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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시절 악역→한국영화 주연, 부산영화제 수장이 되다

[한국영화운동 40년_ 24] 부산영화제1. 한국에서의 첫 국제영화제

21.09.28 11:32최종업데이트21.10.05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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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 영화연구회 울림. 윗줄 오른쪽에서 세번째 장기철(감독), 네번째 장광수(영진위 본부장), 아래줄 오른쪽에서 첫번째 이경기(전 <스크린> 기자), 문명희(영화마당우리) ⓒ 장기철 제공

 
한국영화운동에서 가장 기본적인 행사는 영화제였다. 1984년 영화운동 청년들이 한자리에 모인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8mm/16mm 단편영화상영회'는 영화운동 역사에서 상징적인 첫 영화제였다. 당시에는 상영회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충무로 영화가 아닌 새로운 영화의 존재를 알렸고, '작은영화제'로 불렸다.
 
1985년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나며 영화운동의 주력이 됐던 대학영화서클은 영화제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냈다. 학생들이 준비했으나 당시 극장에서 상영되던 영화와는 다른 수준의 높은 예술영화를 선보여 관심을 받기도 했다.
 
대학에서 열린 영화제 중 가장 주목할만했던 행사가 1985년 11월 8일~15일까지 한국외국어대 영화연구회 '울림'이 주최한 칸영화제였다. 역대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수상한 영화들을 모아서 상영했고, 당시 국내 환경에서 보기 어려운 영화를 한꺼번에 모았다는 점에서 특별했다.
 
'울림'의 주축이었던 장기철(감독)이 기획하고 김태균(감독), 주경중(감독), 장광수(영화진흥위원회) 등이 함께 준비한 영화제는 당시에는 획기적인 행사여서 큰 호응을 얻어냈다. 천편일률적인 한국영화가 외면받고 할리우드 영화가 기세등등하던 시기에 새로운 영화에 대한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흔치 않은 장이었다. 학교가 미어터질 정도로 많은 관객이 몰리면서 상상을 초월한 흥행을 기록했고, 전체 대학영화운동에서도 영화제가 활성화되는 첫걸음이었다.
 
당시 상영작은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 <택시드라이버>,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 <미싱>,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블로우업>을 비롯해 <양철북>, <욜>, <가게무샤>, <나라야마 부시꼬> 등 1960년대에서 1980년대 초반 칸영화제 수상작들로 비디오와 16mm 필름으로 상영됐다.
 
당시 영화제를 기획한 장기철(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6기)은 "1983년 서울영화집단이 펴낸 책 <새로운 영화를 위하여>의 영향을 받았다"며 "'새로운 영화를 위한 실천'이었고, 충무로나 할리우드 영화가 아닌 다른 영화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1985년 11월 6일 기사에서 장기철은 "미국의 저급한 오락영화가 판을 치는 기존 상영영화계에 대항해 각국의 다양한 수준작으로 소개함으로써 영화를 통한 새로운 문화인식의 계기를 마련하고자 했다"고 기획 취지를 밝혔다.
 
작품 수급과 16mm 영사는 서울예전(현 서울예대) 조교로 있던 권영락(제작자. 시네락픽쳐스 대표)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 해외에서 들여와 서울예전에 보관하고 있던 비디오를 대여해준 것이었다. 장기철은 "<블로우업>은 KBS에 있던 선배가 무단반출해 준 필름으로 상영됐고, 터키영화 <욜>은 이장호 감독이 소장하고 있던 필름을 물물교환 형태로 어렵게 구했다고 말했다. 이장호 감독이 원하는 영화의 복사본을 만들어 주는 조건이었다.
 
영화운동에서 외대 칸영화제가 중요했던 것은 새로운 영화에 대한 대중적인 갈망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당시 울림 회원으로 실무적인 준비를 담당했던 장광수(영화진흥위원회 본부장)는 "80년대 후반 이후 충무로 활동을 시작한 영화인들 대부분이 찾아온 행사로 보면 된다"면서 "당시 입장료가 500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수입이 1600만원~1800만원 정도로 영화제 운영에 들어간 경비 400만 원 정도를 빼고 천만 원이 넘는 수익을 올렸다"고 회상했다.
 
장기철은 "당시 영화제 개최 소식이 알려진 후 외대 전화기가 불통됐을 정도로 문의가 엄청 났다"며 "8일 동안 2만 명 정도가 관람했고, 영화제가 끝난 후 천만 원이 넘는 현금을 손에 쥐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돈이 생기니 학생운동 쪽에서는 수익을 감옥 간 학생들을 위해 쓰라고 요구했고, '울림'에서는 영화를 직접 제작했다"면서 "이듬해 후지필름과 계약해 모든 대학영화서클에 영사기와 필름을 스폰서로 제공했다"고 덧붙였다.
 
장광수는 "장기철(감독)이 기획했으나 칸영화제 수상작 명단을 줄줄이 외우고 있던 이경기(영화 칼럼리스트. 전 <스크린> 기자)의 역할도 컸다"고 말했다. 또한 "홍보를 위해 대학로로 포스터를 붙이러 갔는데, 한 장씩 붙이기가 힘들어서 10장씩 붙여놨더니 주목도가 높아졌고, 이후 포스터를 한꺼번에 여러 장을 붙이는 방식이 유행됐다"고 옛 추억을 떠올렸다.
 

외국어대 영화연구회 울림. 오른쪽에서 두번재 장기철(감독), 세번째 이재용(감독) ⓒ 장기철 제공

 
장기철은 1987년 12월 대선을 앞두고는 전두환 군사독재의 광주학살과 상계동 철거민 투쟁 영화를 상영한 다룬 '제5공화국 보도 영화전'을 한국외대와 연세대에서 진행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이 역시도 서울시민 2만 명 정도가 관람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어머니, 당신의 아들>을 연출한 이상인(감독, 한양대 교수)은 "영화 제작과정에서 장기철의 도움을 받은 것도 대학에서 영화제를 여는 기획력이 놀라웠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벗기기 영화가 난무하며 한국영화의 질적 수준이 저하되던 시기, 문화원을 오가지 않았던 일반인들에게는 대학영화운동이 주도한 영화제가 새로운 영화에 대한 문화적 욕구를 채워준 것이었다. 장기철은 "외대 칸영화제 이후 다른 대학에서도 비슷한 성격의 영화제가 이어지면서 써클 운영비를 마련하거나 독립영화를 만드는 기반이 된다"고 말했다.
 
'영화운동=영화제'
 
대학에서의 영화제뿐만 아니라 충무로 영화들의 잇따른 해외영화제 수상은 영화제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을 높이고 있었다. 저질 논란 속에서도 괜찮은 한국영화가 해외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1987년 임권택 감독 <씨받이>에 출연한 배우 강수연의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을 시작으로, 1988년에는 배우 신혜수가 임권택 감독 <아다다>로 캐나다 몬트리올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는다.
 
