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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전박대까지...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진짜 현실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2 드라마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

21.01.18 11:09최종업데이트21.01.18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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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 월화드라마 <암행어사 : 조선비밀수사단>의 한 장면 ⓒ KBS2

 
KBS 사극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의 어사 성이겸(김명수 분)은 현지인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한다. "잘생긴 게 죄라면 난 사형감"이라고 말할 정도의 자신감을 품고 사는 그는 꽤 활발하게 임지를 돌아다닌다.
 
실제의 암행어사들은 성이겸과 달리 거리를 다닐 때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선비처럼 생긴 낯선 이방인을 암행어사로 의심하고 관아에 귀띔해주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관료 겸 화가인 장한종의 <어수신화>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졸음을 막는 새로운 이야기'라는 의미의 <어수신화>에 거만한 지방 사또가 등장한다. 별로 하는 일도 없이 거드름만 피워서 아전들의 뒷담화 대상이 된 그에게는 사람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습관이 하나 있었다. 뒤통수에 대고 부채질을 하는 습성이 그것이었다.
 
하루는 젊은 아전 하나가 동료들에게 내기를 걸었다. 사또를 깜짝 놀라게 해서 사또의 부채가 순식간에 뒤통수에서 턱 밑으로 가게 만들면 당신들이 한 턱을 내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술과 안주를 갖춰 사례하지"라는 약속을 받은 젊은 아전은 기는 걸음으로 동헌 대청마루에 올라 사또 앞에 엎드렸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사또에게 젊은 아전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좀 아까 찌그러진 갓에 다 떨어진 도포를 입은 나그네가 작청(作廳, 사무소)에 와서 구걸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매우 이상했습니다. 또 지금은 행색이 확실히 경인(京人, 서울 사람) 같아 보이는 여러 사람이 역마와 보종(步從, 역졸)을 거느린 채, 뭔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오리정(五里程) 근처에서 어정대고 있습니다. 소인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매우 수상합니다. 그래서 감히 이렇게 몰래 여쭙는 것입니다."
 
좀전에는 폐포파립(弊袍破笠) 차림의 나그네가 관아에 들어왔다가 나갔으며, 지금은 역마와 역졸들이 관아에서 5리 떨어진 귀빈 응접소인 오리정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뒤통수에 부채질을 해대던 사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암행어사의 이미지였다. 암행어사가 관아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장면, 그런 뒤 역졸들을 거느리고 어사출도(出道)를 준비하는 장면이 떠올랐을 수도 있다.
 
깜짝 놀라 얼굴이 잿빛이 된 사또는 부채를 든 손을 뒤통수가 아닌 턱 밑에 갖다 대면서 "이것은 필시 암행어사다"라며 왜 이제야 보고를 하는 거냐고 하면서 당장 나가 염탐해보라고 지시했다.
 
안절부절못하는 사또를 뒤로 한 채 대청마루에서 내려온 아전은 "내 솜씨가 어떠냐?"며 으쓱해 했고, 동료들은 "대단하다!"고 감탄했다. 행색이 한양 사람 같고 갓이 찌그러지고 도포가 헤어진 선비를 보면 '혹시 암행어사가 아닐까?' 의심하던 당시의 관념을 이용해 젊은 아전이 사또를 속이고 동료들에게 술을 얻어먹은 이야기다.
 
한양 말씨와 하얀 피부

'행색이 한양 사람 같다'는 판단을 들게 하는 것 중에는 한양 말씨도 있지만 하얀 피부도 있었다.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조선시대 사람들도 뽀얀 피부를 선호했다는 점은 효종 임금 때인 1653년 조선에 표착해 13년간 생활하다가 탈출한 핸드릭 하멜의 수기에서도 나타난다.
 
<하멜 표류기>에서 그는 "고위층 사람들이 매우 놀라고, 우리가 자기들보다 더 나아 보인다고 생각하는 점은 우리 피부가 희다는 점이었는데, 그들은 하얀 피부를 몹시 선호했다"며 "한마디로 처음에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골목길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심지어 집에서조차 구경꾼들 때문에 편히 쉬질 못했다"고 토로했다.
 
보통 서른 중후반에 과거에 급제하고 몇 년간 공직에 근무한 뒤 암행어사로 파견됐으므로, 드라마 <암행어사>의 성이겸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40대 어사들이 조선시대 사람들한테는 익숙했다. 반평생을 책만 봤기 때문에 눈동자가 남보다 빛나고 피부도 남보다 하얀 반면, 도포는 헤지고 갓은 떨어진 40대 선비가 그 시대 사람들이 떠올리는 전형적인 암행어사였다.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경계의 대상이 됐는지는 이들의 성문 통과가 용이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드라마 속의 성이겸은 성문을 통과할 때 별다른 고충을 겪지 않지만, 실제 어사들은 성문을 통과해 읍내로 들어가는 일부터가 용이하지 않았다. '어사처럼 생기면 입장 금지' 같은 규칙은 없었지만, 성문 경비병들이 어사 스타일의 얼굴을 신속히 알아보고 출입을 막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경비병에 문전박대 당한 암행어사
 

김해읍성 북문. ⓒ 김종성

  
성종 임금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한 1495년에 출생한 권예는 21세 때인 1516년에 1단계 과거시험인 소과에 급제하고 같은 해에 2단계인 대과에까지 급제한 보기 드문 수재였다. 그는 그로부터 13년 뒤인 1529년, 34세 나이로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됐다. 평균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어사가 됐던 것이다.
 
