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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억 줘도, 이 시 한 줄만 못하다" 백석 닮고 싶었던 이 남자

[인터뷰]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백석이 된 배우 강필석

20.12.03 09:38최종업데이트20.12.03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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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의 증표, 오리 “제가 하면서도 너무 싫어요! 너무 빼고 싶어요. (웃음) 그 상황에 백석이 실제로 오리를 주지는 않았겠죠? 않았을 거예요, 아마. 예전에는 그 신에서 야유가 나온 적도 있어요. 물론 재미있게 쓰인 부분이지만, 다른 사람을 위한 사랑의 증표를 자야에게 주는 거니까. 연출께서도 백석이 마치 임기응변에 능하고, 갈대 같은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그래서 고민을 많이 했고, 너무 많은 의미를 주지 않고 그냥 하나의 에피소드 정도로 여기기로 했어요. 최대한 덜 드러나도록이요. 오리를 부각할수록 자칫 드라마의 흐름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까요.“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 백석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에서
 
백석의 나타샤는 누구였을까.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 영역 문제였다면 나타샤에 밑줄을 그어놓고, '다음 중 나타샤가 가리키는 것으로 옳은 것은?'과 같은 질문에 객관식으로 답을 해야 했을 테다. 하지만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라며 시인이 더러운 세상을 버리고 함께 떠난 나타샤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명료한 정답이 존재할 수 있을까.
 
최소한 자야 김영한에게는, 나타샤는 본인이었다. 백석이 자신을 위해 지어준 시였다. 비록 자야 여사의 일방적인 주장이지만, 증명할 수 있는 증거도 마땅치 않지만, 별다른 무게감 없이 흩어지는 그렇고 그런 말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야 여사가 자신의 평생을 바친 것이나 다름없는 대원각을 부처님께 시주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백석을 기리고 그의 시를 애달파한 그의 삶 자체이다.
 
자야 김영한의 입장에서 쓰이고 전해지는 이야기가 실체적 진실과의 교집합이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를 향해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라고 했던 백석은 분단의 아픔 속에 가족들이 있는 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곳에서 가정을 꾸리며 여생을 보냈다. 그에 관한 기록은 남은 게 별로 없고, 한반도 남쪽에서 그의 이름은 '월북 시인'이라는 이유로 오래도록 지워져 있었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믿어보기로 한다. 백석의 시가 이 이야기들을 엮어내고, 작가의 상상력이 덧대어진다. 홀로 남아 세월을 견디고 있던 자야는 상상 속에서 매번 자신을 찾아오는 백석과 추억을 곱씹는다. 매일 오는 그가 반갑다가도, 눈을 뜨면 사라지는 그가 원망스럽다.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이제 더는 찾아오지 말라고 내뱉어 보지만, 백석이 내미는 손을 차마 거절하지 못한다.
 
자야에게 손을 내미는 백석, 그에게 여전히 아름다우니 아무것도 찍어 바르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백석, 그와 함께 바다에 가자고 제안하는 백석. 멀끔한 양복을 갖춰 입은, 시대를 앞서가던 시인은 정말 어떤 존재였을까. 최소한 자야 김영한에게는 어떤 의미의 사람이었을까. 초연과 재연 그리고 이번 세 번째 시즌까지 백석을 연기해온 배우 강필석에게 물어보았다. 지난 11월 19일 서울 흥인동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담백하게, 시처럼 연기하다
  

▲ 백석을 처음 마주하다 “요즘 학생들은 백석에 대해서 배우지만, 저는 백석을 배운 세대가 아니었어요. 백석 시인 자체를 월북 시인이라고 어렸을 때 배우지도 않았어요. 아예 교과서에 나오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잘 몰랐죠. ‘백석? 이름은 들어봤는데? 그 사람 시가 뭐가 있지?’ 사실, 이 작품하면서 저는 처음으로 이 사람의 시를 보게 됐어요. 시 자체가 되게 특이하더라고요.”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확실히 좀 더 편해진 것 같아요. 리허설하면서 '훨씬 더 담백하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떤 공연이든, 계속 회를 거듭할수록 좀 걸러지는 것 같아요. '이건 재밌긴 하지만, 굳이 필요 없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요. '예전보다 조금 더 담백해진 느낌으로 하면, 그래서 드라마가 조금 더 잘 보이지 않을까?' 힘도 빼고, 여백도 주는 방향이랄까요? 그래서 편해진 것 같아요. (웃음)"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백석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자야의 상상 속에 존재하는 허깨비에 가깝다. 백석을 세 번째로 연기하는 강필석은, 그런데도 이번 시즌에는 무언가를 더하기보다 최대한 '덜어내기'를 택했다. 백석의 시들을 가사 삼아 서정적으로 흘러가는 이 작품에서 그는 무언가를 애써 설명하고 설득하기보다는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에 집중했다.
 
