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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폭력 목격한 어린 나도 문소리처럼 아팠다

[리뷰] 희숙-미연-미옥의 이야기, 영화 <세자매>

21.02.19 13:42최종업데이트21.02.19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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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영화 <세자매> 스틸 컷 ⓒ 리틀빅픽처스

 
영화 <작은 아씨들>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매애는 낯설었다. 내게 자매란 불화와 같은 말이었기에, 저토록 웅숭깊고 애틋한 것이 자매애라고 말하는 서사에 괴리감을 느꼈다. 서로에 대한 마땅치 않음으로 잦은 다툼이 끊이지 않았던 우리 세 자매는 그렇다면, 결격인 인간들이었던 것일까?

나는 늘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의 자매애는 어떨까? 자매가 있는 이들에게 그들의 자매애를 캐묻기를 일삼았다. 그들의 대답으로 추론하건대, 자매 관계는 좋기도 나쁘기도 했지만 분명한 건, <작은 아씨들>의 것과 같은 자매애는 찾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부모가 나누어준 피의 인연으로 자매가 되어 한 집에서 살아야 하는 일은 어떤 불운한 경우, 초인적인 인내를 발휘하게 한다. 혈연으로 묶였으나 정말 안 맞는 사람들끼리 최소한 이십 년이 넘게 부대끼며 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갑갑한 시간을 보내고 각자의 삶을 살게 되었을 때, 서로에게서 벗어난 해방감으로 삶은 충만해진다.

이도 잠시, 해방되었다고 행복한 삶이 턱하니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 열심히 살아 보지만, 혼자 잘 살아낸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럴 때쯤 나를 성장시킨 것의 아주 작은 부분에 그리도 싸우며 부대꼈던 자매도 한 조각 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감지한다.

미성숙과 과오로 점철된 묵은 가족 관계를 성찰하는 일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기억을 찾아가는 경로는 지난한데, 때론 의도적으로 왜곡하거나 지운 기억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를 회복할 양 서로의 아픈 기억 찾기를 시도했다 오히려 더 큰 낭패를 겪기도 한다. 생채기를 낸 사건에 대한 기억은 각자 살아남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각색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로 서로의 기억을 확인해본 적이 있다면, 기억의 자의성이 지닌 불합리함에 한 번쯤 크게 당황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폭력의 방관자도 피해자가 된다
 

영화 <세자매> 스틸 컷 ⓒ 리틀빅픽처스

 
영화 <세자매>의 세 자매는 각자 자신들이 겪었던 부정의한 폭력의 경험을 '이것이다'라고 규명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두렵기도 했을 것이고, 상처를 규명하기 위해 상대해야 하는 대상이 너무 거대할 때, 약자는 그 상황에 압도 당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나쁜 가정폭력을 당하고 있어'라고 단호히 말해주고 보호해 주지 않는 사회 시스템 속에서 자매들은 각자의 상처를 스스로 싸매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싸맨다고 해서 그 상처가 저절로 낫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곪아 터지고서야 깨닫게 된다.

큰언니 희숙(김선영)이 죽을 만큼 맞던 그날, 둘째 미연(문소리)은 맨발로 탈출해 동네 주민들에게 "신고해 주시면 안 돼요?"라고 호소하지만, 동네 어른들은 오히려 아버지를 신고하려 드는 막돼먹은 딸년이라고 나무란다. 그때 용기를 낸 미연에게 단 한 사람의 어른이라도 응답해 주었더라면, 자매들이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된 것 같은 죄책감과 피해자이면서도 자신이 뭔가 잘못해서 맞았다고 오해하며 평생 찌그러진 자아를 끌어안고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가정폭력의 피해자이자 방관자인 세 자매는 결코 편안한 사이가 될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서로에게 가진 부채감은 가식적인 관계를 낳았고, 서로 속마음을 숨긴 채 따지고 보면 남만도 못한 관계를 이어 왔다. 폭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세 자매는 폭군의 주먹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위장된 규범인 복종을 내면화했다. 폭군 앞에서는 어린 딸들의 보호자인 엄마조차도 무릎 꿇었다. 힘의 약자로 오랜 시간 살아야 했고 굴종이 생존의 방식이 되었다면, 엄마라도 폭력에 저항할 수 없다. 어떻게 엄마가 딸들이 당하는 폭력을 방관할 수 있느냐고 혀를 차겠지만, 약자로 살아온 관성은 그리 쉽게 벗어버릴 수 있는 외투와 같은 것이 아니다.
 
영화 <벌새>에서 엄마는 주인공 은희(박지후)가 오빠에게 맞았다고 호소하지만 모른 체한다. 영화 <결백>에서 엄마는 정인(신혜선)이 아버지에게 맞는 것을 방관한다. 그렇다면 이런 불의함은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재현되는 일일까? 슬프지만 그렇지 않다. 현실의 적지 않은 엄마들은 가부장의 폭력에서 딸들을 구해주지 못한다. 나의 엄마 역시 그랬다. 엄마의 무력함과 방관은 두고두고 딸들의 가슴을 쓰리게 한다. 시간이 많이 흐른 어느 날, 어린 나 역시 폭력의 방관자였다는 아픈 진실에 진저리 치게 되는데, 이렇게 사라지지 않고 불쑥 쳐들어와 삶을 분탕질하는 것이 폭력의 실체다.
 
