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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국엔 밟힐 만큼 많은 게..." 이들은 왜 우주복을 입었나

[리뷰] 영화 <루비> 흑백의 화면에 담아낸 쓰디쓴 청춘의 현재

20.07.28 10:16최종업데이트20.07.28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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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비> 포스터 ⓒ (주)더쿱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방송국이고, 등장인물은 PD와 작가다. 줄거리를 적어둔 문구를 보면 "대차게 개기고 깔끔하게 사라질까?"라는 문장이 보인다. 이런 표면적인 부분만 보았을 때 <루비>라는 영화는 힘겨운 현실 속에서 노력하는 청춘들의 로망과 통쾌함을 담아낼 것만 같다. 그런데 실상은 흑백의 화면처럼 우울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 영화가 주는 답답함은 블랙코미디의 쓰디쓴 웃음보다 더 강하게 마음을 조이는 힘을 지닌다.
 
작품 속 세 주인공은 방송국의 PD와 작가다. 보통 방송국 하면 PD와 작가가 머리를 맞대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보여줄 것만 같다. 이런 기대는 PD 서연과 부장의 대화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부장은 과학 프로그램의 메인 PD인 그녀에게 오락적인 요소를 더 강화하라고 말한다. 교양 방송에서 오락적인 요소를 찾는 부장에게 서연은 반기를 든다. 이에 부장은 방송국의 현실을 인식시킨다.
 
"방송국에서는 발에 밟힐 만큼 많은 게 명문대 나온 애들이다. 그런 애들이 연예인 눈치나 보면서 프로그램 만드는 곳이 방송국이다. 그러니 교양 프로그램이라도 시청률에 신경을 써라."

이런 압박에 서연은 과학 방송에 마술사를 게스트로 초대하기에 이른다. 서연의 아래에는 조연출 은지가 있다. 은지는 서연처럼 미래에 메인 PD가 되는 꿈을 꾼다. 이 현실적인 이야기는 서연과 은지 사이의 유대나 공감을 그리지 않는다.
  

<루비> 스틸컷 ⓒ (주)더쿱


서연이 연지를 끌어주거나, 겉으로는 매몰차게 굴어도 속으로는 은지를 챙겨주는 그런 스토리는 전개되지 않는다. 지금 자신이 위치한 메인 PD라는 자리도 견디기 힘든 청춘인 서연에게 남을 챙기고 이끌어줄 여력은 없다. 그녀는 꼭두각시처럼 은지를 대한다. 은지는 서연이 하라는 대로 행동해야 하고, 서연이 화를 내면 묵묵하게 받아줘야 하는 대상이다. 서연에게도 은지 같은 시절이 있었겠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랬던 거처럼 은지도 인내하게 만든다.
 
은지의 남자친구 수오는 과학에 관심이 많은 방송작가다. 좋은 대학 출신인 그는 공부 대신 방송을 택했지만 과학이 아닌 예능을 하는 프로그램의 분위기에 실망한다. 자막으로 이런 분위기를 돌려 비판하는 수호는 서연과 갈등을 겪기도 한다. 서연은 수오의 반항을 객기로 치부한다. 똑똑한 사람들이 가득 모인 방송국에서 수오는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존재다. 이들 세 사람은 똑같이 현실에 염증을 품은 청춘이지만 간극이 존재한다.
 
서연은 메인 PD고 은지는 조연출이다. 은지는 정규직이지만 수오는 비정규직이다. 이들 사이의 이 미묘한 차이는 갈등을 만들어 낸다. 바로 계급이다. 인기 연예인 앞에서 스태프들이 꼼짝도 못하는 것처럼, 메인 PD는 부장에게, 조연출은 메인 PD에게, 작가는 연출에게 꼼짝 못한다. 이들은 비슷한 처지의 이들끼리 하나로 연대해 부당한 현실에 맞서기 보다는 조금 더 앞서있는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해 고독한 노력을 한다.
  

<루비> 스틸컷 ⓒ (주)더쿱


이런 인물들의 모습은 세 가지 소재를 통해 강하게 표현된다. 첫 번째는 흑백의 화면이다. 색깔은 개성을 의미한다. 색깔이 사라진 영화의 화면은 획일화된 청춘의 모습을 말한다. 학창시절에는 꿈과 개성을 가지라는 말을 듣지만, 원하는 꿈을 위한 직장에 들어가면 철저한 위계질서와 정해진 업무에 집중해야 한다. 흑과 백으로만 이루어진 화면은 갑을 관계로 대표되는 청춘의 우울한 이분법을 보여주기도 한다.
 
두 번째는 우주다. 작품의 블랙코미디적 색깔은 표현에 있어서도 독특함을 가져온다. 서연은 우주복을 입은 은지, 수호와 작품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데 이 대화는 일방통행이다. 우주는 지구와 떨어진 먼 공간이란 의미와 자신만의 공간이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서연과 은지, 수오 사이에는 그들 각자만의 우주가 있으며 이 우주에서 그들은 하나로 합쳐지기 힘든 거리감을 느낀다. 우주복이란 표현은 익살맞지만 그 안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청춘의 우울이 담겨 있다.
  

<루비> 스틸컷 ⓒ (주)더쿱


세 번째는 비둘기다.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한 마술사는 비둘기를 잃어버린다. 흰 비둘기는 하늘 위로 날아간다는 점에서 희망을 상징한다. 비둘기의 실종은 이들 청춘에게 희망이 사라졌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비둘기가 사라지면서 마술이 성공적으로 끝을 맺지 못한다는 점은 영화나 드라마처럼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펼쳐지는 마술 같은 행복이 현재의 청춘에게 이뤄지지 못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루비>는 그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제목과는 달리 쓰디쓴 웃음으로 청춘의 우울한 현재를 조명한다. 블랙코미디적인 요소가 있기는 하지만 강한 웃음보다는 다소 답답함이 느껴지기까지 하는 세 남녀의 모습이 더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 작품의 줄거리에는 "우리 존재 파이팅!"이란 문구가 등장한다. 하지만 작품 속 주인공 중 어느 누구도 타인을 향해 존재의 파이팅을 말하지 않는다. 이 말이 인사치레가 아닌 청춘의 미래가 그려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먹먹함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준모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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