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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받고자 작가가 된 남자... 슬픔은 그렇게 시작됐다

[넘버링 무비 186] 영화 <마틴 에덴>

20.10.31 12:26최종업데이트20.10.31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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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마틴 에덴> 메인포스터 영화 <마틴 에덴> 메인포스터 ⓒ 알토미디어(주)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지난 3월, 영국의 유명 영화 잡지 <사이트 앤 사운드>(Sight & Sound)를 통해 봉준호 감독이 극찬한 작품이 하나 있었다. 미국 출신 잭 런던의 원작 소설을 각색한 영화 <마틴 에덴>이다. 그는 이 작품을 두고 "지난 10년 간 베스트 영화 중 하나"라고 설명했으며, 영화를 연출한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 역시 자신이 주목하고 있는 20인의 감독 중 하나로 손꼽았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오픈 시네마(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신작 및 국제적인 관심을 모은 화제작을 초청한다)에 선정되어 공개된 바 있는 이 작품은, 주연을 맡은 배우 루카 마리넬리에게도 베니스국제영화제의 남우주연상에 해당하는 볼피컵을 선사하며 세계적인 관심과 주목을 이끌었다.

영화는 20세기 중반의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선박 노동자 마틴 에덴이 상류층 여성 엘레나와 사랑에 빠진 뒤에 그 사랑을 위해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한 원작의 내용을 이탈리아 나폴리로 옮기고, 19세기 후반의 내용을 1950년대로 가져오면서도 작품성을 잃지 않은 작품으로 극 연출과 다양한 영상의 다큐멘터리적 활용이 함께 돋보이는 작품이다. 연출을 맡은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루키노 비스콘티,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등 유명 감독들의 뒤를 이을만한 감독으로 여겨지고 있다.
 

▲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 알토미디어(주)


02.
마틴 에덴은 남자의 이름이다. 11살 때부터 배를 타기 시작해 선박 노동자의 삶을 살아온 그는 잘생긴 외모에 주먹까지 잘 썼다. 그를 쳐다보는 여자들은 모두 그의 외모에 반했고, 일부러 싸울 일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함부로 덤벼드는 이들도 없었다. 누나와 매형의 집에 얹혀 살면서 집세도 제대로 가져다 주지 못하고, 초등학교 졸업도 마치기 전에 공부에서 손을 놓은 인생이었지만 세상에 별로 두려울 것이 없는 삶을 그는 살아 왔다. 원래 그가 살던 세상에서는 그랬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사람의 인생이 크게 변하는 때가 있다. 현재에는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꿈을 꾸게 될 때도 그 중 하나다. 그 변화가 어떤 방향에 대한 것인지는 아직 이야기 하지 않는다. 꿈을 꾸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꿈을 향해 나아갈 때, 그 꿈에 자신의 욕망을 투영할 때 일어난다.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을 때 말이다.

우연히 엘레나의 동생을 위험에서 구하게 된 마틴은 그의 집에 초대받게 된다. 그 곳에서 엘레나를 만나게 되고, 당연하게도 그녀와 첫 눈에 사랑에 빠진다. 지난 밤에도 이름 모를 여자와 하룻밤을 함께한 후지만, 여기에서 엘레나에게 느끼는 마틴의 감정은 언제나 주변에 있었던 '아주 값싸고 흔한 사랑'과는 다르다. 함께 가도 되느냐고 묻게 될 정도로 큰 저택과 한 눈에 보이는 고결함과 우아한 아름다움. 미술과 음악, 문학을 넘나드는 지성에 그는 전에 없이 압도되어 버리니까.

함께 식사를 마친 뒤, 그는 그녀에게 말한다.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 당신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싶어요"라고. 엘레나는 마틴에게 두 권의 책을 빌려준다. 하지만, 마틴은 그 책이 의미하는 바가 사랑인지, 계급의 상승인지, 진정한 꿈의 시작인지 알지 못한다. 그는 두 권의 책을 빌리지 말았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지, 자신이 무엇에 욕망을 품고 있는지 제대로 알기 전까지 말이다.
 

▲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 알토미디어(주)


03.
이제 시작되어 버린 마틴의 욕망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제 더 이상 선박 노동자가 아닌 작가가 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이다. 하지만 그 마음은 초조하고 성급하다. 그 내면의 사정까지 깊이 알아차리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그 마음의 시작점이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엘레나처럼 되고 싶은 욕망'이기 때문이다. 엘레나가 가진 격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함. 그는 제대로 된 정규 교육을 받는 길 대신 세상에 이미 나와 있는 책들을 제 뜻대로 해석하고 자신이 바라본 세상을 거침없이 표현해 내기 시작한다.

물론 그의 사정에도 이해는 간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 돈 걱정없이 자란 엘레나와 달리, 그는 지금 당장 내일을 사는 것도 빠듯한 사람이다. 하루 빨리 '격'으로서의 자격이든, '작가'로서의 자격이든, 무엇이든 빨리 획득해야 하는 이유가 비단 사랑하는 여인을 잃지 않기 위함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여기에, 학교를 다니지 못한 과거도 족쇄가 되어 발목을 잡는다. 내키지는 않지만 수련 없이는 제대로 된 직업적 소양을 쌓을 수 없다는 그녀의 말에 대학의 문도 두드려 본다. 그 일로 인해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이 단순히 상식이 떨어지는 선박 노동자라는 사실뿐이지만.