중종 임금 때인 이 당시, 그의 관직은 정3품인 홍문관 직제학이었다. 오늘날로 치면 차관보다 약간 낮지만, 엘리트 코스인 홍문관 관원이었으므로 실제 위상은 그보다 높았다. 과거에도 일찍 급제하고 고위직이 된 상태에서 강원도로 파견된 그는 이런 배경에 전혀 어울리지 않은 푸대접을 현지에서 받았다. 지금의 경북 울진군 평해읍에서 경비병들한테 문전박대를 당했던 것이다.
 
음력으로 중종 24년 11월 8일자(양력 1529년 12월 8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권예가 그곳 읍성에 도착한 시각은 성문이 열려 있어야 할 때인데도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경비병들이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고 한 것을 보면, 권예가 문을 열어달라고 요청하는데도 그들이 외면했던 모양이다.
 
권예는 13일 전인 음력 10월 26일(양력 11월 26일) 암행어사에 임명됐다. 이 날짜 <중종실록>에 따르면, 권예뿐 아니라 7명의 다른 관료들도 암행어사로 함께 파견됐다. 이들 여덟 명이 동시에 임명돼 팔도로 흩어졌기 때문에 '암행어사들이 떴다'는 첩보가 곳곳에 퍼졌을 가능성이 높다. 어사 파견에 관한 첩보를 지방에 전달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전국 팔도로 암행어사가 파견될 경우에는 정보가 널리 퍼지기 쉬웠다.
 
권예가 평해읍성에서 당한 일은 그것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그곳 경비경들은 암행어사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는 시간 동안에 아예 성문을 걸어뒀다. 인근 고을들과 정보를 교환할 경우에는 '어사가 어디쯤 왔는지'를 예측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런 상태에서 어사처럼 보이는 선비가 문을 열러달라고 요청하자 거부 반응으로 일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계의 대상이 되었던 암행어사
 

KBS2 월화드라마 <암행어사 : 조선비밀수사단>의 한 장면 ⓒ KBS2

 
권예는 이때 당한 문전박대를 중종에게 따로 보고했다. 양력 12월 8일 날씨에 경비병들한테 문전박대를 당하면서 그가 꽤 많은 생각들을 했으리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권예는 어사처럼 생겨서 성문 입장이 금지된 경우로 볼 수 있는 반면, 5년 뒤인 1534년에 파견된 오세우의 경우에는 약간 다른 이유로 성문 입장이 금지됐을 수도 있다. 권예의 경우에는 도착 당시 성문이 닫혀 있었던 반면, 오세우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종 29년 5월 14일자(1534년 6월 25일자) <중종실록>에 따르면, 오세우가 경상도 옥포읍성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성문은 분명히 열려 있었다. 성문이 열려 있을 시각에 맞춰 갔을 것이기 때문에, 열려 있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잠시 뒤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다. 성문을 지키던 병사가 오세우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곧바로 문을 닫아버리는 것이었다. 어사처럼 생겨서 문을 닫았을 수도 있지만, '그 어사다!'라는 판단이 들어서 그랬을 수도 있었다. 오세우의 인상착의가 옥포에 이미 전달됐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위 실록에 따르면 오세우는 성문을 열기 위해 갖가지 방법으로 경비병들을 타일러보았다. 하지만 경비병들은 상부의 지시를 '충실히' 따를 뿐이었다. 그런 뒤, 한참 뒤에 문이 열렸다. 관아에서 이것저것 준비해놓은 다음에 '문을 열어주라'는 지시가 떨어진 모양이다.
 
어사처럼 생기면 이 정도로 경계의 대상이 됐기 때문에, 어사들은 길을 다닐 때도 조심해야 했다. 드라마 속의 성이겸처럼 당당하게 활보했다가는 사전에 신원이 노출돼, 관아는커녕 읍성에도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읍성 성문을 통과하지 못한 어사는 1525년의 황해도 암행어사 조종경처럼 성문을 부술 용기가 없다면 그냥 다음 읍성으로 발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속의 성이겸은 "잘생긴 게 죄라면 나는 사형감"이라고 말했다. 암행어사처럼 생긴 것도 과장을 보태서 말하면 임지에서는 '사형감'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암행어사는 항상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신분이 드러나지 않게 움직여야 했다. 마패나 신분증명서를 꺼내기도 전에 신분이 노출돼 성문 밖을 서성이다가 객지에서 허송세월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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