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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감금해달라"... 마약중독자 재활원의 끔찍한 현실

[리뷰] 넷플릭스 <산 파트리냐노: 구원자의 죄>

21.01.14 16:19최종업데이트21.01.14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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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사슬에 날 묶어 감금해달라" 요청하는 (혹은 요청했던) 사람들이 대거 등장하는 다큐멘터리가 있다. 제목은 <산 파트리냐노>. '산 파트리냐노'는 이탈리아의 한 지역명이자 2021년 현재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 기관명으로서 'g' 때문에 '냐'라는 좀 어려운 발음이 들어가게 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재활원 '산 파트리냐노'와 그 창립자 빈센초 무촐리(Vincenzo Muccioli)의 사연을 그린 작품이다. 전체 5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상영시간은 60분 안팎이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산 파트리냐노'는 마약중독자들을 위한 재활원으로 출범했다. 1970년대 말과 1980년대 초반 이탈리아에 마약중독자들이 들끓었던 때에 민간에서 설립한 재활원들 중 가장 유명했다. 설립자 무촐리는 마약중독자들의 아버지를 자처했으며, 전액 무료로 재활원을 운영했다. 그리고 설립 이후 한참 동안 무촐리의 가족들도 재활원 안에서 동고동락했다.

마약중독자들은 억지로라도 붙들어 앉혀놓지 않으면 어떤 사고를 칠지, 아니면 어떤 사고를 당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마약중독자들은 재활원에 들어온 즉시 누구나 금단증세에 시달린다. 가족의 의뢰로 들어왔든 자진해서 들어왔든 예외가 없다. 금단증세가 너무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밖으로 내보내달라고 몸부림치게 된다. 재활원의 허가를 받지 못하면 도주, 탈출을 불사한다. 갖은 방법을 써서 재활원 밖으로 나가면 이내 마약에 도로 빠져든다. 금단증세는 무척 강하다.

그런 이들에게 '산 파트리냐노' 재활원은 특단의 통제비법(?)을 사용했다. 폭력이었다. 쇠사슬로 마약중독자들을 꽁꽁 묶어, 아주 좁은 공간에 며칠 동안이나 감금했다. 탈출의지를 접을 때까지···.
 

영화 <산 파트리냐노> 포스터. 앉아있는 사람 발목에 쇠사슬이 채워져있는 게 보인다. 중앙에 서있는 사람이 무촐리. ⓒ 넷플릭스

 
그런데 마약중독자들은 재활원에서 사는 동안 '아버지 같은' 무촐리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손을 맞잡을 때마다 그에게서 사랑과 관심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마약중독자들은 무촐리가 환히 웃어도 사랑을 느꼈고, 그가 엄히 꾸짖어도 사랑을 느꼈다. 나아가 무촐리의 강압과 억압과 폭력을 중독치료의 필수적 단계로 여겼다.

사실 무촐리는 마약중독자들을 사랑했다. 사재를 털어 재활원을 세울 때부터 그는 소외된 마약중독자들을 사랑으로 돌보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갖고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깊은 관심을 기울였고 유심히 관찰했다. 그들을 사랑했다. 하지만 무촐리의 사랑은 오냐오냐, 받아주는 사랑이 아니었다. 그의 사랑은 원칙적이었고, 금욕적이었으며, 매우 엄격했다. 

무촐리의 깊은 의도를 이해하는 마약중독자들 자신과 그 가족들의 지지에 힘입어 재활원은 나날이 성장해나갔다. 재활원 내부의 폭력이 세상에 알려졌지만 재판 끝에 무죄 판결을 받았고, 재활원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어떤 판사들은 골칫거리 마약범죄자들에게 '산 파트리냐노 입소'를 처벌사항으로 선고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백여 명 안팎의 인원으로 시작한 재활원엔 어느덧 천 명도 넘는 마약중독자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 무촐리는 재활원의 유명세를 감당하는 과정에서 이전보다 훨씬 바빠졌다. 그러자 무촐리는 마약중독자들과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주는 시간을 줄였다. 마약중독의 위험성 및 재활원 홍보에 더 열중했다. 이제 재활원의 실질적 운영은 중간관리자들에게로 넘어갔다.

중간관리자들은 무촐리가 품은 사랑과 양육의 정신은 대행하지 않은 채, 무촐리가 시행한 통제와 폭력의 방법을 대행하였다. 그들에겐 무촐리의 사명감이나 아버지 같은 권위가 없었으며, 관리의 책임과 권한만 있었다. 결국 사달이 일어나고야 만다. 재활원 안에 자살과 살인이 나타나게 되었다.

인간사회에서는 때로 '신호등의 빨간불' 같은 제재조치나 통제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사람들의 서로 다른 욕구와 자유가 산지사방으로 폭주하는 것에 대해서 일정하게 규칙을 정해 통제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요즘 '코로나 19' 팬데믹 상황에서 자유를 억압하는 강력한 봉쇄조치가 오히려 인간의 안전을 보장해주듯, 타율적 통제가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면, 이른바 신호등의 빨간불이 내포하는 억압의 강도,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통제적 폭력은 어느 정도까지 용인될 수 있을까? 어느 정도까지 용인되는 게 바람직할까? 

설립 초반 '산 파트리냐노'에서 마약중독자들이 경험한 무촐리의 폭력은 마치 신호등의 빨간불 같은 것이었다고 볼 만한 여지가 충분히 있다. 무촐리가 사용한 쇠사슬과 감금은 명백히 폭력이었지만, 치료의 일환으로 일정 기간 개인적 자유의 통제가 필요했던 마약중독자들에게 유익한 규제조치이기도 했다. 그들에게 무촐리의 쇠사슬과 감금은 중독의 극복과 갱생의 시작을 알리는 빨간 신호였다.

아닌 게 아니라 '산 파트리냐노'에 입소한 마약중독자들은 무촐리의 폭력에 대해서는 허용하고 이해했다. 쇠사슬에 꽁꽁 묶여도, 벌레 많고 냄새나는 동물우리에 갇혀도, 사람 몸 크기의 와인통에 감금되어도 마약중독자들은 그 같은 무촐리의 통제적 폭력을 흔쾌히 '사랑'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였다. 실제로 무촐리의 의도가 사랑이었고, 그 사랑의 의도가 마약중독자들에게 잘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반면, 마약중독자들은 무촐리가 임명한 중간관리자들의 통제적 폭력에 대해서는 극렬히 반항했다. 마약중독자들은 '통제하는 양육자 무촐리'는 수용했지만, 통제하는 관리자는 거부했다.

통제하는 양육자와 통제하는 관리자의 차이는 무엇일까? 다큐멘터리 <산 파트리냐노>는, 재활원의 설립자 무촐리가 한동안 주된 통제 방법으로 사용했던 폭력에 대한 마약중독자들의 태도와 반응을 섬세하게 보여주면서, 통제적 양육과 통제적 관리의 차이를 차근차근 보여준다. 타인을 다루는 방식이 아니라, 타인을 만나는 의도에서 그 둘 사이에 급진적 차이가 발견된다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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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nah Arendt의 행위이론과 시민 정치(커뮤니케이션북스, 2020)] 출간작가 | ‘문학공간’ 등단 에세이스트 | ‘기억과 치유의 글쓰기(Writing Memories for Healing)’ 강사 | She calls herself as a ‘public intellectual(지식소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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