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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직 감옥 세계 그린 이 작품... '엄숙주의'가 아쉽다

[안치용의 영화적 사유] <더 플랫폼>

20.05.22 17:53최종업데이트20.05.22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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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더 플랫폼> 스틸 컷 ⓒ 씨나몬(주)홈초이스

 
<더 플랫폼>은 수직 감옥이란 세계의 메타포를 통해 인간 존재와 사회, 그리고 구원을 형상화한 우화 같은 영화이다. 생존의 절대 조건이자 기본 조건인 음식과 수직감옥을 결합하여 불평등 사회를 파격적인 아이디어로 강렬하게 영상화했다.

<설국열차> 세우고, <기생충> 합치고

<더 플랫폼>을 봉준호 영화와 비교하면 <설국열차>를 세로로 세우고, <기생충>의 수직 플로우를 확장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주제의식은 <설국열차> 및 <기생충>과 대동소이하나 구원의 문제를 상당히 종교적인 관점에서 다뤘다는 점에서는 차이를 보인다.

<설국열차>와 <기생충> 가운데서 더 비슷한 영화는 <설국열차>이겠다. 가로 세로만 다를 뿐 구조가 사실상 동일하다. <설국열차>가 <기생충>에 미치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는 엄숙주의에 매몰돼 영화가 주제에 끌려 다니기 때문이라고 개인적으로 판단하는데, <더 플랫폼>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칼과 책(돈키호테)을 지닌 각각 비자발적이고 자발적인 두 수감자가 영화 <더 플랫폼>의 기본 얼개를 구성한다. 강력한 이분법을 채택했으며 그것은 선과 악, 천상과 지상, 구원과 타락 등을 확고하게 대변한다. 결말에서 이분법은 통합되어 새로운 단계로의 비약을 암시하나 이분법을 깰 정도는 아니다.

이분법과 수직감옥을 연결지으면서 기독교적 영감을 추가한다면 단박에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그러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예수의 역할을 연기한다. 죄 없는 희생양으로 세상이란 감옥으로 내려와서, 당하지 않아야 할 수모를 당하고, 인간과 함께 지내며 인간의 고통을 함께 겪다가, 땅에 묻히었지만 부활하여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예수. 피로 얼룩져 고통스러워하는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은 예수상을 너무 닮았다.

바닥을 333층으로 설정한 것 또한 너무 노골적으로 예수를 상징한다. 예수의 지상의 삶 33년과 공생애 3년의 의미였을까. 문제는 너무 노골적이고 과도하게 직접적인 디테일이 주제의식의 엄숙주의에 영화를 끌려 다니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좋은 감독은 영화가 주제의식을 끌고 다니게 하면서도 여백을 만들어내고 유머와 위트를 피자의 토핑처럼 곳곳에 뿌려놓는다. 봉준호 감독이 <설국열차>에 하지 못하고, <기생충>에서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가더 가츠테루 우루샤 감독은 <설국열차> 수준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가지 못했다.

구원을 여자, (여자)아이, 상승이란 스테레오타입에 의지하여 표현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종교영화가 된 <더 플랫폼>을 온기 없고 찰기 없고 푸석푸석한 식은 밥으로 만들어 버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여러 면모 중에서 가장 파시스트적이고 가장 세속적인 면모가 <더 플랫폼>의 상승에서 연상된다.

바로 위층까지에서 남긴 음식만으로 그 아래층에서 먹을 수 있고, 그 아래층의 아래층은 아래층이 남긴 음식만 먹을 수 있는 극단적이고 전형적인 수직하방은 세계를 흥미롭게 표현할 충분한 가능성을 가진 나름 흥미로운 착상이긴 했다. 세계를 신의 누출로 받아들여 마찬가지로 수직하방하면서 위보다 아래를 빈곤하게 만드는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참신하게 해석했다고나 할까. 그러나 사회비판, 실존, 예수, 구원 등 너무 많은 의미를 구겨 넣으면서 영화적 성취는 요원한 것이 되고 말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세 종류 사람
 

영화 <더 플랫폼> 스틸 컷 ⓒ 씨나몬(주)홈초이스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지. 꼭대기에 있는 자. 아래에 있는 자. 추락하는 자."

TV를 창밖으로 던져서 행인을 죽게 만들어 플랫폼에 들어온 수감자가 극중에서 한 말이다. 얼핏 사회과학적 성찰로 보이지만 이 말은 운명론에 가깝다. 수직감독의 수감자들에게 한 달마다 배정되는 층이 랜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화는 세 종류의 사람 외에 가장 중요한 한 종류의 존재를 추가하는데 그것은 바닥에서 꼭대기로 상승하는 자이다. 세 종류의 사람은 이 상승을 설명하기 위한 병풍에 불과하다. 이 상승이 세계사적 운명을 상징하게 하려 했으면 세 종류의 사람의 생존과 죽음은 비운명적으로 그렸으면 좋았을 것이란 안타까움이 든다. 수직감옥에 들고 들어간 책이 <돈키호테>인 데서 어쩌면 예견됐는지도 모르겠다.

대사에 빗대 말하면 영화를 연출할 때도 세 종류의 감독이 있다. 의미의 위에서 부질없이 부유하는 이, 의미 아래에서 의미와 무관하게 화면만 돌리는 이, 의미 과잉에서 무의미한 화면의 나열로 추락하는 이. <더 플랫폼> 감독이 이 셋 중에 어디에 속하는지는 이미 말한 듯하다. 이 세 종류의 감독은 다른 한 종류의 감독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는데, 나머지 한 종류의 감독은 바닥의 디테일에서, 높아서 말하지 않아도 뚜렷하게 펼쳐지는 꼭대기의 의미로 상승하는 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유형의 감독이 가끔 관객을 말하자면 구원한다.

<더 플랫폼>은 그럼에도 곳곳에서 좋은 감각과 상당한 잠재력을 보여줬다. 주제의식 혹은 의미의 무절제가 문제일 뿐 디테일에 나타난 절제는, 혹시나 하고 다음 작품에 기대를 품게 한다. 2020년 봉준호의 <기생충> 전에는 <설국열차>가 있지 않았나. 출연 이반 마사구에, 조리온 에귈레오, 안토니아 산 후안 등.
덧붙이는 글 안치용 기자는 지속가능저널 발행인 겸 한국CSR연구소 소장이자 영화평론가입니다. 이 글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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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평론하고, 래디컬 정치를 사유한다. 활자에도 익숙해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이런저런 글을 쓴다. 다양한 연령대 사람들과 문학과 인문학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한다. 사회적으로는 지속가능성과 사회책임 의제화에 힘을 보태고 있다. 청소년/대학생들과 자주 접촉하는 삶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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