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근친상간이란 금기... 두 가지 방식으로 보여준 영화

[안치용의 영화적 사유] <올드보이>(2003)

20.09.08 17:14최종업데이트20.09.08 17:14
원고료로 응원

영화 <올드보이> 스틸 컷 ⓒ 쇼이스트/CJ엔터테인먼트

 
<올드보이>는 복수에 관한 영화이다. 확실히 웬만한 복수영화 수준은 넘는 유혈과 액션이 나오고 무엇보다 복수가 지독하게 이루어진다고 할 때 <올드보이> 또한 복수영화이다. 그러나 2003년에 발표된 <올드 보이>는 복수영화이면서 복수영화를 넘어선다. 이 영화는 복수를 기본구조로 하면서 인간의 고통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인간의 삶을 성찰한다.

복수

우선 두 남자가 나온다. 자신의 이름을 '오늘만 대충 수습하며 살자'라고 풀이하는 오대수(최민식)란 평범한 남자. 어느 날 만취하여 귀가하다가 누군가에게 납치되어 사설 감금방에 갇히면서 평범과는 거리가 멀어지는 남자가 된다. 제법 넉넉한 공간에다 1인실이고 '사식'까지 넣어주니 얼핏 사설 감금방은 교도소보다 나아 보인다.

문제는 왜 갇혔는지, 누가 가두었는지, 더구나 이곳에서 얼마나 있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사식이 중국집 군만두 한 종류라는 사실이다. 관객은 영화를 보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오대수가 15년을 갇혀 지냈으며 그 기간에 줄곧 군만두만 먹었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15년이란 기간도 기간이지만 기름에 튀긴 군만두를 15년 내내 먹었다는 설정은 상상만으로도 토할 것 같다.

이 영화의 복수가 대단한 것은, '15년'이 대단하지 않게 그저 밑돈처럼 제시된다는 데에서도 확인된다. 관객에게 '15년'이 곧바로 제시되는 이유는 '15년 이후'가 본격 복수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극중 복수자 이우진(유지태)은 오대수에게 왜 15년을 가뒀는지가 아니라 왜 15년이 지나 풀어줬는지를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왜 15년일까. <올드보이>의 복수는 철저하게 동태보복법(同態報復法)이라고 하는 '탈리오 법칙'(lex talionis)을 따른다. '탈리오 법칙'은 흔히 "이에는 이"라는 말로 알려져 있다.

이우진은 자신이 고2일 때 고3인 누나를 잃었다. 둘은 친남매였지만 사랑하는 사이였다. 문명의 진전과 함께 근친상간이 공식적으로 금지되긴 했지만 인류에겐 신화 등의 형태로 근친상간의 흔적이 완연하게 남아 있고 현실에서도 존재한다. 사적 영역의 근친상간은 복잡한 논의를 남기긴 하지만, 폭력의 형태가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개인에게 속한 삶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오대수와 이우진 남매는 모두 같은 학교를 다녔다. 피날레 대목에서 오대수가 교가를 부르는 장면은 아무튼 기억에 남는다. 전학 가기 전날 이우진 남매의 사랑을 우연히 목격한 오대수가 전학 가며 남긴 부주의한 한 마디가 학교와 동네에 추문을 만들어내 결국 이우진의 누나는 자살하고 만다. 이게 영화의 끝부분에서 밝혀진 복수의 동기이다.

그렇다면 이우진이 '탈리오 법칙'을 어떻게 관철할 수 있을까. 오대수를 사적으로 감금하고 오대수의 아내를 살해하긴 했지만, 집요하고 섬세한 캐릭터로 설정된 이우진에게 아내 살해는 성이 차지 않을뿐더러 결정적으로 복수의 동태(同態)가 아니었다. 그리하여 오대수의 15년 감금이 계획된다.

15년이 필요했던 건 오대수의 딸 미도(강혜정)가, 자살할 때의 이우진의 누나만큼 성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대수가 납치당할 때 4살이었던 미도는 오대수의 감금기간 동안 그만큼 나이를 먹어 19살이 된다. 사망 당시 이우진의 누나 나이이다.

이우진의 복수가 얼마나 지독한지는, '동태'를 만들기 위해 미도가 성장하도록 15년을 오대수를 감금한 채 기다렸다가 최면을 동원해 오대수와 미도 부녀를 사랑하는 사이로 만든 것에서도 발견된다. 그냥 죽이지 않고, 15년을 참고 기다려 남매의 근친상간보다 더하다고 할 부녀의 근친상간에 오대수가 빠지도록 한 이우진이란 극중 캐릭터에는 그러므로 잔혹보다는 지독이란 수식어가 더 적당해 보인다.

