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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수성못을 떠날 수 있을까

[리뷰] 영화 <수성못>(2017)

21.02.12 06:57최종업데이트21.02.12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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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수성못 포스터 ⓒ 인디스토리

   
수성못은 고여 있는 물이다. 아무 흐름도 없는 고여 있는 시간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희정도 영목도 아닌 수성못 그 자체이다. 도시 안에 갇힌 물처럼 삶의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하고 현재에 갇혀버린 인물들이 그 위를 오리배처럼 떠다니고 있다.
 
오리배 대여소에서 월급 팔십만 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하는 희정은 서울 소재의 대학에 편입하고 싶다는 강력한 목표가 있다. 모호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그 목표는 얼핏 보면 굉장히 합리적이고 현실적으로 보인다. 슈퍼스타가 되겠다거나 백만장자가 되겠다는 꿈처럼 허황되지도 않다.

그런데 영화의 말미에 희정은 보란 듯이 낙방한다. 알바를 하면서도 걸어다니면서도 버스 안에서도 자기 직전까지 침대에서도 영어 단어를 달달 암기했는데 그녀는 실패했다. 그녀는 게으름을 피우지도 않았고 충분히 간절하고 절박했다. 과정에 부족함이 없던 그녀가 맞이한 결과는 너무도 비합리적이다. 그리고 결말에서 암시한 그녀의 미래는 절망 그 자체이다. 어쩌다 그녀는 수성못에 갇혀버린 것일까?

이 영화는 끝까지 다 보고 나서야 첫 신을 이해할 수 있다. 퍼커시브가 들어간 경쾌한 기타곡이 물속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하더니 카메라가 점점 위로 올라오고 수면 밖으로 나온 순간 음악이 멈추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이런 카메라의 시선은 마치 먹잇감을 사냥하러 밖을 살피는 바다생물을 연상케 한다.

실제로 물 밖에는 오리 배들이 유유자적 떠다니고 있다. 왜 기타 연주가 물 안에서 물 밖으로 나왔는지, 오리배들이 사냥감처럼 묘사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은 서사가 진행되면서 자연스럽게 밝혀진다. 그것은 또 다른 자살할 사람을 찾으러 나온 수성못 귀신의 시선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희정은 영화 초반에 나왔던 기타곡을 연주하는 남자를 보게 된다. 이 서늘한 결말은 지금 이 순간에도 좌절의 끝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희정의 욕망을 한 번 되짚어보자. 희정은 왜 대구를 벗어나고 싶어 했을까? 지하철역에서 우연히 만난 고등학교 동창은 그녀를 보자마자 다음 달에 서울에 갈 것이라고 자랑을 하며 자연스럽게 그녀의 근황을 묻는다. 희정은 내년에 본인도 서울에 갈 것이라고 받아친다. 희정에게 대구는 '아무것도 없'는 도시였다.

서울에 가야만 뭔가를 보고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도권이 아닌 곳에서 태어난 수많은 젊은이들이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서울 이외의 곳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왜 20대 청년들의 목표가 지금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되어야 하는가? 빈부 격차가 커지고 계층이 고착화 되고 있는 사회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부와 권력이 중심부에만 머물고 주변에 퍼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순환이 되지 않는 수성못처럼 변하지 않고 고여 있다.

젊은이들에게 현재란 즐기는 존재가 아니라 탈출해야만 하는 지옥이다. 현재는 늘 우울하고 답답하다. 바꿀 수 없는 현실의 벽 앞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은 높은 창살 너머로 보이는 먼 하늘을 동경한다. 동시에 스스로를 무능한 죄인으로 단정 짓는다. 수감자의 생활을 끝내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란? 바로 영어 단어를 달달 외우는 것이다.

공무원 시험을 위해서든 편입을 위해서든 유학을 위해서든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서든 일단 영어 단어를 외워야 한다. 영화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희정이 수첩에 적힌 영단어를 중얼거리며 외우는 모습은, 현재 20대들을 대표하는 가장 단적인 모습이다. 그렇게 해서 한 번에 시험이라는 시험에 붙으면 다행이지만 만약 떨어지면? 도리가 없다. 내년 시험을 준비해야 한다. 만약 그럴 힘이 남아 있다면 말이다.
   

