 먹은 아이들은 부모에게 충분히 겁을 줄만큼 바깥에서 버티지 못했고, 이런 경험을 한 번도 해본 일이 없는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그런 마음을 갖고 행동으로 옮길 것이라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고. 의미는 분명히 가질 수 있는 장면이다. 가정의 안정과 행복을 결정할 수 있는 행위가 비단 어느 한 쪽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님을 아이들이 이해하고 행동으로 옮긴 첫 시도였으니 말이다.

05.
부모의 사정이 극의 시작점으로 이용되고 오빠 진호의 이야기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원동력 중 하나로 활용되지만,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수민이다. 부모의 이혼을 앞두고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끼는 대상으로 활용되는 인물. 그리고 영화 <흩어진 밤>에는 이와 관련해서 돋보이는 연출이 하나 있다. 영화의 어떤 장면이나 대상이 수민을 필요로 할 때, 어떤 순간에도 카메라가 수민의 정면을 놓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수민이 자신의 의지로 모습을 감추고자 했을 때, 딱 그 상황의 장면만 제외하면 거의 모든 장면에서 그렇다. 부모가 처음 이야기를 꺼내던 가장 처음의 장면에서도, 할머니 앞에서 행복한 가정을 연기할 때도. 심지어는 박물관에서 오빠와 아버지 직장 동료의 대화 중심에 수민이 놓였을 때, 이 장면의 정면에 놓이게 되는 것도 저 멀리에서 걸어오는 수민의 모습이다. 이 영화의 장점이 가족의 복잡한 사정을 수민이 느끼는 감정을 통해 섬세하면서도 조심스럽게 그려내고 있는 부분임을 고려하면 수민을 언제나 관객의 시선 중심에 놓고자 하는 시도는 정확한 접근처럼 보인다.
 

영화 <흩어진 밤> 메인 포스터 ⓒ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06.
영화의 마지막에서 부모는 다시 한번 거실 소파에 아이들을 앉혀 놓고 가족의 미래에 대한 최종적인 선언을 하고자 한다. 온전히 부모의 사정에 의한 선언. 영화의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오빠 진호도 자신의 사정을 적극적으로 내세운다. 진호는 자신이 엄마랑 사는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 진호와 수민이 떨어져 각각 한 명씩 엄마와 아빠를 선택해야 하는 흐름 속에서 앞서 설명했던 여러 이유로 아빠와 함께 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분위기는 가장 어린 수민이 결정하는 것으로 점차 흐르고, 동생의 선택에 따라 엄마와 함께 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는 진호는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엄마 아빠 다시 친해지면 이사 갈 일도 없고, 넷이 같이 살 수도 있고, 다시 친해지면 안돼?'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간다. 부모가 아이들을 거실에 모아 두고 처음으로 이혼에 대한 결정을 에둘러 언급하던 장면이다. 아이들의 표정을 정면에 두고, 엄마와 아빠의 뒷모습이 보이던 구도가 기억을 스친다. 자신들의 이별, 이혼에 대한 이야기를 돌려가며 꺼내고는 이 결정에서 중요한 이별의 형태에 대해서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고 말하던 부모의 모습이다. 그런 부모의 이야기를 담담하지만 불안한 눈빛으로 듣던 두 아이의 표정과 대비된 두 사람의 뒷모습은 비겁함을 상징하는 듯 싶었다. 자신들에게는 홀가분한, 아이들에게는 짓눌릴 결정을 마음대로 휘두른 어른의 무책임함.

영화의 마지막까지 그 무책임한 모습이 이어진다. 부모는 아이들의 결정을 존중하기 위해 선택권을 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무책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자신들이 이혼을 선언한 이후로는 아이들을 위해 가까워지려는 노력 따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영화 <흩어진 밤> 메인 포스터 ⓒ 영화배급협동조합 씨네소파


07.
수민은 이제 다시 한번 모습을 감춘다. 자신의 생일에 그랬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 이제는 부모도 겁이 날 정도다. 사라진 수민을 찾기 위해 함께 움직인다. 하지만 다툼이 이어진다. 수민이 원했던 것은 이런 게 아니었을 텐데. 참다 못한 진호가 혼자 나선다. 그 날 함께 몸을 숨겼던 장소에서 수민을 찾아낸다. 사실은 오빠의 드론을 잃어버리고 난 뒤에 혼자 찾으러 다녔던 수민이다. 여기에 영화 전체를 지나며 조금씩 엿보이던 수민의 마음이 모두 담긴다. 오빠에 대한 마음과 부모와 가족에 대한 마음. 슬픔와 아픔, 외로움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간절함.

저 멀리에서 아빠와 엄마가 두 사람을 찾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때 진호는 작정이라도 한 듯, 수민을 데리고 사라져 버린다. 카메라는 두 사람이 사라진 자리를 한참이나 비추어보지만, 두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아마도 이날 밤만큼은, 두 아이를 찾기 힘들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보면 우리 만날 때마다 서먹서먹해 지는 거 아냐? 오빠랑 나도.'

영원히 흩어지지 않기 위해서, 이 밤에 흩어질 수 밖에 없는 마음이니까.
영화 흩어진밤 이지형 김솔 문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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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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