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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길 때까지 덤비려 한다, '삼토반' 고아성처럼

[2020년 날 위로한 단 하나의 OO]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20.12.31 19:50최종업데이트20.12.31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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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데, 벌써 12월 말이라니...'라는 말이 무심결에 튀어 나오는 요즘입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신음한 2020년이지만, 그럼에도 누구에게나 위로를 받았던 순간이 있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특히 외출이 어려운 상황이라 영화나 드라마, 노래 등 대중문화들이 많은 힘을 줬을 듯한데요. '2020 날 위로한 단 하나의 OO'에선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 순간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결말을 알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정말로, 졸업 전까지 전부 낙선할 줄은 몰랐다. 한 편의 소설도 당선되지 못한 채 내 문예창작과 생활은 끝났다. 수도 없이 떨어졌지만 '넌 아직 부족해'라는 메시지는 언제 받아도 기가 죽는다. 결과에 승복할 수 없었고 속이 아플 정도로 울화가 치밀었다.

소설을 깊이 사랑하지만, 한 판 붙고 싶었다. "너! 나를 신경 쓰긴 해?" 그럴수록 소설은 한없이 거대해지고 나는 작아졌다. 다람쥐가 돌산에 대고 발길질을 하는 꼴이다. 결국은 그 돌산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말이다. 소설을 '잘' 쓴다는 증명서는 한 장도 없고 달리할 줄 아는 건 없는 상태로, 나는 어영부영 취준생이 되었고 지쳐갔다. 아무것도 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특별히 지쳤던 밤, 우연히 유튜브에서 배우 고아성, 이솜, 박혜수가 음악 예능에 나가 부른 김현철의 '왜 그래'를 듣게 되었다.
 
왜 그래 그렇게 어려워 뭘 좀 먹으러 갈까? 일단 나갈까?
왜 그래 뭘 하자는 거야 참는 데도 한계가 있어 알겠니?

 
 
본래는 마음이 떠난 애인이 답답하게 구는 상황의 가사였지만 여자 셋이 '회식 3차' 분위기에서 즐겁게 부르니 '뭘 좀 먹으러 갈까? 일단 나갈까?'가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함께 부르고 싶었다. 셋은 자신들이 출연한 영화 홍보를 하러 음악 예능에 나온 것이었고, 나는 다음 날 당장 영화관으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보러 갔다.
 
맞짱 뜨기
 
영화는 내가 태어난, 1995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8년 차 고졸 경리 사원인 이자영(고아성 분), 정유나(이솜 분), 심보람(박혜수 분)은 같은 사정의 사원들과 함께 회사에서 연 토익 수업을 듣는다. 토익 600점이 넘으면 대리로 승진시켜주겠다는 약속 때문이다. 임신하면 회사에서 잘리고 실무 능력은 완벽하지만 '고졸 스펙' 때문에 담배 심부름, 커피 심부름을 해야 한다. 게다가 어리바리한 남자 후배에게 "대리니임" 불러야 하는 현실 속에서 이자영은 "나는 대리될래. 결혼 안 하고 대리될래"라고 웃으며 선언한다. 이자영은 대리직을 강렬히 욕망한다. 새벽 6시에 회사에서 토익 수업을 듣는 것만 보아도 그 욕망이 어느 정도로 강렬한지 우리는 알 수 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토익 수업에서 고졸 경리 사원들은 외친다. "아이 캔 두잇! 유 캔 두잇! 위 캔 두잇!"
 
영화는 이런 암울한 상황을 '세계화'를 외치던 당시 사회 분위기와 섞어 레트로하고 경쾌한 분위기로 풀어낸다. 덕분에 '왜 그래'를 듣던 때와 비슷한 리듬을 타며 이야기 속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어느 날 회사 공장에 잔심부름(또!)을 하러 간 이자영은 회사에서 폐수를 강에 무단 방류하는 것을 눈치챈다. 이 사실을 회사에 알리지만 돌아오는 건 인체에 무해하다는, 딱 봐도 의심되는 검사서.

