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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자가 여행 전 가방에 챙긴 한 가지

[김성호의 씨네만세 306] <시간의 끝에서 널 기다려>

21.02.19 13:49최종업데이트21.02.19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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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끝에서 널 기다려 포스터 ⓒ (주)디스테이션

 

짐싸기 만큼 여행자의 마음가짐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배낭이 됐든 캐리어가 됐든, 한정된 공간에 짐을 담아 다니는 여행자에겐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담을 지가 모두 고민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옷가지와 먹거리, 세면도구부터 비상시를 대비해 상비약을 챙기고, 화장품이며 멋을 내기 위한 액세서리를 담는다. 야영에 쓸모 있는 도구들, 심심함을 달랠 전자기기와 오락용품까지 이것저것 넣고 싶은 게 끝이 없다. 하지만 결국 더 중요한 걸 위해 덜 중요한 걸 덜어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경험 많은 여행가들은 정말 중요한 건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간다고 말한다. 왜 아니겠는가.

이사를 다녀본 경험이 있다면 공감할 것이다.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물건도 몇 년 동안 한 번을 보지 않고 사는 게 인생사다. 이사를 하려고 짐정리를 하다보면 그런 물건이 하나둘이 아니다. 어쩌면 챙겨가도 새 집에선 거들떠보지 않을 물건들, 그런 물건들이 덕지덕지 붙어서 삶을 무겁게 한다.
 

▲ 시간의 끝에서 널 기다려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정말 중요한 건 가방 하나에 들어간다

돌아보면 인생도 여행과 같다. 내 것 같은, 정말 필요해 보이는 물건이 한둘이 아니지만, 돌아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말 필요한 건 몇 개가 채 되지 않는다. 그 물건들이 내가 누구인지, 나는 삶을 어떤 자세로 살고 있는지를 알게끔 한다.

영화를 보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에서도 정말 중요한 건 가방 하나에 다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하고.

시간여행 영화였다. 제 명을 깎아 사랑하는 사람의 비극적 운명을 바꾸는, 그렇고 그런 시간여행 영화였다. 흥미로운 건 극중 주인공이 시간여행을 하게 되면, 새로운 세상에선 자신이 완전히 잊혀 있다는 점이다. 그가 다녔던 학교에 그의 자리는 없고, 단짝 친구들도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옮겨가는 건 몸뚱이와 그때 지닌 소지품 정도인데, 몇 차례 시간여행을 경험한 주인공은 그때마다 가방에 그가 아끼는 물건들을 챙겨 넣곤 한다.
 

▲ 시간의 끝에서 널 기다려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그녀를 살리려면 시간여행을 해야 한다

주인공은 린거(리홍기 분)다. 어렸을 적 함께 놀던 단짝친구 치우첸(이일동 분)을 그는 사랑한다. 멋모르던 어린 시절 치우첸의 이사로 헤어져야 했던 그들은 몇 년 뒤 그녀가 다시 고향으로 전학을 오며 재회하게 된다.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린거와 치우첸은 조금씩 가까워지고 린거의 마음 역시 커져만 간다.

린거가 제 생일을 함께 보낸 뒤 치우첸에게 마음을 고백하려는 찰나, 달려든 차에 받혀 치우첸은 목숨을 잃는다.

린거는 그렇게 첫 번째 시간여행을 한다. 다시 마주한 세상에서 치우첸은 여전히 어여쁜 여고생이다. 그러나 그 학교에 린거의 자리는 없다. 린거는 이미 나이를 먹어 20대 중반, 제 단짝 친구들조차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영화는 린거가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치우첸에게 다가가 마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을 애틋하고 흥미롭게 그린다. 다시 살아난 치우첸과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다가서려는 린거의 모습은 안쓰러우면서도 재미있고 유쾌하면서도 씁쓸한 사건들로 이어진다.

운명을 바꾼 자에게 필연적으로 다시 다가오는 불행 가운데 린거는 재차 시간여행을 하게 된다. 한 번 경험했으니, 이번엔 어떤 물건을 가져갈지를 직접 선택한다. 린거의 선택은 치우첸이다. 그녀와 함께한 추억과 기억들이 린거의 가방에 가득 채워진다.
 

▲ 시간의 끝에서 널 기다려 스틸컷 ⓒ (주)디스테이션

 
당신은 가방에 무얼 담을건가요?

인간이 살며 만나는 정말 중요한 것들은 의외로 소소한 기억일지 모른다. 린거가 저를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만나는 장면은 영화가 가장 집중해 연출한 부분이다. 아버지의 이발관을 찾은 나이든 린거, 그는 고액 지폐를 내밀고 거스름돈 대신 함께 식사를 할 수는 없겠느냐 청한다.

그렇게 함께 자리한 식탁에서 린거와 아버지는 대화를 나눈다. 오래 전 뵈었는데 어째서 아직 변한 게 없느냐는 린거에게 아버지는 가발 때문이라고 답한다. 왜 그 가발을 고집하느냐 묻자, 생전 아내가 좋아했다고 말하는 아버지. 아버지가 린거에게 사탕껍질이 가득 담긴 상자를 하나 보여준다. 아내가 사탕을 좋아해 하나씩 건네주면 비닐을 접어 다시 돌려주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린거는 아버지의 이발소를 떠나며 식탁 위에 곱게 접어둔 사탕껍질을 올려둔다.

영화가 말하고 싶은 건 그런 것이었을지 모른다. 린거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허겁지겁 치우첸과의 추억을 챙기듯, 아버지라면 어머니가 접어둔 사탕껍질을 품에 안을 것이라고. 삶에서 정말 귀한 게 그런 것 아니냐고. 당신이라면 주어진 가방 하나에 무엇을 담겠느냐고.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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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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