알코올 중독인 셋째 미옥(장윤주)은 사라지지 않는 다섯 살 그날의 기억을 미연에게 묻는다. 한방 중 맨발로 집을 빠져나갔던 그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매 맞는 언니를 구하기 위해 맨발로 뛰쳐나가 동네 사람들에게 알렸던 그날, 어른들은 아버지의 폭력은 자식의 잘못을 교정할 권리라고 두 아이를 혼냈다. 혼쭐이 나고 돌아와 목도한 것은 죽지 않을 만큼 맞고 온몸에 구렁이 감긴 듯 피멍이 들어 있는 언니의 몸과 이제 겨우 폭력에서 놓여나 한숨을 토해내고 있는 초점 잃은 언니의 슬픈 눈이었다. 아버지의 폭력에 분노하기 앞서, 저렇게 맞은 사람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에 먼저 안도했던 자신을 미연은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없었던 일로 지우려 했지만 기억은 봉인되지 않는다. 방아쇠만 당기면 튀어나가는 총알처럼 미연의 기억은 작은 빌미에도 되살아났다.

"어른들이 왜 사과를 못하는데" 
 

영화 <세자매> 스틸 컷 ⓒ 리틀빅픽처스


지금은 번듯한 집사가 되어 하나님의 선한 시종인 것처럼 행세하는 아버지를 가족들은 모두 용서한 줄 알았다. 하지만 용서란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가 자신의 죄를 빌고 용서를 구하지 않는 한, 피해자도 가해자도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비겁한 가해자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대신 하나님에게 도피했고, 그의 하나님은 피해자의 승낙 없이 가해자의 죄를 사했다. 이 불의한 용서는 영화 <밀양>의 한 장면을 강렬히 소환한다.
 
자식을 죽인 가해자를 용서하려 찾아간 교도소에서 신애(전도연)는 하나님에게 귀의해 마음의 안식을 얻었다는 가해자의 초월에 내면이 붕괴된다. 가해자는 신애에게 마치 초월자처럼 자신의 죄를 이미 하나님에게 용서받았다고 선언한다. 자신의 손으로 아이를 죽인 살인자가 그 아이의 엄마에게 자신처럼 하나님에게 귀의해 마음의 평안을 얻으라고 전도까지 하고 나선다. 이보다 더한 몰염치가 있을 수 있을까? 피해자가 사하지 않은 용서를 하나님이 해줬다고 넙죽 받아먹는 적반하장은 피해자의 피해를 더욱 곤경으로 몰아넣는다. 결국 피해자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신이라면 이래도 살겠어요?"
 
미연의 아버지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단 한 번도 무시무시하게 휘두른 폭력에 피폭된 가족들의 마음을 애달파한 적도 용서를 구한 적도 없다. 대신 그는 양심을 팔아 하나님의 면죄부를 사들였다. 신실한 신자가 되었고 자신의 죄를 하나님에게로 귀의한 걸로 퉁쳤다. 하지만 그렇다고 죄가 연기처럼 사라질 수 있는 것인가. 가해자의 폭력을 기억하는 뼈아픈 증인들이 그 기억을 잊지 못하는 한, 이들 피해자들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구하고 죽는 날까지 용서의 고통에 공감하지 않는 한, 하나님의 사면권을 내보인다 해서 용서받을 면허를 얻는 것은 아니다. 희숙의 딸 보미(김가희)가 울부짖으며 한 "어른들이 왜 사과를 못하는데"라는 포효는 몰염치한 가해자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극단의 폭력을 당하고도 사과를 요구하지 못하는 희숙의 피해자성은 마음의 식민지를 구축한다. 자신이 뭘 잘못해서 맞았다고 믿기에, 어떻게 하면 가해자들이 자신을 싫어하지 않게 할까 전전긍긍한다. 사과를 요구하지 못하는 식민지인이 어떻게 자신과의 화해에 나설 수 있겠는가. 아버지가 세운 식민지에서 아직도 점령자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2등 국민이 어떻게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가겠는가. 내면의 식민지에 갇힌 희숙은 건강이 악화된 상태에서도 안절부절 못하며 독재자와 조력자의 눈치를 살핀다. 자신이 아프니 가해자가 자신을 더 싫어하게 될까 봐 두렵다. 
 
그날의 사건을 직면한 미연은 마을의 어른들이 아버지의 폭력을 승인한 그날, 부끄럽게 자신마저 아버지의 폭력을 승인했음을 뉘우친다. 내가 맞지 않기 위해 언니가 당하는 폭력을 모른체했고, 이로 인해 점점 커지는 수치심과 부채감으로 자매애가 왜곡되었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래서 이제 아버지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아홉 살 어린 나이에 감히 대항하지 못했던 자신의 나약함을 토닥인 미연은 그날의 트라우마를 용기 있게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폭력을 휘둘러도 꼼짝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어린 딸은 사라지고 없었다.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그들은 강력한 여성으로 자라서 당신의 세계를 박살 내려 돌아온다."
(미성년자를 포함해 300여명의 선수를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른 미국의 체조대표팀 주치의 래리 나사르의 재판 당시 생존자인 카일 스티븐스가 한 법정 증언 중-편집자 말)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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