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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파로 폐허된 국회 앞에 '평화와 번영의 상' 남겨둔 이유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제작기⑤] 스태프 1 - 질투는 나의 힘

20.09.18 19:34최종업데이트20.09.18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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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1일은 tvN 드라마 <60일, 지정생존자> 첫 방송 1주년이었다. 하지만 같이 모여 담소를 나눌 수 있는 2020년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대신, 몇 가지 기록을 남겨 본다. 더 잊기 전에, 더 잊혀지기 전에.[기자말]

▲ 60일, 지정생존자 전체 스태프 사진 세트 마지막 날 촬영 ⓒ tvN

 
드라마 연출은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모든 구상과 비전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성취된다. 대본은 작가가, 연기는 배우가, 촬영도, 미술도, 음악도, 모두 그렇다. 연출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열심히 말하고, 읽고, 보고, 듣고,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 젓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이 달라진다. 이 점이 연출에게 가장 어렵고 고통스럽다.

연출이 조율하고 통제할 수 없는 NG들이 모여 이야기의 세계를 돌이킬 수 없이 무너뜨리면 어떻게 하나. 나의 무심한 대답 한 번이 잘못 해석되어 치명적인 오류를 야기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서 이 일은 끊임없는 노심초사와 조바심의 연속이다.

하지만 연출이 직접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이야 말로, 이 일에서 가장 큰 감동과 보람을 예비하고 있다. 같이 작업하는 동료들을 통해 연출의 비전을 넘어서는 것들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나는 '꽃'을 말했을 뿐인데, 떠오르는 태양의 빛을 받고 새벽에 머금은 이슬이 아직 맺혀 있는 꽃잎과 싱그러운 풀잎, 또렷한 새소리와, 그 새가 꽃 줄기를 박차고 날아가며 남기는 진동으로 땅에 이슬방울을 떨군 꽃 모양이 내 눈 앞에 나타난다고 상상해보라. 그래서 잊고 있던 희망에 찬 어느 날 아침의 정서가 기어이 마음 속에 떠오른다면, 이 감동과 행복을 달리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물론 늘 이렇게 행복 자판기 같이 일이 진행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순간을 머릿 속에 그리며 각자의 능력을 발휘해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는 과정은 뿌듯하다. < 60일, 지정생존자 >에는 그런 뿌듯한 순간이 많았다. 그리고 그 순간마다 '직접' 할 수 없는 나는 '직접' 해내는 스태프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그들이 직접 해내는 순간의 성취감을 상상하고 부러워하는 일이, 내 작업의 동력이었다.

프리프로덕션
 

▲ 무너진 국회 <60일 지정생존자> ⓒ tvN


사전 작업은 공간을 상상하는 일로 출발했다. 폐허가 된 국회의사당은 이 드라마의 핵심 이미지였다. 무너진 신전. 그런데 실제 국회의사당은 그 앞 정원과 더불어 미디어를 통해 체감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그 크기를 오픈 세트로 그대로 재현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했다. 무진(지진희 분)이 국회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폭파로 인해 다들 경황이 없어 국회 앞 정원까지는 통제 받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으리라고 가정했다. 그리고 국회 정원 중앙 분수대 너머까지를 오픈세트로 만들기로 했다. 실제 국회 분수대에는 큰 팔각 기둥 위에 동상이 서있다. '평화와 번영의 상'. 새를 날리려고 하는 희망찬 여성의 모습이다. 폐허가 된 국회 앞에 남은 평화와 번영이라는 아이러니가 전달되었으면 했다.

드라마의 상징인 국회의사당을 시작으로 전체 공간에 대한 상상이 이항 미술감독님의 디자인 아래 하나씩 조율 되며 현실이 되어갔다. <파트너>(KBS, 2009) 때 처음 만났던 선배였고 <천명>(KBS, 2013) 작업을 같이 했었다. <하얀거탑>, <미생>, <시그널> 등, 감독님의 미술은 품위있고 담백하게 이야기를 받쳐주곤 했다. 우린 < 60일, 지정생존자 >가 제작에 들어가기 전부터 종종 서울의 이곳 저곳을 걸으며 만들고 싶은 공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넷플릭스의 <더 크라운>처럼 품위있고 우아한 분위기가 드라마에 담기길 바랐다. 
 

< 60일, 지정생존자 > 속 대통령 집무실 ⓒ tvN

< 60일, 지정 생존자> 스틸 컷 ⓒ tvN


한국에서 대통령 집무실을 찍고자 하면 합천에 있는 청와대 세트장을 가거나, 직접 지어야 한다. 그런데 대통령 집무실이 주요 공간으로 계속 나올만한 이야기가 드물기 때문에 대개는 합천에 내려가서 촬영하는 것을 택하게 된다. 하지만 우린 매번 내려갈 수 없고 또 주요한 장소였기에, 세트로 다시 구현했다. 실제 대통령 집무실을 기본으로 하되, 평면도와 구조, 가구 등에 있어서 조금씩 변화를 주었다. 격자 무늬 미닫이 문을 경계로 접견실을 마련한 것이 한 예다. 회의 탁자 옆에도 추가 공간을 확보하고, 창문도 빛과 앵글을 설계하기에 비교적 용이하도록 조절했다. 한국 영화 드라마에서 표현된 대통령 집무실들이 대체로 비슷비슷한데 < 60일, 지정생존자 >에선 어딘지 모르게 다르게 느껴졌다면, 실제로 다르기 때문이다.

