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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다 무엇도 제대로 못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283] <페뷸러스>

20.11.11 10:45최종업데이트20.11.1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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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페뷸러스> 포스터 ⓒ 싸이더스

 
앙드레 말로가 말했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고. 해를 바라보다 마침내 해와 같은 외양을 가진 해바라기처럼 사람도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면 자연스레 그를 닮아가게 마련이다.

묘지에서 저잣거리로, 저자에서 다시 서당 근처로 이사한 맹자 어머니도 자식에게 더 나은 것이 스며들길 바랐을 것이다. 곡소리나 이문보다는 더 귀하고 중한 것에 관심을 갖기를 말이다. 묘지 근처에서 자랐다고 이문을 모르고 저자에서 살았다고 가르침을 모르는 건 아니겠으나, 저도 모르게 스며드는 게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어쩔 수 없이 묘지 근처나 저자에서 자식을 길러야 했다면, 맹자 어머니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도 경계하도록 했을 것이다. 상을 흉내 내고 장사를 흉내 내는 대신에 글을 읽고 선현의 가르침을 배우도록 했을 것이다. 길바닥에 핀 해바라기가 길바닥 대신 해를 닮아가는 것처럼.

가끔은 안타까운 영화를 본다. 닮지 않아야 할 것을 닮고 흉내 내지 않아야 할 것을 흉내 내는 영화 말이다. 의도했다면 달리 보아야 하겠지만, 저도 모르게 그리 했다면 바로잡긴 이미 늦었다.
 

영화 <페뷸러스> 스틸 컷 ⓒ 싸이더스

 
닮지 말아야 할 것과 너무 닮아버렸다

<페뷸러스>는 닮지 말아야 할 것을 닮은 영화로 보인다. 인스타그램 등 SNS를 다루다가 영화 전체가 '인플루언서'의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여성과 우정, 페미니즘, 청춘, 취업준비생, 성장, 꿈, SNS, 인플루언서, 관종(관심을 바라는 사람을 가리키는 인터넷 신조어) 같은 것이 소재로 등장하는데 어느 하나 제대로 다루지 않는다. 마치 유명인의 인스타그램처럼 스쳐지나가 깊이 남지 않는다.

주인공은 사회초년생 로리(노에미 오파렐 분)다. 유명잡지 <톱>에서 인턴으로 일하는 그녀는 편집장이 인플루언서들에게 지면을 내주겠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한다. 제가 그렇게 바라던 자리를 단지 유명인이란 이유로 내준다는 게 마땅치 않아서다.

로리에겐 단짝친구 엘리자베스(모우니아 자흐잠 분)가 있다. 교향악단 오디션을 보고 다니지만 매번 떨어지기만 하는 엘리자베스는 페미니스트다. 엘리자베스와 로리는 거리에 나붙은 여자 연예인 사진마다 스티커를 붙이는 게 일상이다. 남성들의 세상에서 성을 상품화하고 대상화되기를 선택한 이들을 비판하고 싶어서다.

영화는 로리와 엘리자베스 앞에 인스타그램 유명 뷰티 인플루언서 클라라(줄리엣 고셀린 분)가 나타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클라라와 함께 있는 사진을 올리는 것만으로 온라인에서 인기를 얻는 로리를 엘리자베스는 못마땅한 눈으로 지켜본다.

클라라를 폄하하던 로리는 어느새 클라라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더 예뻐 보이려 치장하고 관심을 끌기 위해 옳지 않은 행동도 저지른다. 클라라와 로리, 엘리자베스가 제 나름대로 좌충우돌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카메라가 곁에서 뒤따른다.
 

영화 <페뷸러스> 스틸 컷. ⓒ 싸이더스

 
온갖 태그가 덕지덕지 붙은 게시물처럼

영화는 좌충우돌 성장기이자 꿈과 현실을 다룬 청춘드라마다. 젊은 여성들의 우정을 마치 하이틴드라마처럼 그렸다. SNS를 중요한 소재로 활용하며 세태를 비판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이 모두가 영화의 정체성인 것 같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이중 무얼 정체성이라 불러야 할지 막막한 심정이 된다.

영화는 설득되지 않는 전개의 연속이다. 클라라가 페미니스트가 되고, 로리가 주변 친구들에게 잘못을 하고, 클라라가 로리의 사과를 받아주고, 그밖에 영화에서 중요하다고 불러도 좋을 많은 선택들이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벌어지고 금세 지나갈 뿐이다.

생각해보면 SNS가 꼭 그렇다. 인기를 끌 법한 온갖 태그를 가져다붙여도 무엇이 진짜 태그할 만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오래 보고 깊이 생각하는 대신 엄지손가락 하나로 휙휙 하고 지나친다. 분명히 이야기했지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이나 다르지 않다. 어차피 지나가면 누구도 돌아보지 않을 테니까.

SNS같은 영화라고 생각했다. #여성 #우정 #페미니즘 #청춘 #취준생 #성장 #꿈 #SNS #인플루언서 #관종 같은 태그를 잔뜩 가져다 붙여도 이상하지 않지만 무엇하나 제대로 다루지 않은 그런 영화 말이다.

돌아보면 흔한 잘못이다.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다 어렵게 이야기하고 지루함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스스로 지루해지는 일처럼 말이다. 그래서 더욱 경계했어야 했다. 제가 비판하는 것과 비슷해진다는 건 제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방증이니까.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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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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