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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월급쟁이로 살아가냐고? 세 명의 여자가 답했다

[리뷰] 이상스레 '슬픈'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20.10.28 17:19최종업데이트20.10.29 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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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그룹 영어토익반> 포스터. ⓒ 롯데엔터테인먼트

 
87000원과 2500000원.

내 기억 속의 자리한 1990년대 풍경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무렵. 남해의 작은 섬에서 경상남도 마산으로 온 고졸 여성 노동자를 만났다. 87000원은 그 친구의 월급이었다. 잔업과 특근까지 했음에도. 그 돈은 일당이 아닌 한 달치 임금이었다.

250만 원은 같은 해 KBS 뉴스에 등장한 이른바 '압구정 오렌지족'의 한 달 용돈이었다. 공중파 방송사 기자의 인터뷰에 응한 그 아이가 말했다. "아버지가 제가 달라는 돈은 언제나 주니까요."

인류가 계급을 만들어 유지하면서부터 세상엔 '평등'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좋다. 그럴 수 있다. 그럼에도 문제는 그 '계급'이 자신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이마에 새겨진 '주홍 글씨'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누구도 그 평등을 벗어난 계급적 한계에 도전하지가 쉽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다. 내 옆집에 살던 A는 1989년 중학교 모의고사 성적이 전국 2.5%였음에도 대학에 가기 힘든 '여자 상업고등학교'로 진학했고, 그 아이의 친구였던 아이는 울면서 고교 과정을 무료로 가르치는 공장에 갔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수학 공식과 영어 단어를 외웠다. 누구도 원하지 않던 가난 탓이었다.

우리는 왜 월급쟁이로 살아가는가?

가난은 사람의 기를 죽인다. 한 달에 겨우 87000원을 벌면서 자신보다 30배의 돈을 가져가는 사람에게 대들기가 쉽지 않다. 그게 '계급'이다. 그 상황에 접해보지 않은 이들은 엄연한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가난에 의한 주눅은 치유도 어렵다.

그럼에도 여기 '용기'를 가진 월급 87000원의 여성들이 있다. 용기가 발현된 사건은 아주 단순하다. 그렇게 시작된 그들의 용기는 세상을 바꾼다. 자그마치 1억 원이나, 10억 원을 가진 사람들에 관한 두려움을 떨친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아무 것도 가지 못한 사람들이, 세상 모든 것을 가진 사람에게 안간힘을 다해 저항하는 모습을 아프게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온 지난 20세기를 아프게 반추한다.

어떤 일류대학 졸업자보다 명료하고 정확하게, 요즘 말로 '쿨 하게' 회사 일을 처리함에도 겨우 '대리'라는 직함을 달기 위해 새벽부터 출근해 영어 수업을 들어야 하는 '고졸 평직원'들. 누구도 그들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부자와 빈자를 고정된 연혁으로 봤던 시대. "정말 그런 때가 있었어요?"라고 묻는 MZ세대도 있을 듯하다. 그 질문에 관한 답은, "네. 있었어요. 불과 20년 전에요"다. 

아무도 관심 기울여 보지 않는 하찮은 일을 하고 있음에도 그 일의 '바깥'과 '본질'을 보려 하는 고아성(이자영 역), 박혜수(심보람 역), 이솜(정유나 역)의 열정은 우리가 '왜 직장을 다니며 자존심을 꺾고, 월급쟁이로 살아가는가'에 대한 답을 들려준다.

자본은 열정 '뜨거운' 그들을 배척했지만, 그들은 '차가운'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회사를 사랑했다. 그래서 잘못된 회사의 시스템에 저항한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배우들. 1990년대 고졸 여성 사원을 연기한 그들. 그로부터 30년. 세상은 인간이 살만한 세상으로 바뀌었을까? ⓒ 롯데엔터테인먼트

 
이 영화의 해피 엔딩이 마냥 즐거울 수 없는 이유

영화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의 스토리는 간명하다. '악'으로 설정된 거대 기업의 후계자와 '빼먹을 건 빼먹고 재빨리 도망치는' 다국적 자본을, '선의'를 가진 고졸 여성 직원들이 뭉쳐진 힘으로 막아 낸다는 이야기다.

통쾌하고 시원하다. 그러나, '영화'가 아닌 '현실'에선 어떤가? 그걸 생각하면 너나없이 마음 아프다.

고졸 여성 직원을 미국 유명 대학을 졸업한 CEO보다 아끼는 재벌은 한국에 없다. 세상 어떤 사업주도 스물여덟 살 평직원의 진의를 읽어내려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래서 역설적으로 이 영화는 빛난다.

카타르시스(Catharsis)는 현실이 아닌 예술 또는, 문학적 상황에서만 발현되는 것. '가난한 노동자'가 '돈 많은 자본가'를 이긴다? 현실에선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나는 왜 극장 객석에서 울컥하며 슬퍼했을까. 영화는 '현실'이 아닌 '환상의 유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보는 내내 2020년이 서러웠다. 1990년대가 그랬듯. 30년의 시간은 아무 것도 바꾸지 못했다.

아직도 어디서엔가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열아홉 청년들이 죽고 있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낡은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는 어두운 공장에서 말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들이여, 죽지는 말아라. 누구도 자본의 폭주를 막을 수 없고, 태어났으니 아무도 '자본의 폭주기관차'에서 내릴 수 없지만. 죽음이란 '문제의 해결'이 아닌 '존재의 절멸'일 뿐이니. 눈물 닦고 함께 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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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등의 저자. 경북매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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