청와대 여민관 지하벙커는 여러번의 전체 스태프 회의 끝에 나온 디자인이다. 미드 <웨스트 윙> 제작진이 자료조사 차 실제 백악관 벙커를 견학했는데, 생각보다 너무 소박해서 드라마에선 좀 더 화려하게 보이게끔 디자인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백악관에서 벙커를 증축할 시 미디어에서 보여준 디자인이 역으로 참고가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도 여러 공관 시설을 견학 해보면, 한 시설이 얼마나 으리으리한가는 그 시설의 중요도 보다는 최신 여부에 달려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중요한 시설일수록 운영을 중단하고 개축하기 어렵기 때문에, 의외로 소박한 옛 모습을 오래 유지하기 쉽다. 이러한 역설은 벙커의 인원에 대해서도 해당하지 않을까? 사람이 많아질수록 긴밀한 대화는 불가능하다. 정확하고 신속한, 그러면서도 보안이 유지되는 결정을 위해선, 벙커룸에 모이는 인원을 제한하는 것이 더 그 공간의 권위를 높이지 않을까. 그렇게 최종적으로 벙커 디자인이 정리되었다. 심리적 압박감을 위한 낮은 천장, 벙커로 들어가기 위해 상승하는 이미지를 위한 계단, 스크린과 유리막의 이단 구조를 통한, 회의 공간에 비해 탁 트인 상황판과 스태프 공간. 제작비의 한계 때문에 세트가 작아진 게 아니냐고 물어보는 시청자분도 있었는데, 꼭 그렇지는 않다. 전체적으로 최초의 설계보다 줄여가야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청와대 벙커는 규모보다는 심리적 밀도를 선택한 디자인이었다.
 

< 60일,지정생존자 > 속 벙커룸 ⓒ tvN


프로덕션

촬영이 시작되면 연출 이상으로 중요한 현장의 선장이 바로 촬영 감독이다. 영화 감독의 대표적 이미지 중 하나는 카메라 뷰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실제 현장에서 연출이 뷰파인더를 들여다 볼 일은, 인상적인 기념사진을 찍고 싶을 때를 제외하면 거의 없다.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것은 촬영 감독의 몫이다.

그 행위가 갖는 상징성 만큼이나 촬영감독은 실제로 현장을 지휘하고 통제한다. < 60일, 지정생존자 >의 촬영감독은 영화 <명량>, <끝까지 간다>, <터널>의 김태성 촬영 감독님이다. 난 감독님을 '우리 드라마를 구하러 온 귀인'이라고 불렀다. 배우의 동선을 존중하며 힘있게 움직이는 감독님의 카메라 워킹에 반했다. 제작 과정에서 뜻대로 안 되는 많은 일 때문에 상심하게 되어도, 늘 이 촬영팀과 배우팀과 같이 새로운 씬을 찍으러 간다고 생각하면 기운이 났다.

렌즈는 애너모픽 렌즈, 화면비는 2.35:1의 시네마스코프다. 좌우로 많은 인물이 나란히 서야하는 경우가 많은 이야기의 특성을 생각했다. 클로즈업도 많이 들어올 텐데, 위 아래를 잘라 클로즈업 대상만을 부담없이 집중해서 보게 하면서 좌우 비율을 통해 구성미를 주기에도 좋을 것 같아 선택했다.

또 TV물의 특성상 방송 중에 종종 좌우 상단과 하단에 여러가지 광고성 자막이 깔리게 될 텐데, 2.35:1이 그 광고 자막의 간섭을 조금 덜 받아 몰입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 화면 비율에 대해 마음 먹을 때까지만 해도 2.35:1은 TV에선 거의 쓰지 않는 비율이었다. 화면을 꽉 채우지 않으면 아무래도 TV 크기를 손해보는 것 같은 느낌을 시청자들이 받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TV는 이미 충분히 크고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선 2.35:1 비율을 채택한 작품이 워낙 많아서, 살짝 식상해져 도로 16:9 사이즈를 채택하는 작품이 많아지는 것 같다.

김태성 감독님과는 조연출 때부터 만나면 더 좋았을 걸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감독님이 촬영팀, 조명팀, 그립팀과 나누는 기술적 이야기까지 다 귀담아 듣고 싶어서. 그런데 아무리 촬영감독님이 업계 선배여도, 연출자는 촬영의 방향을 요청하고 OK와 NG를 구분하는 사람이다. 졸졸 따라다니면 불편할 게 당연하다. 연출자의 요청을 실무로 변환해 팀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연출자가 빠져 있어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지점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내 딴에는 지지와 존경을 품고 촬영 감독님의 말씀에 귀 기울였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마치 불신으로 염탐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그러니 적당히 거리를 둘 수밖에.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김태성 감독님의 촬영은 정치적 갑론을박이 많아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는 이 이야기를 역동적으로 전달해주었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 60일, 지정생존자 > 연출자입니다. 이 글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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