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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갈 수 없었던 현서, '부부의 세계' 속 스토킹의 진짜 문제

스토킹 신고해도 경범죄 처벌법에 근거해 통고 처분, 벌금은 '고작' 8만원

20.04.26 16:39최종업데이트20.04.2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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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의 세계>이 한 장면 ⓒ JTBC

 
JTBC <부부의 세계>의 현서(심은우)는 데이트 폭력에 시달렸다. 동거 중인 인규(이학주)는 걸핏하면 손찌검을 했다. 폭력은 점점 더 빈번해져서 시간과 장소 불문이었다. 훤한 대낮에 그것도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도 현서는 머리채를 잡혔다. 인규는 집착과 의존을 사랑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병적이었다. 치료가 필요했지만 (대개 그렇듯) 받게 할 방법이 없었다. 현우는 끝없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가정의학과 전문의 선우(김희애)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현우는 선우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인규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폭행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은 인규는 현우의 시야에서 (잠시) 사라졌다. 선우는 새로운 삶을 준비했다. 그러나 벗어났다는 생각은 섣부른 착각이었다. 1년은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가해자에게도, 당연히 피해자에게도. 복역을 마친 인규는 다시 현우에게로 돌아왔다. 

"오늘 쉬는 날이지? 가자."
"(겁에 질린 채) 어딜 가는데?"
"가 보면 알아."


집 앞에 차를 끌고 나타나 태연하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인규를 본 현서의 심정은 어땠을까. 자신의 비번까지 파악하고 있다니, 공포 그 자체였으리라. 현서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온몸이 순식간에 굳어버렸을 게 분명하다.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당황했을 텐데, 설령 그런 생각을 한들 '누구에게' 도움을 요청한단 말인가. 
 

<부부의 세계>의 한 장면 ⓒ JTBC

 
현서가 스토킹에 맞설 수 있는 방법은

인규는 현서를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향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쥬얼리 가게였다. 인규는 현서에게 대뜸 반지를 골라보라고 했다. 현서가 머뭇거리자 인규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걸 고르더니 직원에게 결혼반지니까 잘 부탁한다고 했다. 결혼? 현서의 얼굴은 공포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새출발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안일한 생각이었다. 결국 저 끔찍한 인간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다.

<부부의 세계>는 소름끼치는 인물투성이인데, 그 중에서 인규의 악행(데이트 폭력, 스토킹, 폭행, 협박 등)은 정말 징글징글하다. 인규가 집 앞에서 기다리다 현서의 팔목을 잡아채 강제로 차에 태우는 행위는 명백히 '스토킹'에 이은 '데이트 폭력'이다(형법상 감금죄를 적용할 수도 있지만 논외로 한다). 이때 현서가 이 스토킹에 맞서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경찰에 신고를 한다? 물론 (일이 잘 풀릴 경우) 출동한 경찰이 당장의 문제는 해결해 줬을지 모른다. 처음에는 훈방 조치를 했을 것이다. 분리 조치를 했을 테지만, 인규는 다시 찾아올 가능성이 농후하다. 스토킹을 하는 범죄자들의 심리가 그러하다. 신고가 반복되면 경찰은 심각성을 인지해 경범죄 처벌법(제3조 제1항 제41호 지속적 괴롭힘)에 근거해 통고 처분을 할 것이다. 벌금은 고작 8만 원이다.

'경범', 즉 가벼운 죄로 처벌된 만큼 인규는 또 다시 현서 앞에 나타날 것이다. 집이든 직장이든 가리지 않고 어디든 말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선 더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경찰만 탓할 수도 없다(물론 경찰이 스토킹 및 데이트 폭력에 안일하게 대처하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 주어진 법에 따라 권한을 행사할 수밖에 없는 공권력의 한계는 스토킹의 경우 더욱 뚜렷하다.
 