"그렇죠, 연출과도 그런 이야기를 되게 많이 했어요. 자야가 이 사람 시집이 나온 걸 보고 회상하며 시작하잖아요. 기본적으로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니까요. 물론 실제 있었던 일도 있지만, 그 실제를 어느 부분까지 해야 하는지…. 심지어 백석에게는 중간에 시점이 바뀌는 부분도 있으니까요.

'흰밥과 가재미와 나는'을 하는 그 시점은 자야가 생각하는, 회상하는 때이거든요. 그때의 이야기를 계속 펼치다가 갑자기 어느 순간 '어느 사이에'를 부를 때는 '왜 갑자기?' 하는 의문이 떠올랐어요. '갑자기 왜 저렇게 자기 심경을 대변하지?'하는 그 지점이 그냥 하기에는 되게 힘들었어요. '나는 지금 이 사람(자야)이 바라보는 나야? 아니면 실제 나야?'
 
저희 노래가 다 백석의 시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지금 이게 백석의 관점이든, 자야의 관점이든, 사실 그 개념 자체를 명확하게 하는 게 작가께서 쓴 그 의도에 그렇게 부합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어요. 대신 정서의 흐름들, '이 사람의 그 시를 온전히 제대로 하나씩 들려주자' 거기에 더 집중했어요.

'어느 사이에'를 부를 때도 내가 어느 정도 나서서 불러야 하는지, 내가 어느 정도 자기주장을 해야 하는 건지에 대해서는 내려놓았어요. '저 인물이 갑자기 왜 저러지?'라기 보다는 '그냥 이 시에 표현되어 있는 만큼만, 그냥 이 상황을 대변하자'라는 생각으로요. 백석이 아니라 '우리'의 상황이요. 백석도 갈 수 없었고, 자야도 올 수 없었던 상황. 실제로 자야와 백석은 그 이후로 만나지 못했잖아요."

  

▲ 어느 사이에 “노래가 힘들어요. 주장을 많이 하기는 하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어디까지 가야하나 고민을 많이 했는데, 어설프게 주장하느니, 이 시에 담겨져 있다고 내가 생각하는 정서를 담아버리자고 결심했죠. 좀 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거기서 감정을 끝까지 가주지 않으면 드라마가 완성되지 않으니까요. 절정으로서 그때 상황을 대변하는 마음으로 해요.”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실존하지 않기에 무게를 더해 존재감을 더할 수도 있으련만, 오히려 덧셈보다 뺄셈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작품 속에서 시를 노래하는 그는, 그 방법으로 노래하는 시가 되기로 했다. 살아있는 시인과 살아있지 않은 시인 사이를 오가기보다는, 그저 시인이 남기고 자야가 기억하는 시 그 자체를 노래하고 연기하기로 말이다. 담백하고 구수한 말들로 쓰였음에도 세련되고 아름다웠던 백석의 시처럼. 초연과 재연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부분이다.
 
"예전 연출께서 그런 개념 자체를 없앴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좀 어려운 이야기이고, 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건 그냥 어떤 시다'라고요.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야?' 했어요. 마치 '저기 구름 같이 연기해주세요'와 똑같은 주문이잖아요. 내가 시를 어떻게 연기해? (웃음) 이게 현재인지, 아닌지, 그 정도는 우리가 알아야 뭔가 할 수 있지 않겠나 싶었어요.
 
그런데 이 작품은 그 지점이 특이해요. 초연과 재연 때는 잘 모르던 것들이, 공연 하나하나 회를 거듭할수록,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더라고요. '그냥, 시야'라는 말을 점점 더 알겠더라고요. 어렵죠? 제 머릿속에는 정리가 되어 있는데, 말로 하려니 정리가 되는지 모르겠네요. (웃음) 마치 '파란색을 연기해라'와 같은 말을 계속하는 느낌인데…."