1989년에는 다시 강수연이 임권택 감독 <아제아제 바라아제>로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1990년에는 심혜진이 박광수 감독 <그들도 우리처럼>으로 낭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91년에는 장길수 감독 <은마는 오지 않는다> 배우 이혜숙이 캐나다 몬트리올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이때 장길수 감독은 각본상을 받았다.
 
사실 한국영화가 해외에 소개되는 과정에서 해외영화제들의 도움은 적지 않았다. 1987년 베를린영화제 포럼에 초청된 이정국(감독. 세종대 교수)의 <백일몽>, 이은(명필름 대표)의 <공장의 불빛>, 김태영(감독. 인디컴 대표)의 <칸트씨의 발표회> 등 단편영화는 충무로를 벗어난 새로운 한국영화가 해외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1989년 장선우 감독의 <서울황제>를 초청하는 과정에서 보인 베를린영화제의 적극성도 특별했다. 당시 베를린영화제에 참석했던 안동규(제작자)에 따르면 <서울황제>는 영화제 상영을 위한 프린트(상영본)를 새로 만들었다. 그러나 현상소 측은 예전에 미지급된 현상비용이 남아있다며 프린트를 내주지 않고 외상미수금을 정리하라고 요구했다. 1986년에 개봉했던 영화라 제작사도 머뭇거리면서 베를린영화제 초청에 차질이 생겨났다.
 
이때 베를린영화제가 선택한 것은 판권 구매였다. 안동규는 "외상미수금을 베를린영화제가 지불하고 대신 판권 구입비용으로 상쇄해 필름을 베를린으로 가져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새로운 한국영화가 해외에 알려지는 과정에서 영화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대학가를 중심으로 개최된 다양한 영화제는 한국 영화운동의 가장 기본적이면서 필수적인 활동이었다. 다양한 예술영화와 직접 제작한 단편영화를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는 통로였고, 영화운동의 저변을 확대하는 발판이었다.
 

1회 부산국제영화제를 알리는 조형물 ⓒ 부산영화제 제공

 
1996년 한국에서 첫 국제영화제로 막을 올린 부산국제영화제의 밑바탕에는 이렇듯 영화운동이 자리하고 있었다. 1979년 서울대학교 '얄랴셩'이 본격 태동 이후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거쳐 서울영화집단과 장산곶매, 민족영화연구소 등으로 발전했던 한국 영화운동의 대표적인 성과물이 부산영화제였다. '영화운동=영화제'였다.
 
충무로 영화와는 다른 새로운 한국영화를 꿈꿨던 '영화'운동과, 사회변혁과 정치적 투쟁을 위한 운동으로서의 영화를 지향했던 영화'운동'의 응축된 역량이 발휘된 자리가 영화제였다. 충무로에서 전선을 넓히고 있는 영화운동은 영화제를 통해 국제적인 연대의 틀을 확보하게 된다.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오가면서 영화를 공부하고, 다양한 예술영화를 접하던 영화 청년들의 땀이 이뤄낸 결실이었다.
 
한편으로 부산영화제는 국제영화제 출발의 신호탄이었다. 1997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2000년 전주국제영화제가 뒤를 이으면서, 바야흐로 영화제의 시대가 열린 것이었다. 영화운동의 거점이 된 국내 영화제들은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북돋우며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영화언어'와 페사로영화제

부산영화제 출발에 있어 가장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은 영화비평지 '영화언어'와 1992년 이탈리아에서 열린 페사로영화제였다.
 
1992년 이탈리아 페사로영화제가 이장호 감독, 배창호 감독 등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영화특별전을 준비하면서 영화제 책자에 수록될 한국영화 리뷰를 전문비평지 '영화언어'에 요청한 것이다. 1989년 창간된 고급평론지 '영화언어'는 전양준(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이 발행과 편집을 맡다가 1991년 부산으로 중심을 옮기면서 김지석(작고. 전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이 편집을 책임지고 있었다. 발간 비용은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이 충당했다.
 
이효인(경희대 교수.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은 저서 <한국영화뉴웨이브>(2020년)에서 "1991년 카를로비바리국제영화제 초대받았던 장선우 감독이 이탈리아 페사로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아드리아노 아프라로부터 한국영화특별전을 제안받았고, 장선우가 이효인을 소개했으며, 이효인은 '영화언어' 편집위원들과 의논해 작품 선정을 하고 영화제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1992년 페사로영화제. 왼쪽부터 박광수 감독, 이장호 감독, 임안자 평론가, 배창호 감독, 안성기 배우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자료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의 페사로영화제 참석이 부산영화제 창설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당시 '영화언어' 편집을 맡은 김지석은 부산영화제가 생겨나기 이전 해외영화제를 찾아다닐 만큼 영화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첫 해외영화제 참석인 1991년 일본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였는데, 여기서 충격을 받게 된다.
 
김지석은 부산영화제 과정을 기록한 저서 <영화의 바다 속으로>에서 "'영화언어' 편집인을 맡고 있었지만 미국 홍콩 서유럽 영화 외에는 보기 힘들었던 국내 영화문화 환경 때문에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었는데, 존재조차 알지 못한 다양한 나라의 영화들이 상영되고 수많은 해외 영화인들이 교류하는 모습은 큰 충격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후로 김지석은 자비를 들여 홍콩영화제와 싱가포르영화제를 다니며 국제영화제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 해외영화제에 초청받은 감독이나 배우, 제작자들 외에는 자비를 들여 영화제에 참석하는 것이 간단치 않았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부터 매해 해외영화제를 오간 영화인들도 있었다. 대학영화운동을 지원했던 권영락(제작자. 시네락픽쳐스 대표)이 대표적이었다. 1988년부터 칸영화제에 14년 동안 꾸준히 참석하는데, 영화제 참관 외에 사진기자 프레스카드로 포토월에서 사진을 찍었다는 점이 특별했다.
 
권영락은 "칸영화제 프레스 자격을 얻은 것은 배용균(감독.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덕분이었다"며 "프랑스에서 유학했던 배용균이 현진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직접 나서 칸영화제 프레스카드를 받을 수 있도록 주선해줬고 부산영화제 전후로 국내 영화인들의 참석이 늘어나면서 매해 칸영화제에 참석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1990년대 국내 사진기자들이 취재를 올 때 도움을 주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1992년 이탈리아 페사로영화제. 왼쪽부터 토니 레인즈. 김지석, 전양준. 이용관 ⓒ 부산영화제 제공

 
1992년 6월 10일~18일까지 열린 페사로영화제는 한국영화가 해외에 소개되는 순간이었으나, 영화인들에게는 충격을 안겨준 시간이기도 했다. 현지에서 한국영화가 미개한 변방 취급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사로에 모인 영화인들은 속상해하며 술을 잔뜩 마실만큼 울분을 느끼게 됐고, 어떻게든 만회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역시 한국에서의 영화제 개최 의지를 다지는데, 나중에 부산영화제 출범 때 도움을 받게 되는 영국 평론가 토니 레인즈와 임안자 평론가를 만나게 된 것은 수확이었다.
 