프로바둑기사 조혜연 9단의 청와대 청원 글 ⓒ 김종성

 
스토킹 피해 호소한 프로바둑기사

"흉악한 스토커 정 모씨는 1년 전부터 저의 사업장에 나타나 갖은 욕설과 고함을 치고 있습니다. 저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지만 제가 바둑 프로기사이다 보니 아마도 바둑팬이겠지요. 공권력은 저와 주변인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이 사람을 잡아 가두지도, 일시적으로 구류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23일, 프로바둑기사 조혜연 9단은 1년 동안 한 남성에게 스토킹 피해를 당해 왔다는 사실을 밝히며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스토킹 관련법 개정을 요구하는 청원을 올렸다. 지난해 4월부터 조 9단의 바둑교습소에 처음 나타난 남성은 수시로 찾아와 욕설과 고함을 치며 협박을 일삼았고, 조 9단과 결혼을 했다며 허위 주장까지 했다. 조9단뿐만 아니라 바둑 교습생도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조 9단은 경찰에 세 차례 신고를 했으나 결국 통고 처분 조치로 벌금 5만 원에 그쳤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해당 스토커는 또 제 사업장에 나타나겠다고 선언한 상태"라며 고통을 호소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조 9단은 형사고발 했다. 해당 스토커는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는데, 다시 조 9단의 집으로 찾아가 출동한 경찰에게 현행범 체포됐다. 현재 구속 영장이 신청된 상황이다. 

"스토킹 행위를 장기간 하고 난 다음에 죽이게 되거든요. 부산 사건이나 강서구 사건이나 다 그렇습니다. 장기간 스토킹한 기간들이 있어요. 그런 스토킹은 우리나라에서 경범죄로밖에는 처벌이 안 됩니다, 암만 신고를 해봤자. 끝까지 고소의 의지를 유지해도 8만 원 벌금 나오는 정도가 최고예요. 그러다 보니까 앙심을 품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는 8만 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결국 죽이겠다는 계속 그 의지를 갖다 보니까 지금 그 정도로는 도저히 중단이 안 되니다." - CBS <김현정의 뉴스쇼>,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 -

피해자가 극단의 위협의 느껴야만 공권력이 움직일 수 있다면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앞서 설명했듯이 스토킹은 현행법상 '경범죄'에 포함돼 있는데, 실제로 성폭행, 살인 등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더 강력하게 규제할 필요가 있다. 정부도 문제의식을 갖고 입법을 추진(스토킹 범죄를 범한 사람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천 만 원 이하이 벌금)했지만,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부부의 세계>의 한 장면 ⓒ JTBC

 
지나치게 무심하고 허약한 공권력

현우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지인이 있는 울산으로 도망을 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기차역까지 쫓아온 인규에게 끝내 붙잡히고 말았다. 도망치지 못했다. "여기서 일은 다 잊고 잘 지내"라는 선우의 말은 실현되지 못했다. 선우는 플랫폼에 덩그러니 놓인 현서의 가방을 발견하고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자신이 건넸던 목도리에 피가 흥건히 묻어있는 걸 보고 불길함을 느꼈다. 

이처럼 스토킹 범죄로부터 벗어난다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다. 현실 속에는 수많은 현서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에게 공권력은 지나치게 무심하고 허약하다. 법은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을 만큼 무용하다. 외국은 어떨까. 미국은 1990년 캘리포니아주를 시작으로 스토킹 범죄에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형을 내리고 있다. 영국은 1997년 '괴롭힘 방지법'을 만들어 2번 이상 반복되는 위협과 괴롭힘을 처벌해 왔다. 

일본은 2000년 '스토킹 규제법'을 시행했고, 독일은 2007년 '타인에게 그 사람이 생활 형성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는 방법으로 권한 없이 의사에 반하여 지속해서 접촉한 자'를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하고 있다. 스토킹 범죄의 입법 공백을 없애는 것이야말로 21대 국회의 선결 과제일 것이다. 처벌 강화는 당연하고 신고 시 초동 조치, 가해자 차단 및 감시, 피해자 보호와 지원까지 말이다.

현서의 사례는 결코 드라마 속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 9단의 청와대 청원 등 여성들의 호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너무도 현실의 문제다. <부부의 세계>는 누군가가 기차 선로로 뛰어내렸다며 현서의 죽음을 암시했는데, 그것이 사실이든 반전의 일부이든 간에 더 이상 이런 끔찍한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종성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버락킴' 그리고 '너의길을가라'(https://wanderingpoet.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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