두 사람, 바다에 가다
  

▲ 백석이 살았던 시대 “백석은 시인이잖아요. 그 당시에는 시인이라는 직업이 연예인 같지 않을까요? 백석에게서 왜인지 가수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시대의 가수들은 노래를 통해서 당시 사람들과 소통하잖아요. 일제 때는 시인들이 시를 통해서 뜻을 전달했고, ‘민중가요’가 불리던 시기의 가수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백석도 그 시대에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요.”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김영한의 '자야'라는 호는 백석이 지어준 것이다. 이백의 '자야오가'라는 시에서 따온 호칭으로, 이 시의 화자는 전장으로 떠난 낭군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여성이다. 작품 속에서 자야 김영한은 백석과 여러 차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백석이 돌아오기를 기다린다. 하지만 단순히 그 자리에서 기다리기만 하는 존재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자야는 계속 바라보고 있고, 기다리고 있잖아요. 하지만 연출께서 자야가 너무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는 인물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자칫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그렇게만 보이는 건 싫다고요. 실제로 그렇게 기다리기만 하지도 않았어요. 되게 유명한 기생이었고, 예인이었고, 작품 안에서도 '다녀와'라고 과감한 선택을 해주는 사람이잖아요.
 
그 부분에서 자야는 '계속 그렇게 고민하는 너를 만나느니, 그냥 그 여자한테 갔다 와'라고 하는 거죠. 이 여자도 보통 여자가 아니라는 거죠. 돌아오면 너도, 나도 역시 변해있을 테고, 너를 너무 사랑하지만, '지금의 이런 너하고는 만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거거든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야에게 그렇게 '너를 너무 사랑해'라고 이야기했겠어요. 자야 역시도 백석의 진심은 알 수 없었으니까요. 백석도 처음에는 가지 않겠다고 하지만, 자야의 선택에 따르는 거고요."
 

이러한 자야의 주체성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동명의 백석 시가 제목이고, 작품 안에도 백석의 시로 가득 차 있지만, 여전히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주인공은 백석이 아니라 자야이다. 백석을 떠올리는 이도, 백석에게 말을 거는 사람도 모두 자야이다.

백석의 외양과 목소리로 이야기하고 노래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야가 기억하고 바라보는 백석, 자야가 회상을 통해 소환하는 백석이다. 그와 나누는 질문과 답변은 두 사람의 대화라기보다는 자야의 자문자답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바다에 가자는 백석의 제안은, 사실은 자야의 소원이다. 자야가 백석과 닿고 싶었던 곳이다.
 
"백석의 시로 구성되어 있지만, 이 작품은 자야에게서 출발해요. 작품의 중심에는 항상 자야가 있죠. 보이기에는 되게 주체적으로 백석이 '갑시다'라고 하지만, 저는 그 부분이 온전히 자야 혼자 던지는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당신 왜 만주로 안 왔어? 나한테 올 수 있었잖아' '자네가 나 대신 선택한 것들을 봐'라는 말이 백석의 입에서 나오지만, 자야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또 되게 적극적으로 스스로 대변하는 거죠.
 
정말 백석이 이 사람을 원망했을까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요. 결국은 그 신 자체가 완벽하게 자야 혼자 하는 생각과 말인 거죠. 되게 지독한 자기 합리화. 사람이 그렇잖아요. 사람은 자신이 했던 행동이 무엇이든, 그게 맞았다고 주장하고 싶잖아요. 그게 없으면, 그 긴 세월 나의 인생을 그냥 부정하는 느낌이 드니까요. 자야가 후회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너무 후회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그 선택이 나쁘다는 게 아닌데도, 만약 백석에게 갔으면 간 걸 후회했을 텐데도 말이죠.
 
그래서 바다에 가는 건…. 자야가 이 사람과 둘이 되게 가보고 싶지 않았을까요. 백석이 언젠가 '바다에 갔더니 네 생각이 너무 많이 났어. 우리 언제 같이 가보자'라고 했을 테니. 마지막에 떠나는 상황에서 바닷가에 가는 상상을 스스로 해보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자야 여사께서 가보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안에서는 평생 못 가 본 바다에…."
 