당시 미개한 변방 취급을 받는 데는 영화진흥공사(윤탁 대표. 현 영화진흥위원회)가 현지에서 보인 태도도 단단히 한몫했다.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기관이 국제영화제에서 망신스러운 행동을 자초한 것이었다.
 
초청작 중에는 1990년대 민중영화의 대표작이었던 <파업전야>도 포함돼 있었다. 유럽에서 처음으로 한국영화가 대대적으로 소개되는 자리였던 만큼 다양한 한국영화를 초청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 군사독재의 탄압을 받았던 노동영화의 상영에 영화진흥공사가 문제를 제기한다. "<파업전야>는 불법영화로 상영을 중단해야 한다"며 페사로영화제 측에 거세게 항의하는 추태를 보인 것이다.
 
당시 영화진흥공사는 1992년 페사로영화제에 초청영화인과 영화진흥공사 대표 등으로 한국대표단을 구성해 참가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처음 열리는 한국영화특별전이었던 만큼 정부 차원에서 성의를 기울인 것이었다. 하지만 페사로영화제 측에 "<파업전야>의 상영이 철회되지 않으면 대표단을 철수하겠다"고 안하무인 태도를 보인 것은 문화 후진국 수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다.
 
<파업전야>는 충무로 영화와는 다른 한국 영화운동의 성과물로 매우 중요한 영화였다. 여러 형태의 한국영화를 보여주고자 했던 영화제의 기획 의도에 맞는 작품이기도 했다. 당시 영화진흥공사의 행태는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문제는 영화진흥공사가 다른 나라 영화제에 가서 초청 영화를 상영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것이 무례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만큼 무지했다는 것이다. 군사독재에 길들여 있던 한국영화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 것으로서, 검열과 표현의 자유가 제약된 영화제작 환경을 국제적으로 드러낸 공개 망신이기도 했다. 군사독재정권의 문화적 무식을 표출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페사로영화제가 이를 받아들일 리는 만무했다. "영화에 대한 정부기관의 통제를 인정할 수 없고, 영화제 프로그램이 이미 확정돼 상영철회는 불가능하다"고 맞섰다. 국제영화제로서 지극히 당연한 태도였다.
 
결국, 뒤늦게 분위기를 파악한 영화진흥공사가 서울에서 급히 이사회를 열어 <파업전야> 상영허가를 결정하는 형태를 취하며 한 발 뺐으나, 페사로영화제 아드리아노 아프라 집행위원장은 영화제가 끝난 후 <파업전야> 프린트를 한국에 다시 돌려보내지 않는다. 필름의 안전을 자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을 방문한 페사로영화제 아드리아노 아프라 집행위원장과 김동호 영화진흥공사 사장, 임안자 평론가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 자료(임안자)

 
1992년의 페사로영화제 상황이 국내에서 재현된 것이 2014년 부산국제영화제 <다이빙벨> 논란이었다. 당시 독재자의 딸이었던 박근혜 정권과 서병수 부산시장은 영화상영을 막기 위해 온갖 압박을 가한다. 군사독재 시절 통제로 회귀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페사로영화제에서 보였던 영화진흥공사의 추태를 정부와 부산시장이 버젓이 자행한 것이었다.
 
부산영화제가 페사로영화제처럼 이를 거부한 것은 당연했으나, 이후 가해진 정치적 탄압은 극우적 시각을 가진 보수 세력의 민낯이기도 했다. 1970년대 유신독재와 1980년 군사독재의 수준이 21세기에 다시 드러난 것으로, 정치적 기소를 통해 부산영화제 흠집 내기에 혈안이 됐던 몰지각함은 국제적 망신을 자초한다. 페사로영화제에서 영화진흥공사가 보인 추태의 데자뷔였다.
 
역설적으로 당시 <파업전야>는 영화진흥공사의 몰지각한 행태로 인해 국제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페사로영화제에 참가했던 이효인은 한겨레신문(1992년 6얼 14일 자)에 기고한 글을 통해 "한국영화를 보는 유럽 관객의 시선은 상업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파업전야>의 진지함과 역동성은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검열제도는 국제영화제 결격사유
 
1990년대 초반 국제영화제 관심이 차츰 높아지면서 우리도 만들자는 여론이 형성된다. 당시 국제영화제는 숙원사업 중의 하나였다. 영화진흥공사(사장 김동호)는 1980년대 이후 제기된 국제영화제의 필요성에 공감해 1991년 12월 23일 영화진흥공사 회의실에서 '국제영화제 개최를 위한 토론회'를 열어 영화계 의견을 듣는다.
 
경향신문 1991년 12월 24일 기사에 따르면 당시 20여 명이 참석한 토론회에서 1993년 대전 엑스포에 맞춰 영화제 개최를 원칙적으로 합의하고, 재벌 4~5개사를 비롯해 정부와 지자체를 주축으로 영화후원회를 결성해 영화제 개최에 따른 재원을 마련하는 방식이 논의된다. 개최지는 제주도가 유력하게 거론됐다.
 
영화인협회로 대표되는 당시 충무로 주류세력 역시 국제영화제에 관심이 있었다. 영화시장의 3분이 2 이상을 외국영화가 장악한 상태에서 한국영화산업의 살길은 해외시장 진출에 있었기에, 국제영화제가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따라서 국제영화제 개최는 당위와도 같았다.
 

1989년 해외에서 개최된 국제영화제 수상자들을 격려하는 노태우 대통령이 김동호 당시 영화진흥공사 사장과 악수하고 있다. ⓒ 국가기록원(문체부)

 
한겨레신문은 1994년 1월 14일 자 기사에서 "1995년을 국제영화제 원년으로 살려보려는 움직임들이 민간 차원에서 다각적으로 일고 있다"면서 "회사원 등 다양한 경력의 젊은 기획자 6명으로 구성된 신명기획팀이 영화제 준비를 위한 공식 활동에 들어갈 예정이다"라고 소개했다.
 
당시 서울국제영화제에 대한 구상은 1995년 10월에 비경쟁 영화제로 개최하고 16mm나 35m 영화 100편 정도를 상영한다는 것이었다.
 
앞서 1993년에는 영화평론가 김대현과 영화수입업자인 신동기(신톡 감독)가 영화계와 정책당국을 다각적으로 접촉해 한국관광공사로부터 1억 원의 후원을 약정받는 등 실무단계까지 가기도 했다.

당시 김대현(영화평론가)은 영화진흥공사의 용역을 받아 개인적으로 해외 20여개 영화제를 방문한 경험을 바탕으로 자료를 수집하며 준비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많이 나오자 접게 된다. 부인인 채윤희(영등물등급위원장)는 "남편이 그 당시 가장 많은 영화제를 다녔다"며 "서울에서 공청회가 열리기도 했으나 칸영화제같은 행사를 서울에서 만드는 건 어렵다는 의견만 나오면서 수집한 자료를 김지석에게 전해줬다"고 말했다.
 