▲ 스틸컷 스틸컷 ⓒ 인디스토리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던 희정에게 어느 날 불운이 찾아온다. 그녀가 깜빡 조는 사이 한 남자가 오리배를 훔쳐 호수 가운데까지 가서는 투신하고 만다. 관리소장이 구명조끼를 줬냐는 질문에 희정은 얼떨결에 "당연하죠" 라고 대답한다. 뉴스에서는 이 사고를 보도하며 대구시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가장 높다고 소개한다. 흘러가듯 지나가는 이 앵커의 한 마디는 보는 사람에게 은근한 긴장감을 선사한다.

자살률을 한 번 살인률로 바꿔보자. 그 순간 평범하기 그지없던 도시는 커다란 범죄 현장이 되고 별 의심 없이 보았던 인물들이 용의자 또는 잠재적 피해자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관객들은 아슬아슬한 심정을 유지하며 영화에 몰입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살인범과 피해자가 일치하기에 살인범을 향한 분노와 공포 대신 희생자를 향한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이 배가 되는 게 다를 뿐이다.

희정은 이리저리 고민한 끝에, 으슥한 밤 남몰래 호수를 찾아 구명조끼를 버린다. 그러나 박 씨가 투신한 곳을 살피던 영목에게 현장을 들키고 신고하지 않는 대가로 그의 일을 돕게 된다. 영목이 하는 일은 자살예방센터에서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자들을 만나 인터뷰 하는 것이었다. 영목은 희정에게 '세상에 자기 얘기 들어줄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사람은 안 죽'는다고 말한다.

이 대사는 영화가 전개될수록 사실로 증명된다. 영목과 대화를 나눈 박씨는 자살을 포기하지만 영목과 마지막 통화를 하지 못한 미루는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자살 클럽을 운영하는 영목이 사실상 동반 자살을 실패로 이끌면서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이 영화의 큰 매력이다. 대화와 공감, 이 뻔한 수법이 사람의 결심을 바꿀 수 있는 건 사람 사이 흐름을 만들기 때문이다. 고립되고 소외된 누구나 모두 고인 물이다. 고이고 고이다 못해 썩으려 하는 물도 있다. 하지만 물과 물 사이 흐름을 만들어주면 그 물은 생명을 얻는다.

희정은 영목이 시킨 대로 인터뷰 내용을 녹취하면서 자살 시도자들을 못마땅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녀에겐 자살 시도자들이 '비겁'하고 '노력이란 건 해본 적도 없'고 '말만 많'은 자들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동시에 그녀는 집에서 책만 읽는 남동생 희준 또한 한심하게 바라본다. 그녀는 희준을 볼 때마다 운동 좀 하라든지, 사람 좀 만나라든지, 돈 좀 벌라든지 하는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그리고 빵집 알바 공고를 멋대로 그의 방에 붙여 놓는다. 그녀는 심지어 영목과도 제대로 된 소통을 하지 못한다. 영목이 여자친구와 동반 자살을 하려다 실패한 경험을 말하는데도 진지하게 듣지 않고 비아냥거린다.

실패하기 전 희정은 아주 단순한 공식을 믿는 사람이었다. 노력하는 사람은 목표를 이룰 수 있다. 그러니 그녀의 입장에서 목표가 없거나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나약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치열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냉소와 비하, 이건 우리 사회에서 은연중에 통용되는 시선이기도 하다. 그러나 못 가장자리에 다다라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내가 있는 곳이 바다가 아닌 못이라는 것을 알아버린 이상 허망함과 무기력에 사로잡혀 나아가려는 의지를 상실할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그리고 고여 있는 못 위에 떠다니는 것조차 지겨워질 때쯤엔 스스로 물에 잠겨 이 못을 떠나는 것이 유일한 방법임을.

   

▲ 스틸컷 스틸컷 ⓒ 인디스토리


영목은 희정과는 다른 의미의 실패자이다. 죽는 것에서조차 실패하는 영목의 모습은, 그가 살아서 다행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내용과 상관없이 그에게 실패가 얼마나 체화되었는지 보여주어서 안쓰러운 실소를 유발한다. 희정이 삶의 실패로 죽음의 문턱에 서는 것과 반대로 영목은 죽음의 실패로 삶을 이어간다.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삶과 죽음처럼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리하여 얼핏 정반대의 존재로 보이던 그들은 어느 순간 서로의 위치에 서 있게 된다. 그들의 위치가 바뀌는 원동력은 물론 실패다.