이자영은 신림동 S대학 연구실에 들어가 자신이 담당 직원이라며 수질검사 검사서를 보여달라 말한다. 교수가 확인하겠다며 삼진그룹에 전화를 하자 이자영은 연구실을 뛰쳐나온다. 도망쳐 나오며 고개를 푹 숙인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대자보에 적혀있는 '세상은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중심에 우리가 있습니다. 그러니 행동해야 합니다'라는 글.

이자영은 다시 연구실에 들어가 달라진 눈빛으로 '누군가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라며 교수를 설득해 진짜 검사서를 받아낸다. 숫자로 드러난 회사의 비리를 눈앞에 두고 이자영, 정유나, 심보람, 동기 셋은 고민한다. 내부고발을 할까? 내부고발은 한 사람만 다친다는 걸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세다...... 상대가 너무 세......" 셋은 중얼거린다.
 
사람이 칼을 뽑았으면 4B연필이라도 깎아야
 
셋은 스파이 영화 뺨치는 작전을 펼쳐가며 증거를 모은다. 신문사에 증거를 보내고 신문 1면에 실릴 거라는 약속을 받는다. 하지만 삼진그룹이 신문사를 압박해 없던 일이 되었고 이자영의 책상은 복도로 밀려난다. 셋은 크게 좌절한다. 다른 둘이 포기할 거라고 오해한 이자영은 울면서 외친다. "야! 사람이 칼을 뽑았으면 4B연필이라도 깎아야 할 거 아냐! 나는! 포기! 안 해!" 정유나는 야식으로 준비한 빵을 들고 가며 시크하게 말한다. "아직 칼 뽑지도 않았어."

여기부터 영화의 제목인 '영어토익반'이 힘을 발휘한다. 회사 토익 교실에서 밤을 새워 영어로 된 자료를 해석하다 잠든 삼인방이 깨어났을 때, 토익 수업을 함께 듣던 고졸 사원 동료들이 함께 자료를 해석하고 있었다. 소름 돋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삼진그룹이 '주식회사'라는 점을 이용해 주주들을 설득하고 싸움에서 승리한다. 작고 작은 존재들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모였고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스틸 컷 ⓒ 롯데엔터테인먼트

 
이자영의 이야기는 '고졸 여사원이 회사의 비리를 밝혀냈다', 정도로 정리될 수 없다. 주위에선 '이 정도면 됐어, 넌 충분히 했어'라고 그녀를 앉히려 들지만, 이자영은 '내가 하는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라는 의지 하나로 끝까지 덤벼들어 상황을 바꾼다. 정유나는 회사 내에서 억울하게 꽃뱀으로 몰리고 증거 부족으로 싸움을 포기했지만 이번 싸움에선 달랐다. 심보람은 사랑하는 숫자로 장부를 조작하며 회의를 느꼈지만, 자기 일을 사랑하게 됐다.
 
추리는 억지가 많고 문제 해결 부분은 판타지며 지나치게 많은 캐릭터를 개입 시켜 산만하다. 뻔한 결말이다. 그럼에도 영화관을 나서며 힘을 받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는 거대한 존재와 싸우는 작은 존재에 대해 동질감을 느끼고 그들의 승리 이야기에 쾌감을 느껴서지 않을까. 아, 그리고 영화 결말 부, 이자영은 이런 인사말로 전화를 받는다.

"안녕하세요. 생산관리 3부 이자영 대리입니다."
 
나는 소설 말고 다른 글도 써보려 한다. 취직하고 삶을 살아가려 한다. 그 후 다시금 소설과 붙어보려 한다. 내가 이긴다. 이길 때까지 덤빌 거니까. 2021, 거대한 것들과 자신만의 싸움을 해야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며, 한 번쯤 외쳐보길 추천한다.
 
"아이 캔 두잇! 유 캔 두잇! 위 캔 두잇!"
영화 삼진그룹영어토익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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