신동기(신톡 감독)는 "대학 졸업 후 미국에 이민 가서 선댄스영화제와 토론토영화제 등을 다니며 영화제의 매력을 알게 됐다"면서 "한국에 돌아와 해외영화수입 일을 하면서 서울이란 대도시에 영화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 추진했던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어 당시 "한국관광공사 담당자와 대화가 잘 통해 후원 약속을 받았으나, 그분이 시카고로 인사 발령이 나면서 후원이 무산됐다"고 덧붙였다.
 
1993년 7월 문화체육부(문체부)의 문화 체육 청소년 진흥 5개년 계획 중 문화부문에 영화법 정비를 통해 영상산업진흥법을 제정하고 제주국제영화제 격년 개최를 하는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1994년 2월 문화체육부와 영화진흥공사는 민간과는 별도의 서울국제영화제 창설 계획을 내놓는다.
 
광복 50주년과 세계 영화 100년을 맞는 1995년을 목표로 정부 지원금 및 민간자본 30억 원을 투입해 세계적인 규모의 영화제를 열겠다는 것이었다. 해외영화상 수상작·신진감독데뷔작·외국 독립제작영화·아시아영화·여성영화를 선정하고, 영화제 출품되지 않은 영화와 한국영화 회고전 및 그해 한국영화 대표작과 토론회 등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하겠다는 계획이었다.
 
1996년에는 서울시도 격년제 영화제를 1997년부터 열겠다는 개최안을 확정한다. 조선일보는 1996년 1월 27일 자 기사에서 "서울시가 극영화와 애니메이션 등 3~4개 분야 30여국으로부터 1백 편을 출품받고 당분간은 2년마다 열 계획이다"라며 "비영리재단법인인 조직위원회가 사업을 맡아 주관하고 서울시는 예산만 지원하겠다는 방침"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1993년부터 여러 그룹에서 진행된 서울국제영화제 구상은 하나같이 실패했다. 영화계 내부의 광범위한 합의를 얻어내지 못한 데다, 국제영화제에 대한 충분한 인식 없이 하나의 이벤트사업 개념으로 너무 손쉽게 도전한 결과였다. 충무로에서는 문체부의 계획조차 졸속이고 즉흥적이라는 비판이 나올 정도였다. 대종상영화제도 제대로 못 치르면서 무슨 국제영화제냐는 비아냥 섞인 지적이었다.
 
누가 주도권을 쥐고 움직이느냐에 생각이 달랐고, 한 번도 안 해본 국제행사를 만들어 내는 데 있어 전문적인 인력이 존재하지 않은 것도 난제였다. 문체부 역시 이런 계획을 진행할만한 전문가가 없는 현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해외영화제를 부럽게 바라보기는 했어도 직접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한 것이었다.
 
사실 당시 준비가 진척돼 서울에서 정부 주도의 국제영화제가 개최됐더라도 성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컸다. 페사로영화제에서 <파업전야> 상영 중단을 요구하며 추태를 부린 것이 정부와 영화진흥공사의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전양준은 "신동기(신톡 감독)의 연락을 받고 웨스틴조선호텔에서 강한섭과 함께 조찬을 한 적이 있었다"며 "이때 국제영화제에 대한 구상을 듣고 공감됐으나, 검열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제대로 된 영화제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했다.
 
1995년 5월 13일 영화진흥공사 주최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서울국제영화제 창설에 따른 공개토론회'에서 영화관계자들은 "국제영화제 출품작까지 필름의 삭제를 강요할 수 있는 공륜의 검열제도가 국제영화제 개최국으로서는 결격사유"라고 지적했다.
 
당시 토론회 발제를 맡은 유지나(영화평론가. 동국대 교수) 는 "세계적으로 350개 넘는 국제영화제 존재하는 지금 어떻게 성공적인 영화제를 치를 것인지가 문제다. 칸이나 베를린 베니스와 경쟁하기보다는 특별한 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비경쟁영화제가 현실적이다. 로카르노영화제, 낭트영화제, 선댄스영화제 등을 모델로 해야한다"고 제안했다.
 
은행 대출받아 개최 서울국제독립영화제
 
국제영화제 논의가 지지부진한 사이, 1990년대 초반 작은 규모의 국내 영화제들은 하나둘 생겨나고 있었다. 1994년 4월 26일~5월 6일에는 전위영상 연구작업을 해온 뉴이미지 그룹이 동숭아터센터에서 1회 실험영화제를 개최했고, 1994년 11월 5일~11일 삼성영상사업단이 개최한 1회 서울단편영화제가 막을 올렸다.
 
당시 서울단편영화제를 기획한 김은영(영화평론가. 추계예대 교수)은 문화일보(1993년 12월 7일 자)와의 인터뷰에서 "영화를 공부해 온 사람들에게 상업영화계로 뛰어들기 전 습작기를 주는 완충 시스템으로 작용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1995년 1회 서울국제독립영화제 ⓒ 김대현 제공

  

1995년 1회 서울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이광모(백두대간 대표),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 최석규(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 부회장), 유현목(감독), 이충직(전 전주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재형(동국대 교수), 김대현(감독. 서울국제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 김대현 제공

 
국제영화제 준비가 말로만 왕성할 때 먼저 치고 나간 것은 독립영화 쪽이었다. 1995년 12월 2일~8일까지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개최된 서울국제독립영화제는 김대현의 인디라인이 주축이 돼 준비된 국제영화제 이름이 들어간 행사였다.
 
이란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가 개막작이었고, 배용균 감독의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이 월드 프리미어로 처음 공개됐다. 전체적인 프로그램은 1980년대 초반 만들어진 한국독립영화회고전을 비롯해 폴란드 키에슬롭스키 감독 특별전, 오버하우젠단편영화제와 클레르몽페랑단편영화제 등 해외 유수 단편영화제 수상작 20여 편과 국내의 주요단편 20여 편으로 구성됐다.
 
김대현은 "별도의 외부 후원 없이 은행에서 500만 원을 대출받았다"며 "전양준(전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 등을 통해 국제영화제의 필요성을 듣고 있었는데, 독립영화는 상대적으로 수월할 것 같아 행사를 연 것이었다"고 말했다. 상영작들은 김대현이 사비를 들여 오버하우젠영화제 등을 방문해 출품된 영화를 보고 선정한 것이었다.
 
고려대학교 총학생회 기획부장으로 학생운동을 했던 김대현은 "대학 졸업을 앞두고 사회운동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들 때, 도피처가 아닌 또 다른 가능성으로 영화를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사회변혁 운동에서 영화의 역할을 인식한 것이었다.
 
김대현은 1989년 여름 낭희섭이 조교를 맡았던 영화마당우리의 작은영화워크샵을 통해 영화운동에 들어섰고, 1990년 3월 신촌 우리마당 영화분과에서 활동하다 '영화제작소 현실'을 만든다. 이때 제작한 의문사 문제를 다룬 단편영화 <서울길>은 1991년 대한민국창작단편영화제(서울독립영화제 전신)에서 우수동백상을 수상했다.
 