실패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공은 그 자체로 완성된 결말이지만 실패는 과정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이동하고 변화한다. 지금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건 백발백중의 성공이 아니다. 아흔아홉 번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희망을 줄 수 있는 작고 소중한 단 한 번의 성공이다. 크든 작든 성취의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번번이 자신의 의지와 반하는 결과를 맞닥뜨리게 되면 어느 순간 삶은 정지한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 질문에 다다르게 된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희정이 영목에게 살면서 내가 맘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뭐냐고 물었을 때 영목이 침묵으로 갈음한 답도 이것이었다. 희정은 그의 침묵에서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 채고 낮게 욕을 지껄인다.

희정은 말한다. 내가 뭘 좀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집이든 직장이든 자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고. 자신의 인생에 선택권이 없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의 가장 큰 비극이다. 10대부터 20대 혹은 30대까지 젊은이들은 끊임없이 시험을 반복하며 기득권이 원하는 성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채워나가야 한다. 얼핏 합리적으로 보이는 시험이라는 제도는 실상을 들여다보면 굉장히 강압적이다.

시험 이외의 대안이 없다는 점에서 시험이 갖는 권위는 어마어마하다. 수험생들은 자신만의 답을 고르러 수험장에 들어가지 않는다.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정체를 숨긴 정답을 귀신처럼 찍어내야만 한다. 오지선다 중 어떤 번호를 고를지는 수험생의 자유지만 선택당하는 입장은 언제나 수험생이다. 실패에서 배운다는 격언은 꿈같은 얘기다. 타인이 정해놓은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청년들은 세상을 부정하다 결국 자신을 부정하고 무너지고 좌절하고 자살을 고민한다. 잘못된 건 세상인데, 왜 망하는 건 세상이 아니라 사람이어야 하는가?

살아야겠다는 희망이 사라지는 순간은 언제일까? 바로 현실이 변하지 않을 때다. 어제와 오늘이 아무 차이도 없을 때, 작년과 올해를 비교해도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을 때 절망은 찾아온다. 영화는 순간순간 우리에게 이 사실을 주지시킨다. 희정은 동창생을 만나서 "넌 하나도 안 변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표정이 굳고, 영목은 지적장애인 친구를 두고 "과연 쟤가 경찰공무원이 되는 날이 올까요. 난 안 올 것 같은데"라고 말한다. 미루는 "아무것도 안 바뀔 것 같아. 그래서 난 더이상 이런 병신 짓 안 하려"라는 유언을 남긴다. 반면 희준은 버스정류장에서 도를 믿는 여자를 귀찮게 물리치다가 함께 기를 모으면 삶이 움직인다는 소리를 듣고 그녀의 말을 되뇌며 피식 웃는다.

지금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은 그들이 멍청하고 나태하기 때문이 아니다. 실패로 점철된 시간을 지나오면서 목표라는 것이 또 다른 패배감을 안겨줄 허상으로 전락해버린 탓이다. 목표를 세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 그들에겐 삶의 희망을 내일까지 지켜나가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다. 인터넷에 신입사원 TO과 달리 '동반' 모집 TO가 늘 여유로운 것만 봐도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수성못이 존재하는가를 알 수 있다.

어쩌다 그들은 고립된 물이 되어버렸을까. 앞서 말했듯이 물꼬만 트이면 못은 얼마든지 흐를 수 있다. 영목은 관리소장에게 해고 통보를 받은 희정을 고깃집으로 데려간다. 그리고 '음식 중에서 유일하게 혼자 못 먹는' 것이 바로 고기라고 말한다. 그렇다. 혼자 못하면 둘이 하면 된다. 그것을 두고 사회는 늘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무능이라고 단정 지었다. 경쟁을 부추겼지 협동을 권장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무수히 많은 못이 생겨났다. 하지만 우리는 유념해야 한다. 누군가 공부든 일이든 못하는 것이 정말 그 사람이 못나서가 아니라 단지 함께 할 일을 혼자 해서 그럴 수 있다는 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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