고통
 

영화 <올드보이> 스틸 컷 ⓒ 쇼이스트/CJ엔터테인먼트

 
이우진이란 인물이 행한 끔찍이도 지독한 복수에서 느껴지는 것은 상응한 고통이다. 사회적으로 또는 주변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랑이라 하여도, 지탄받는 사랑이라 하여도, 당사자에게 사랑은 사랑인 것이며, 그런 사랑 중에는 다른 사랑과 마찬가지로 지독한 사랑이 있을 수 있으며 그런 지독한 사랑이 예기하지 못한 상실에 직면하면 지독한 고통을 만나게 된다. 이우진이란 인물이 연기한 캐릭터는 복수의 화신이지만 연인의 상실에 평생을 고통받은 여린 인간이기도 하다. 두 가지 캐릭터는 동전의 앞뒷면처럼 연결된다.

기본적으로 고통에 무딘 성정인 오대수 같은 남자를 자신과 동일한 고통에 휩싸이게 하고 싶었던 이우진은 근친상간이란 치명적 함정을 마련한다. 그러나 두 개 근친상간의 구조가 다르기 때문에 여기서 오대수를 향한 이우진의 동태복수는 일단 외견상 자제된다.

이우진 남매는 근친상간이란 금기를 뚫고 서로를 사랑했기에 사랑한 이의 상실이 고통의 원인이 된다. 사랑하기에 어떤 존재도 감내하지만 비존재는 가장 두려운 일이 되는 상황이다. 반면 오대수 부녀에게 근친상간은, 금기를 인지하고 넘어선 사랑이 아니라 금기와 무관한 사랑이었기에, 근친상간임을 알게 되는 순간 사랑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 된다. 영화의 결말에서야 미도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을 파악한 오대수는, 그 사실이 미도에게 알려지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면 죽음을 포함하여 무엇이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됨으로써 비록 자신에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주어졌지만, 딸에겐 그 고통을 모면케 해주고 싶었으리라는 데에 관객이 동감하지 않을까.

'지독한' 이우진은 그래서 오대수를 죽이지 않는다. 미도에겐 사실을 알리지 않아, 마치 아량을 베푼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오대수만을 고통 속에 남겨둔 시종일관 지독한 복수를 가하면서 이우진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맥락상 복수라는 진통제가 사라지면서 더는 삶의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란 해석이 가능하겠다. 최종적 복수는 복수할 것을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최상의 복수일 텐데, 그때는 타인의 고통을 지켜보는 것 말고 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완벽한 복수 이후에 남은, 적의 완벽한 고통은 진통제가 되기 힘든가 보다.

신화
 
 
그리스비극에서 오이디푸스 왕은 모든 사실이 밝혀진 뒤 제 눈을 찌른다. 영화에서 오대수는 제 혀를 자른다. 이 영화는 근친상간이란 금기를 두고 근대인의 방식과 그리스신화적인 방식을 동시에 보여준다. 고통과 고독 속에 상호확증파괴의 복수를 감행한 이우진이 근대인의 모습이라면, '죄'를 지었지만 그 죄라는 것이 잔인한 운명이 준비한 것이어서 죄를 짓는지 몰랐던 오대수는 그리스신화의 주인공의 모습이다. 혈연관계임을 자각하지 못한 채 주어진 운명에 따라 사랑하여 근친상간에 빠진 부녀는 정확히 그리스 비극의 등장인물을 연상시킨다. 이우진 남매는 근친이란 운명을 충분히 자각한 상태에서 근친관계의 금기를 넘어서기로 결정한 근대인의 말하자면 허약한 주체를 대표한다.

한데 만일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것까지를 운명이라고 한다면, 만일 사랑이 최상위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런 관점에선 이우진 남매 또한 운명의 힘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이렇게 되면 두 개의 근친상간 사이에 의미의 역전이 일어난다. 이우진 남매가, 최상위 운명이란 사랑에 휘말려 죽음으로 그 운명에 속죄한 것이 된다면 그때는 그리스비극의 영웅서사와 흡사해진다. 반면 오대수 부녀는 <올드보이> 결말의 유명한 반전에 따라 '해피엔딩'을 맞게 되는데, 그것은 영웅에게 주어진 인생행로가 아니다. 분열과 허위 위에 덧씌운 가상의 행복은 보기에 따라 훨씬 더 비극적이지만, 그렇다 하여도 그리스 비극과는 다른 현대적 비극이다.

원작과 달라진 부분을 두고 호오가 많이 엇갈렸다. 원작과 다른 내용 중에서 특히 '살 권리'를 실현한 마지막 장면을 두고 토론이 많았다. 시간을 두고 생각하니 그 결말이야말로 이 영화가 원작을 개작한 내용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싶다. <올드보이>는 이밖에 캐릭터, 영상, 전개 등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영역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한국 영화의 대표작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덧붙이는 글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렸습니다.
올드보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문학, 영화, 미술, 춤 등 예술을 평론하고, 다음 세상을 사유한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ESG연구소장. (사)ESG코리아 철학대표, 아주대 융합ESG학과 특임교수, 영화평론가협회/국제영화비평가연맹 회원.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