1991년 이상인이 <어머니, 당신의 아들> 제작으로 수배를 받으며 편집을 마무리하지 못했을 때 '영화제작소 현실' 전체를 편집공간으로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 '영화제작소 현실'의 이름을 '인디라인'으로 바꾸고 독립영화제를 준비한 것이었다.
 
김대현은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일반인들에게는 독립영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를, 독립영화제작자들에게는 세계 독립영화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주자는 뜻에서 영화제를 기획했다"며 "독립영화 활성화를 위해 새로운 영상기술과 영화문법으로 무장한 영화인들이 계속 등장할 때 한국영화산업의 발전을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독립영화와 상업영화는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의 관계"라며 "한나라의 산업이 발전하려면 기초과학이 융성해야 하듯 영화가 발전하려면 그 토양이 되는 독립영화가 풍부하게 양산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회 서울국제독립영화제 개막식 ⓒ 김대현 제공

 
서울국제독립영화제는 1만5천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주목받게 된다. 인디라인은 여세를 몰아 1996년 3월 16일~22일까지 한국독립영화제를 개최한다.
 
김대현, 이상인, 헬렌리 등 1965년생 감독 3인 초대전을 마련했고, 1996년 서울단편영화제 우수상 수상작인 곽경택 감독 <영창 이야기>, 이지상 감독 <로자를 위하여>, <파업전야>를 연출한 장동홍 감독의 초기 단편 <그날이 오면>, 전대협 대표로 방북했던 임수경 가족 이야기를 다룬 한국영화아카데미 6기 금보상 감독의 <슬픔을 자르고> 등 단편영화를 상영했다.
 
김대현은 "한국독립영화제는 영화제보다는 상영회 성격이 더 컸다"면서 "헬렌리는 삼성영상사업단이 주최했던 서울단편영화제 만난 상영작 감독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들 영화제들은 후원사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길게 이어지지 못한다. 서울국제독립영화제는 격년제로 예정했으나 1997년 IMF 사태로 인해 1998년 3월에 2회 행사를 개최한 뒤 끝나게 된다. 재정적 문제는 전체적인 운영과 결부됐고, 자막 작업 등 실무적인 문제로 이어지며 부담이 된 것이었다. 독립적으로 영화제를 운영하기에는 기반이 너무 약했다.
 
"영화제 준비 잘 되고 있어?"
 
국제영화제 개최를 위한 노력은 1990년대 중반에도 계속 이어졌다.
 
1995년 8월에는 신촌 문화공간 우리마당을 꾸려온 영화마당우리 설립자 김기종을 중심으로 광주국제영화제가 준비모임을 구성한다. 대한극장을 운영하던 세기상사의 실질적 대표 국쾌남의 동생이면서 <하얀전쟁> 제작자인 국종남(전 국회의원)이 준비위원장을 맡았고, 유현목(감독), 임권택(감독), 이장호(감독), 정용탁(교수), 김대현(영화펑론가), 정성일(영화평론가), 홍성담 (화가) 등이 준비위원으로 참여했다. 광주영화제는 2000년~2002년을 개최를 목표로 경쟁영화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여러 영화제 계획이 나왔으나 당시에는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등 평론가들이 중심이 된 부산에서의 준비가 개인적인 역량 등에 비춰볼 때 오히려 실효성을 크게 평가받고 있었다. 이용관은 "서울에 올 때마다 '영화제 준비가 잘 되고 있냐?'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김지석은 경쟁영화제인 도쿄보다 비경쟁 영화제인 홍콩영화제에 가까운 모습을 영화제 청사진으로 그리고 있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제2 도시라고 해도 부산에서 개최되는 영화제를 생각한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 서울과 지방에서 추진된 국제영화제 설립 논의에서 대체적인 초점이 '서울국제영화제'에 맞춰진 것은 전통적으로 충무로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한국영화에서 서울에서의 영화제 개최가 당위처럼 인식된 것이었다.
 
한국영화의 충무로 중심주의가 강고한 상황에서 부산이 아무리 지역의 영화역사를 강조한다고 해도 변방에 불과했기에 부산에서의 영화제가 현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은 것이다.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등 영화학자들 역시도 당시 한국영화 주류인 충무로의 중심이 아닌 소장파 학자 정도였다.
 
이용관을 중심으로 대학에서 강의하던 학자들이 충무로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는 시기였다. 1994년 대종상영화제 심사위원에 이용관(부산영화제 이사장), 주진숙(한국영상자료원장) 강한섭(서울예대 교수) 등 3인이 참여한다. 그러나 이들은 대종상 수상작 선정 과정의 문제를 비판하면서 백서 발간 등을 주도했고, 1996년에는 <애니깽> 수상 문제로 충무로 주류세력과 대놓고 충돌하면서 미운털이 박힌 상태였다.
 
다만 부산의 장점은 서울보다 영화제 준비가 착실히 진행됐다는 점이었다. 오랜 시간 기반을 구축해 놓은 것이 바탕이었다. 1984년 유일한 영화전공 교수로서 부산 경성대에 부임한 이용관은 프랑스문화원 '부산씨네클럽'에 이어 '씨네마테크 1/24' 등의 미학적 영화운동과 함께 '꽃다림'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영화운동을 모두 지도하면서, 이들에게 영화제의 필요성을 각인시켰다.
 
'꽃다림'에서 활동했던 황의완(부산콘텐츠마켓 이사장)은 "이용관이 수준 높은 강좌 프로그램을 진행해주면서 부산에서 국제영화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부산 문화예술운동을 이끌었던 분들과의 술자리에서도 영화제의 중요성을 설파하며 토론을 이어가기도 했다"고 말했다.
 
부산 영화운동에서 이용관의 활동은 전방위적이었다. '영화언어' 발간 비용뿐만 아니라, 김지석이 '영화언어' 편집공간으로도 활용됐던 프라모델 완구점을 운영할 때 보증금을 책임졌다. '씨네마테크 1/24'을 시작했던 학생이 복학할 때는 등록금까지 빌려줄 정도였다. 부산영화운동에서 이용관 주머니에서 나간 쌈짓돈은 적지 않았다.
 
부산 경성대 시절 전양준, 이충직, 신강호 등 유능한 영화학자들을 강사로 초빙한 것은 결과적으로 부산영화제의 토대를 닦아 놓은 것이기도 했다. 부산영화제가 자리 잡는 과정에서 이들은 많은 도움이 된다.
 