사실, 그가 작가가 되길 바라게 된 것 또한 하나의 우연처럼 여겨진다. 만약 그에게 주어진 것이 책이 아닌, 이젤과 붓이었다면 화가를 꿈꾸게 되었을 것이고, 피아노와 악보였다면 연주가를 꿈꾸게 되지는 않았을까? 다시 말하자면, 그 시점의 마틴은 '자신이 무엇이 되길 바라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그것뿐이었기에' 그 길을 꿈꾸게 된 것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삶에 엘레나라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 우연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04.
스쳐 지나가는 우연에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사람은 없다. 잘 다듬어진 채로 완성되어 세상에 나온 우연을 우리는 훗날 뒤돌아 보며 다행이라고 말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우연은 신기루와 같으니까. 그리고, 불행은 그 신기루 같은 우연에 매달린 사람들에게 찾아온다. 에덴의 불행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과 격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우연, 그 우연의 사랑을 받게 된 우연, 그리고 작가의 길을 꿈꾸게 된 우연. 세상이 원하는 표현이 아닌 자신의 표현으로 써 내려간 습작들을 엘레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모든 습작들은 반송되어 돌아온다.

이 무렵부터 그는 스스로를 조금씩 잃어간다. 자존심에 그녀가 제안하는 일자리도 거절하지만 식료품 가게의 외상은 점점 커져만 가고, 그녀와 함께 하기 위해 그녀와 떨어져 지내야 하는 시간도 늘어나기만 한다. 그런 마틴에게 엘레나는 현실적인 생계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꺼내지만,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사랑이라는 조악한 단어로 변명하며 자신이 바다로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녀에게 있다는 말까지 내뱉는다. 아이러니하기도 하지, 아무 부족함 없이 자랐을 그녀가 그의 생계를 걱정할 때까지도 그는 꿈만 안고 산다.

꿈꾸지 않고 삶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던 마리아 아주머니의 말이 선명하게 자국을 남기는 이유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틴은 엘레나의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온갖 무시를 당하게 된다. 그녀가 지켜보는 바로 앞에서.
 

▲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 알토미디어(주)


05.
배우지 못한 자의 만용인지, 바다를 떠돌며 살아온 자의 기개인지는 몰라도 브레이크를 잃어버린 채 내달리기만 하던 그에게도 보이지 않는 벽에 크게 부딪혀 깨지는 순간은 찾아온다.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한 자의 자존심이 무언가의 더미 위에 올라선 자의 콧대를 인정하지 못하는 순간이다. 애초에 자신이 뱉은 "당신처럼 되고 싶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마틴에게는 시기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한 번쯤 꼭 겪게 될 일이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그 배경을 스스로 깨버리고 만다. 부와 명예를 성취한 자들에 대한 반감.

그렇다고 해서 그가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거나 사회주의에 물들어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를 등지고자 하는 인물도 아니다. 되려 사회주의를 주창하는 이들이 모인 무대에 올라 특정 이념을 따르며 개인을 배격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좋게 이야기해서 중도를 걷는 사람 정도로 볼 수도 있겠으나. 그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자 하기 보다는 양 쪽 모두를 깨부수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 어쩌면,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이기에. 또, 속하고 싶지 않은 것이기에.

이제 모든 것은 변해버렸다. 그를 떠받치고 있던 사랑과 꿈과 격. 서로 긴밀하게 얽혀 있던 세 가지 가운데 격을 지지하고 있던 배경은 스스로 차버리고 말았고, 꿈이 이루어지기는 여전히 소원하기만 하니 홀로 남은 사랑 또한 버틸 재간이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두 기둥이 무너진 위태로운 이 남자는 어둠 대신 희망을 쓰는 게 어떻겠냐는 엘레나를 빈민가 곳곳을 강압적으로 끌고 다니며 자신을 지키려는 사랑의 온기마저 차갑게 꺼뜨리고 만다.

"이런 게 진짜야. 진짜를 쓰는 게 뭐가 부끄러워."
 

▲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영화 <마틴 에덴> 스틸컷 ⓒ 알토미디어(주)


06.
결과적으로 마틴은 직업적 성공을 성취하고 만다. 유명 작가가 되었고, 그 누구보다 돈도 많이 벌었다. 이제 더 이상 매형에게 무시 받지 않아도 되고 예전처럼 다 쓰러져 가는 집에서 살지 않아도 되고 작은 식료품 점에 외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그렇게 비난했던 '격이 높은' 이들과 같은 공간에서 비슷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 정도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마틴은 더 이상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그 자리에 앉기 위해 그는, 자신이 지나온 길 위의 모든 것들을 태워버리고 말았으니까. 풀려버린 두 눈과 누렇게 변한 치아, 안쪽으로 둥글게 말려 꺾여버린 어깨. 장대한 기골을 자랑했던 그 선박 노동자는 이제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여전히 엘레나처럼 말하고 생각하고 싶다고 말할 뿐이다.

마틴이 처음 엘레나를 만나게 되던 순간이 다시 생각난다. 이젤 위에 놓인 그림을 보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에서 보니 얼룩과 다름없어 보인다고. 나는 그 순간의 마틴이 되어 한 편의 그림을 본 것만 같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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