 

▲ 자야, 남은 밥 좀 있나? “처음에는 소박하지만 너무 맛있게 먹고, 두 번째는 진수성찬이어도 꾸역꾸역 억지로 밥을 넘겨요. 되게 슬프지 않나요? 자야는 너무 슬픈데, 백석이 밥을 먹는 걸 보고 있는 그 상황이 더 슬프더라고요. 백석은 또 살기 위해서 밥을 먹고 있잖아요.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 쥐어짜는 느낌이에요. 이 사람은 그냥 밥을 먹고 있는 거지만, 사실 자야에게 상처를 준 거잖아요. 정말 배고파서 밥을 달라고 한 것 같지는 않아요. 그 하나로 많은 말이 필요 없어져요.”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지키지 못한 약속, 이루지 못한 소원을 품은 채 자야는 세월의 풍파 속에 꿋꿋이 그 자리를 지켰다. 그와 이별하게 되었어도, 희박한 가능성에 기대 옷을 지어 보내보기도 했다. 혹시나 그가 돌아오면 길을 잃지 않고 자신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며 일했다. 노년의 자야는 왜 백석을 매일 떠올렸을까. 백석을 원망할 법도 한데, 오히려 그가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그를 기다린다.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 노인은 왜 백석과의 추억에 잠겼을까.
 
"가끔 그런 생각하지 않나요? '내가 만약에 죽음을 앞둔 시점이라면, 어떤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을까? 어떤 순간이 나에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일까?' 저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애늙은이같이. (웃음) 백석이라면, 지금 이 순간 너무 행복한 순간이 있었다면, 죽기 전에 '그 순간'을 기억할까? 백석의 입장에서 '나는 누가 제일 보고 싶을까?' 하니 자야의 가장 아름다웠던 때가 '그 순간'이 아니었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만들어주면 되잖아요. 가장 아름답고 힘들고 괴로웠던 순간들이 그때가 될 거로 생각했고, 그 위에 백석 캐릭터를 만들었어요. 백석이 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준 건 분명하니까요."


위대하지 않지만, 위대한
  

▲ 여보, 나 왔어 “처음에도 하고, 마지막에도 하는데…. 마지막에 에필로그 같이 자야의 마음을 딱 안아주잖아요. 그때 자야도 되게 설레겠지만, 저도 되게 설레요. ‘이제 됐습니다’하고 자야가 ‘여승’을 하며 괜찮다고 하는데, 그때 백석이 와서 위로해주는 게 되게 좋더라고요.”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검은 옷을 입고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자야의 음성은 바람에 삭은 것처럼 들린다. 그가 떠올리는 백석은 젊고 훤칠했던 그 시절 그대로의 백석인데, 그를 떠올리는 자야는 시간의 풍파 속에 깎이며 변해간 자야이다. 자야는 고백한다. 죽는 게 두렵다고. 백석은 우리가 향하는 곳이 거기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백석과 함께 걸어 나가며 반짝이던 그때로 돌아가는 자야를 보며, 두 사람이 걸어가는 곳이 진짜 인생의 종착점, 삶의 마지막은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마지막에 자야가 되게 어렵게 '갑시다'라는 말을 하기에 '천국에서 가서 만나자'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저는 오히려 반대에요. 그 부분은 완벽하게 판타지거든요. 자야가 주체인 판타지. 마치 자야의 꿈과 같은? 어디로 가는 거라고 저희가 정하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하면서 제가 받는 느낌은, 이 폭풍이 다 지나가고, 마음의 정리가 다 되는 느낌이에요. 가장 우리가 행복했던 그 순간으로 가는 느낌. 자야가 그전까지 부정했던 것들을 그냥 인정하는 느낌.
 
자야는 그전까지 부정하죠. 백석한테 갔어도 우리는 똑같았을 것이고, 지긋지긋하게 싸우고 헤어졌을 거라고. 하지만 당신이 '나타샤'라는 그 말을 듣고 나서, 그 마지막에는 솔직하게 인정하는 거죠. '나, 너랑 같이 있고 싶었어'라고. 자야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나타샤'였으니까. 그러면 제가, 백석은 그냥 '그러면 우리 같이 마가리에 살자'라고 말해주는 거죠."
 

따져보면 그렇게까지 가슴이 요동칠 이야기가 아닐 수 있다. 백석에게 자야는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도 아니었고, 그가 지은 모든 시가 자야를 위한 시도 아니었다. 자야 역시 지아비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애틋하다. 백석의 시들과 함께 잔잔히 치던 파도는 두 사람이 바다에 닿을 때쯤 관객의 마음도 그 자리에 이르게 한다.
 