이용관은 1994년 말 부산 경성대를 떠나 1995년 모교인 서울 중앙대학교 교수로 부임한다. 하지만, 본격적인 부산영화제 준비는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1회 부산국제영화제 기자회견 ⓒ 부산영화제 제공

 
서울을 제치고 부산영화제가 닻을 올릴 수 있었던 데는 영화제에 대한 전문성과 함께 다양한 인맥 등도 작용했다. 특히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은 영화학자로서 영화평론가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김지석은 저서 <영화의 바다 속으로>에서 "이용관, 전양준은 1980년대부터 한국영화계와 평론계에서 활동하며 폭넓은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해 왔고, 이 네트워크 덕분에 부산영화제는 폭넓은 국내외 영화계로부터 폭넓은 지지와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이용관은 "영화제는 평론가들이 중심이 돼야지 제작자들이나 감독 등은 자신들의 작품을 우선할 수 있다"라며 "도쿄영화제가 부산영화제에 뒤처진 이유도 제작자들이 영화제를 운영하면서 자신들의 영화를 상영하기 위해 애쓰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전양준은 1970년대 말부터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을 다니며 새로운 영화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구축했던 초기 영화운동의 중심이었다. 전찬일(영화평론가. 전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은 "대학 시절 영화 세미나에서 전양준의 지도를 받았다"고 말했다.
 
1980년대 <프레임 1/24> <열린영화> <영화언어>의 발행과 편집을 맡았고, 다양한 영화이론서를 펴내 주목받았다. 1985년 계간 <열린영화>에 쓴 '작은영화는 지금'에서 8mm, 16mm 영화에 대해 '작은 영화'라고 정의하며, '구호가 아닌 실천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지향점을 제시했다. 1985년 영국에 유학해 런던영화제 등에 참가하며 영화제에 대한 여러 경험과 전문성을 쌓았고 풍부한 해외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 당시 몇 안 되는 국제영화제 전문가였다.
 
신동기(신톡 감독)는 "1993년 전양준에게 서울국제영화제 구상을 이야기했던 것은 영화제에 대한 이해가 가장 깊고, 전문가이기 때문이었다"며 "당시 왜 여건도 안 좋은 부산에서 영화제를 하려고 하냐?고 묻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오석근(전 영화진흥위원장)과 함께 부산 영화운동의 대표주자였던 김지석은 부산대 영화연구회와 부산씨네클럽 등 부산에 기반을 둔 활동을 중시했다. 대학원을 다닐 때도 서울로 통학했고, 부산을 벗어난 영화제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던 철저한 '부산주의자'였다. 부산에서 촬영한 이명세 감독 <지독한 사랑> 현장을 지휘하고 있는 오석근을 부산영화제 준비에 합류시킨 것도 김지석이었다. 오석근은 "김지석의 꼬임에 넘어간 것이었다"고 말했다.
 
신강호(영화평론가. 대진대 교수)는 "부산 경성대로 강의를 오면 이용관 교수가 광안리에서 회를 사줬다"며 "부산에도 프랑스문화원에서 영화를 보는 이들이 있다고 해 김지석을 소개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김지석이 부산영화제의 설계자였고, 영화제에서 진행하는 각종 프로그램의 이름 등 세세한 부분들이 김지석의 손을 거쳐 결정됐다"고 덧붙였다.
 
김지석은 저서 <영화의 바다 속으로>에서 "이용관이 경성대 교수였고, 전양준이 경성대로 강의하러 내려오는 날은 오석근 등 네 사람이 술자리에서 영화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였다면서 다음날 새벽에야 끝을 보는 날이 허다했는데, 술을 전혀 못 하는 나는 고역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용관은 "영화제를 만들어 주겠다고 하자 김지석이 못 먹는 술을 벌컥 들이마셨던 일도 있었다"고 말했다.
 
부산영화제 선장 김동호
 
영화평론가들이 중심이었던 부산영화제 기획 과정에서 행정관료였던 김동호(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를 집행위원장으로 영입한 것은 묘수였다.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등은 영화 전문가들로 전체적인 운영을 책임지기 어려웠다. 행정적인 부분과 예산 마련을 위해서는 총괄할 사람이 필요했다. 김지석은 <영화의 바다 속으로>에서 "영화제 밑그림을 그리면서 선장을 영입하기로 했고, 후보는 자연스럽게 김동호로 압축됐다"고 회상했다.
 
1995년 8월 18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김동호와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3인이 마주하게 된다. 김동호는 2011년 국민일보에 연재한 '김동호의 씨네마 부산'에서 "처음에는 망설였다"며 "이유는 영화제를 만들겠다는 젊은 사람들 말만 믿고 참여했다가 망신만 당했던 일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김동호에 따르면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륜) 위원장이던 1994년 9월 어느 대학 영화과 교수의 요청으로 '국제에버그린영화제' 조직위원을 맡게 된다. 에버그린영화제는 환경영화제로 그린스카우트, 환경관리공단, 신명기획이 중심이 된 서울국제영화제조직위원회가 준비한 행사였다.
 
공륜위원장이 영화제에 관여하는 게 부적절해 보일 수도 있었으나 전국극장연합회 강대진 회장, 서울시극장협회 곽정환 회장, 한국영화협동조합 강대선 이사장 등에게도 조직위원 참여를 부탁했고, 가장 우려하고 있던 초청 영화에 대한 공륜 심의 면제를 약속한 상태였다.
 
그런데 1994년 10월 29일 개막을 예정했던 국제에버그린영화제는 직전에 취소된다. 동아일보는 1994년 10월 24일 자 기사에서 "영화제 집행위 측이 '공륜 심의와 관련 해외 출품 관계자들이 이미 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작품들에 대해 사전 심의를 하겠다는 것은 모독이라며 반발한 데다 영화제 개막 후 출품자가 작품을 직접 가지고 오는 상황에서 심의를 위한 해외 작품 일괄 제출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를 밝혔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김동호는 "앉은 자리에서 벼락 맞듯 황당하기 짝이 없었고, 해명할 여유도 없었다"며 "취소의 주된 이유는 스폰서를 구하지 못한 채 졸속으로 추진했기 때문으로 국제적 망신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1년 만에 또다시 젊은 교수들에게 비슷한 제의를 받다 보니 망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 사람의 집요한 설득에 승복하게 되다. 김동호는 "그들의 말에서 뜨거운 열정을, 표정에서 굳은 의지를 읽었다"며 "5억 원을 지원받는다면 거기에 조금만 보탤 경우 국제영화제를 개최할 수 있겠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1974년 정부를 대표해 북한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김동호 당시 문공부 보도국장(왼쪽) ⓒ 국가기록원(문공부)

 
문화공보부(문공부. 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최장수 기획관리실장을 지냈고 영화진흥공사 사장, 문공부 차관,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김동호는 박정희와 전두환 군사독재가 이어지던 시절 문화공보부에서 촉망받던 유능한 관료였다.
 
매일경제는 1973년 12월 10일 자 기사에서 "보도국장에 임명된 김동호는 문공 행정의 엘리트"라고 소개했다. 이어 "61년 문공부에 발을 디딘 후 공을 쌓아왔고, 문예 중흥 5개년 계획의 성안은 빛나는 업적 중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1972년 근정포장 홍조근정훈장을 받을 만큼 문공행정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고 호평했다.
 
군사독재 대변했던 문공부 엘리트
 
하지만 그만큼 명암도 엇갈린다. 문공부 엘리트 공무원으로서 당시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진 군사독재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했기 때문이다.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에 이어 유신체제를 구축한 박정희 군사독재의 중앙정보부는 1974년 4월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의 관련자 180여 명이 불온세력의 조종을 받아 국가를 전복시키고 공산정권 수립을 추진했다는 혐의로 구속·기소한다. 유신독재에 항거한 민주화운동 탄압이었고, 윤보선 전 대통령,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김동길 교수, 김찬국 교수 등이 유죄 판결을 받고, 이철(전 코레일 사장), 유인태(전 국회의원) 등은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이를 북한이 비난하자 1974년 7월 19일 당시 문공부 대변인으로 정부 대변인 역할을 맡았던 김동호 보도국장은 "북한공산집단은 그들이 통일전선전략의 일환으로 배후조정했던 민청학련 사건의 공판이 열리자 노동신문, 평양방송, 통혁당 방송과 각종군중대회 등을 총동원하고 심지어는 모스크바, 북경방송까지 이용 우리 정부에 대한 비방 중상에 광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반독재 투쟁을 북한의 사주로 규정한 것이었다.
 
1975년 자유언론수호에 나선 동아일보가 박정희 독재의 광고 탄압을 받을 때는 문공부 실무자이기도 했다. 동아일보는 1975년 2월 26일 자 기사에서 "2개월째 계속되고 있는 동아일보 광고탄압사태에 대해 문공부 대변인을 맡고 있던 김동호 보도국장은 '나로서는 아는 바 없으며 알 수도 없는 일'이라고 주장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문공부는 영화사와 극장 측에 동아일보에 광고를 내지 말도록 종용했고, 유신체제 홍보를 위해 41개 주요국가에 파견된 해외 공보관들은 동아 사태와 관련 주재국 홍보활동상의 고충을 피력해 오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또한 동아일보 1975년 3월 7일 기사에 따르면 기자협회에서 발행하던 기자협회보가 조선일보 기자 해임 소식을 호외로 발행한 직후로 폐간될 때, 사전에 전화로 폐간을 경고한 것도 김동호 보도국장이었다.
 
1976년 3.1 명동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정부를 대신해 민주화 요구에 대해 비난 입장을 발표했다. 3.1 명동사건은 3월 1일 오후 6시 7백여 명의 신자들이 참례한 가운데 20여 명의 사제가 공동 집전으로 미사를 봉헌한 후 개신교 목사 재야인사들이 서명한 민주구국선언문을 낭독한 민주화투쟁이었다. 함세웅, 김승훈 신부 등 7명의 관련 사제가 전원 구속된 초유의 사건으로 독재체제를 공고히 하던 박정희 유신독재는 성직자 구속이라는 무리수로 지탄을 받는다.
 
그러나 3.1 명동사건에 대해 당시 김동호 보도국장은 박정희 독재정권을 대신해 "종교의식에 편승 악용하여 정부 정복을 선동한 사건이 발생한 것에 유감이고, 반정부 정치세력들이 총화와 안정을 바라는 국민적 여망과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는 헌법 16조의 기본정신을 무시하고 헌법 질서를 유린하는 불법행위를 자행했다"고 비판했다. 
 
한겨레신문 1988년 11월 8일 기사에 따르면 1980년 군사쿠데타와 광주학살로 등장한 전두환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 입법회의에서 언론기본법을 마련할 때 실무작업을 한 5인은 김동호 기획관리실장을 비롯해 허문도 전 청와대비서관, 이수정 전 청와대비서관, 허만일문공부 공보국장, 박용상 판사 등이었다. 언론기본법은 전두환 군사독재의 대표적인 언론통제법이었다.
 
문화공보부 퇴직 후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재직할 때는 1989년 한국영화아카데미 6기 재학생들의 졸업 작품을 사전 검열해 반발을 사기도 했다. 전대협 대표로 방북했던 임수경 가족 등을 소재로 영화 등 3편의 졸업 작품 제작을 막은 것이었다. 당시 장기철(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6기)은 1990년 졸업식 때 상복을 입고 나와 항의문을 낭독하고 김동호 사장의 퇴진을 요구하기도 했다.
 
1991년에는 홍기선(감독)의 첫 작품이었던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를 영화진흥공사 창작지원작으로 선정했다가 며칠 만에 번복하면서 정치적 탄압 논란을 일으켰다.
 

1990년 한국영화아카데미 6기 졸업식에서 모인 학생과 지인들. 당시 영화진흥공사의 검열에 항의한 장기철 등 학생들이 강의실에 창작자유를 써 놓은 칠판 앞에 모여 기념촬영을 했다. ⓒ 장기철 제공

 
하지만 문공부를 나와 1988년 영화진흥공사(현 영화진흥위원회) 사장으로 임명된 이후, 문공부에서 언론 담당으로 있으며 맡았던 '악역'에서는 벗어난다. 물론 한국영화아카데미 검열과 홍기선 감독 탄압은 오점이었으나, 공직 경험을 바탕으로 능력을 발휘해 영화계에 큰 도움을 주는 캐릭터로 바뀐 것이다.

1988년 임권택 감독 <아다다>가 몬트리올영화제 수상 후보에 오르자 현지에서 한국의 밤 행사를 주관했고, 교민들에게 시사회 참석을 요청하며 여우주연상 수상을 측면지원했다. 1989년 모스크바영화제에 임권택 감독 <아제아제 바라아제>가 초청될 수 있었던 것도 김동호가 당시 소련 측 인사와 친분을 갖고 있었던 게 작용한 것이었다.
 
영화인들의 인심을 얻은 대표적인 공적은 1991년 숙원사업이었던 남양주종합촬영소 착공이었다. 정진우 감독은 "역대 영화진흥공사(영화진흥위원회) 사장 중 김동호의 능력이 가장 뛰어났다"며 남양주종합촬영소 건립의 공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1990년 남양주종합촬영소를 건립을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당시 국고지원이 필요했으나 쉽지 않은 상태였다. 유명배우들까지 동원해서 정부 쪽에 요청했지만 불가능하다는 입장만 들을 수 있었다. 그때 영화진흥공사 사장이었던 김동호가 정부 요직에 있던 관료들에게 일일이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다. 예전에 함께 근무한 인연이 있던 인사들이었다.

김동호의 부탁에 당시 정부 예산 담당자가 수백억 예산을 편성하라고 지시하면서 남양주종합촬영소 문제가 풀린 것이었다. 이후 영화진흥공사 사장과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으로 여러 사람이 거쳐 갔으나, 김동호만큼 예산확보 능력을 갖춘 사람은 없었다."

 
정진우 감독은 "1992년 이수정 당시 문화부 장관이 '문화부 차관으로 어떤 사람이 좋을지 떠오르는 인물이 있냐'고 물어와서, 김동호가 관료 출신이라 조직 관리도 능숙하고 일도 잘하지 않냐고 했었는데, 여러 곳에서 좋은 이야기가 있었는지 실제 차관으로 임명됐다"고 말했다.
 