이 작품이 감동적인 건 이 이야기가 역사적 진실과 맞닿아 있어서도 아니고, 이 사랑이 세기의 위대한 사랑이어서도 아니다. 다만, 누구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후회하고, 차마 고르지 못한 다른 선택지에 대해 안타까워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반짝이는 가치는, 그래서 백석과 자야가 아니라 우리 인생에 근거한다.
 
"사실 이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 자야 김영한 여사의 인터뷰잖아요. '돈 안 아까우냐'는 질문을 받고 '1000억을 줘도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라고 하는…. 그 한 문장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이 작품도 그만큼의 값어치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희 이야기가 별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겠죠. 하지만 애초에 위대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배우들과 그런 이야기도 했어요. '우리 되게 위대한 사랑은 아니다'라고. 너무 그냥 수수한 사랑이지만,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사랑 이야기요. 그런데 사실은 그게 되게 위대한 거잖아요?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그런 이야기가 있으니까요. 이 작품은 자야의 인생 이야기이고, 사랑 이야기인데, 자야는 만주로 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고, 그걸 후회하고 있잖아요. 물론 그때 만주로 가는 걸 선택했어도 후회했겠죠.
 
다만, 이 사람이 말하고 싶은 건, 백석의 시집을 보면서 '나는 이때가 참 좋았다'라는 거니까요. 그게 인생이잖아요. 그래서 어떤 역경을 이겨내는 위대한 작품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신 그냥 인생에 대한 이야기면 좋지 않을까, 충분하지 않을까 싶었죠."
 

마지막을 얼마 남기지 않은 자야에게 백석이 찾아와 찬란한 기억을 되새기고, 환한 슬픔을 선물하고 갔다. 자야는 백석을 다시 만나지 못했지만, 자야 자신의 삶을 계속 살아갔다. 그 삶의 굽이굽이마다 그는 백석과 다른 방법으로 재회할 수 있었고, 그렇게 살아온 인생에 큰 회한을 남기지 않았다. 배우 강필석의 백석도, 그를 지켜보는 관객들에게 그렇게 기억될 것이다. 비록 이번 백석이 그의 마지막 백석이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저는 정말 마지막 시즌입니다. 이제 저는 나이가…. (웃음) 백석이 그렇게까지 나이를 타는 캐릭터는 아니지만, 타기는 타요. 어느새 초연한 지 6년이 지났더라고요. 배우가 똑같은 걸 세 번 한다는 게, 관객들에게 새로울 것도 없을 것 같고….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진짜 고민을 많이 했어요. 계속 '나는 할 만큼 한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에는 사실 완전히 새로운 시즌에 가깝잖아요. 작품은 했던 작품이지만, 무대도 다 바뀌고, 글을 쓴 작가가 연출을 맡게 됐고, 초연 때 피아니스트가 음악감독을 맡게 되고, 그래서 기대가 됐어요.
 
박해림 연출은 초연‧재연할 때 작가로서 의견을 많이 내지 않았어요. 무조건 '다 좋아요'라고만 하고…. (웃음) 분명히 본인이 쓴 대로만 하고 있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오히려 심리적인 부담이 덜했어요. 막상 하고 나니 이번 시즌에 참여하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래도 마지막을 하는데, 할수록 더욱더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어서…. 이번에 하면서 '참, 너무 좋은 작품이구나'라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어요. 그래서 이 작품이 제가 없어도 계속 관객분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으면 좋겠고요. (웃음) 백석과는 회차마다 계속 이별 인사를 잘하고 있어요. 이래놓고 또 돌아와? (웃음) 다음에는 이 작품에 기여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겠죠."

 

▲ 앞으로의 계획 “저 되게 일 줄인 거잖아요! 이제 겹치기를 잘 안 하니까요. 되게 많이 줄인 거예요. 체력이 안 돼요, 이제. (웃음) 너무 힘들고. 그리고 ‘이렇게 해서 뭐가 좋나’하는 생각도 들고요. 한 5년 동안 일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요. 그게 또 하고 싶은 것과 해야 되는 것들이 공존해서…. 그런데 그렇게 하는 건 너무 힘들더라고요. 작품에도 힘들고, 저도 힘들고. 앞으로는 조금 쉬어가더라도 할 수 있는 것에 더 집중하고 싶어요.” ⓒ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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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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