검열 완화한 공륜위원장
 
김동호(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를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모시자고 한 것은 김지석이었다. 이용관은 "당시 정지영 감독 등은 임권택 감독을 추천했는데, 김지석이 김동호 위원장을 추천했다"고 기억했다. 이어 "전양준이 찬성하자 오석근, 박광수도 찬성했다"며 "오석근은 한국영화아카데미 재학시절 김동호 위원장이 영화진흥공사 사장이었던 인연 때문에 찬성한 것 같았다"고 말했다. 모두가 찬성하면서 이용관은 김동호 위원장과 연락해 프라자호텔 약속을 잡게 된다. .
 
당시 김지석이 김동호를 집행위원장으로 적극 추천한 이유는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공륜위원장)으로 있으면서 보인 소신 있는 행동'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이용관은 "김지석에게 추천한 이유를 물었더니 공륜 이야기를 꺼냈다"고 기억했다.
 
검열기관으로 표현의 자유를 제약하던 공연운리위원회(공륜)는 영화계 안팎에서 온갖 비난을 받던 적폐 기관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 요구가 커지던 시기에도 검열의 칼을 휘두르던 구시대의 잔재로 한국영화 발전의 걸림돌이었다.
 
김동호 공륜위원장 재임 시절에도 검열 문제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제기됐다. 그러나 예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면서 개선을 위한 노력이 엿보였다. 김동호는 "영화진흥공사에 있다가 영화를 심의하는 공륜으로 옮겨오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면서 "하지만 심의 역시 영화를 진흥하기 위해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가능하면 문제가 되는 장면들도 그대로 상영될 수 있도록 결정을 내리곤 했다"고 회상했다.
 

영화진흥공사 사장 시절 김동호. ⓒ 성하훈

 
대표적인 것이 1993년 <크라잉 게임>의 검열 최소화, 1994년 수입 금지였던 <데미지>의 개봉 허용, 1995년 <올리버 스톤의 킬러>의 수입 허가 등이었다. <크라잉 게임>은 성기 노출 장면이 잘리지 않았는데, 성기 노출을 금지하고 있었던 당시 규정에서 이례적이었다.
 
김동호는 "영화를 구성하는 정말 중요한 장면이었기 때문에 살려야만 했고,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할 정도로 의미 있는 영화였다"고 설명했다. 비록 수초 분량이 1초 미만으로 짧게 순식간에 스치는 식으로 심의를 통과했으나, 삭제가 안 된 것 자체가 예전 공륜과는 다른 것이었다.
 
심의위원으로 당시 20대였던 김영(제작자. 미루픽쳐스 대표)을 발탁한 것은 파격이었다. 원래는 바리터 출신으로 유학을 다녀온 김소영(영화평론가. 한예종 교수)을 영입하려다 한예종 교수를 맡게 되면서 김영을 선임한 것이었다.
 
바리터에서 여성영화운동을 했고, 1993년 여성영화제 주최와, 충무로 조연출 등을 거친 김영의 등장은 낡은 기관이었던 공륜의 변화를 위해 애쓴 김동호 위원장의 노력을 상징했다, 김영은 공륜이 민감한 결정할 때 김동호 위원장을 적극 도왔는데, "당시 한국영화를 심의할 때는 거의 전운이 감돌았다"고 회상했다.
 
공륜을 바꾸기 위해 애썼던 김동호는 수입을 허가한 <쇼군 마에다>가 논란이 되자 1995년 3월 2일 공륜위원장에서 물러났다. 미국영화지만 일본영화와 다름없다는 언론의 비판 보도가 원인이었다.

당시 일본영화 수입이 막혀 있던 때, 공륜이 사실상의 일본영화 수입을 허가했다는 비판이었는데, 영화제작사, 각본, 감독이 모두 미국인이었고, 주 무대가 스페인이었다. 일본 막부시대가 배경이라는 이유로 이중국적 일본영화라는 주장은 무리가 있었으나, 미련 없이 사표를 낸 것이다.
 
부산영화제 집행위원장을 수락한 김동호는 자신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작품 선정 등 전문성 있는 작업은 이용관, 전양준, 김지석 등에게 일임하고, 영화제 운영에 필요한 예산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영화진흥공사 사장 시절부터 보여준 탁월한 예산확보 능력은 초기 부산영화제가 안착하는 데 큰 힘이었다.
 
폭넓은 인화력과 다양한 인맥을 동원해 예산 마련을 위한 후원 행사를 열어 서울극장 곽정환 대표와 김지미 배우 등 당시 충무로 주류가 선뜻 거액의 후원금을 내놓도록 유도한다. 부산영화제가 국고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김동호의 능력이 발휘된 덕분이었다.
 
공직 사회 구조를 잘 알고 있었기에 당시 문정수 부산시장과 정기적으로 만나 영화제 준비 작업에 대한 결재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했다. 담당 공무원들이 일을 더디게 처리해 영화제 준비에 지장을 받는 상황을 최소화한 것이다.
 
영화운동의 결집
 
부산영화제는 1996년 6월 4일 조직위원회를 출범시키며 본격 준비에 들어간다. 김동호 집행위원장을 필두로 부집행위원장은 영화제 준비 과정에 함께했던 박광수(감독)가 맡게 된다.
 
이용관은 "박광수(감독)가 부산 경성대로 특강을 몇 번 오면서 영화제를 만드는 데 함께하기로 했다"며 "해외영화제 초청을 받고 수상을 하면서 영화제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고, "준비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전양준이 월드시네마 프로그래머를 담당했고, 김지석은 아시아영화 프로그래머를 맡으며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 사무국장은 오석근이었다. 당시 한국영화프로그래머를 맡았던 이용관은 "나는 뭐하면 되냐고 물었더니 박광수가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를 맡으라고 했다면서, 처음에는 그게 무슨 역할인지도 정확히 몰랐다"고 말했다.
 

김지석, 전양준, 박광수 ⓒ 부산영화제 제공

 
영화제 실무를 담당할 스태프는 중앙대, 경성대 등의 영화전공 학생들을 비롯해 독립영화 쪽에서도 충원했다. 서울영상집단 대표였던 홍효숙(전 부산영화제 프로그래머)은 와이드앵글을 담당했고, 얄라셩 대표와 대학영화연합을 거쳐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정미(부산영화제 커뮤니티비프 프로그래머)는 월드시네마 코디네이터 역할이었다. 예술영화 관객 확대에 경험이 있었던 부산 씨네마테크 1/24 대표 양정화(프로듀서. 영화사 해밀 대표)는 자원봉사팀을 이끌었다.
 
1980년 이후 오랜 시간 대학과 충무로, 재야 독립영화, 부산 등에서 구축된 영화운동 역량이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모두 결합한 것이었다. 그리고 1996년 9월 13일, 마침내 1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막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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