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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면 죽는 곳에서 사는 이들... 코로나 겪는 우리같았다

[재난에 대처하는 '영화 속' 사람들] <버드 박스>가 지금 떠오른 까닭

20.03.29 17:57최종업데이트20.03.29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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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드박스> 메인포스터 ⓒ 넷플릭스


완성도와 무관하게, 참신한 소재 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영화들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앤드류 니콜 감독의 2011년 연출작 <인 타임>이다. 아만다 사이프리드와 저스틴 팀버레이크가 주연을 맡았던 이 영화는 '인간의 수명을 지불 수단으로 거래하는 사회'를 그린다.

이 소재는 끊임없이 쏟아지는 SF 장르 영화들 속에서도 상당히 기발한 아이디어로 각광을 받았다. 팔뚝에 새겨진 '카운트 바디 시계'로 자신의 남은 수명을 알 수 있고, 이를 화폐처럼 이용해 사고 팔 수 있다. 제한된 수명(시간)을 모두 소비하고 나면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에 영화 속 인물들은 시간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일을 하고 누군가에게 빌리고 또 타인의 시간을 훔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영화가 이 소재의 매력을 마지막까지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뻔한 전개로 일관하면서 텁텁한 뒷맛을 남기게 된다는 것이랄까. 아쉬운 마음이 가득했던 작품이었다.
 

영화 <인타임> 스틸컷 ⓒ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지난 2018년 12월에 넷플릭스 오리지널 작품으로 공개된 수잔느 비에르 감독의 영화 <버드 박스> 역시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눈을 뜨고 세상을 보게 되면 이내 곧 끔찍한 죽음을 당하게 되는 종말 직전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 <눈 먼 자들의 도시> <부산행> <매드 맥스> 시리즈 등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를 표방 작품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지만 그 속에서도 영화 <버드박스>는 충분히 흥미를 끌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여기에 영화 <그래비티>로 연기력과 흥행력을 다시 한번 입증한 산드라 블록과 알만한 사람이라면 모두가 인정하는 배우 겸 감독 존 말코비치가 캐스팅 되었고, 영화 <컨택트>의 각본을 쓴 에릭 헤이저러가 각본가로 합류하고 나니 그 기대는 훨씬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작품 또한 후반부를 지나 결말을 향해 갈수록 헐거워지는 설정으로 인해 큰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다는 것. 일종의 공익 광고처럼까지도 느껴지는 허무한 결말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껍데기만 보여주고 끝나버리고 만다.
 

영화 <버드박스> 스틸컷 ⓒ 넷플릭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정통을 이을 만한 작품은 아니지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결에서 획득할 수 있는 재난 혹은 종말의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것에는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느끼는 공포나 긴장감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를 전달하는 것은 인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에 나타난 '미지의 그것'과 그 존재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각자가 선택하는 상황에 대한 태도가 이 작품의 핵심인 셈. 여기에 그것과 마주하게 되는 순간 정신 착란을 일으켜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모두 죽음에 이르게 만들게 된다는 설정은 살아남은 이들의 감각을 제한하며 더욱 극단적인 상황을 이끌어낸다.

영화 <버드박스>가 극중 인물들의 재난 상황에 대한 태도를 드러내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극을 이끌어나가는 인물인 멜로리(산드라 블록 분)가 함께 생존한 톰(트레반테 로즈 분)의 영향으로 현실을 마주하는 삶의 태도를 바꿔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하나. 입체적 인물의 활용을 통해 현실에 반영할 수 있을 법한 긍정적 삶의 태도를 반영하는 방식이다.

또 다른 하나는, 기존의 유사 작품들이 보여줬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상황을 대하는 다양한 인간상을 수평적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동일하게 주어지는 상황 속에서 개인의 가치관과 규범에 대한 의식, 태도와 같은 것들이 제한적 상황에서 어떻게 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 <버드박스> 스틸컷 ⓒ 넷플릭스


그 중에서도 멜로리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행동과 변화는 조금 더 세심하게 들여다 볼 만하다. 비현실적인 상황으로 인해 동생 제시카(사라 폴슨 분)를 바로 눈 앞에서 잃고 어렵게 살아남은 그녀는 이후 생존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인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시작되고 난 이후 주변 인물들의 무력한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제 막 태어난 아들 보이(줄리안 에드워드 분)와 홀로 남겨진 올림피아의 딸 걸(비비안 리라 블레어 분)을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두 아이의 이름 대신 보이(Boy)와 걸(Girl)이라는 보통명사로 두 아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 역시 마찬가지. 하루하루 살아남기도 바쁜 세상에서 이름을 짓는 일 따위는 사치라고 생각하는 그녀다.

한편, 그런 그녀를 변화시키는 것은 함께 살아 남아 연인이 되는 톰이다. 그는 첫 등장에서부터 부상을 입고 방황하는 멜로리를 도와 피신 장소로 향하며 의협심과 책임감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피난처의 생존자들이 모두 죽고 난 뒤에도 그녀와 두 아이를 지켜내는데, 멜로리와는 달리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키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두 아이 보이와 걸에게도 끊임없이 희망찬 꿈을 꾸게 만들고 생존만이 아닌 제대로 된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하여 멜로리와 대립을 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도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 - 타인이 강압적으로 부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과 도덕성으로부터 자발적으로 발생된 것이다. - 을 놓지 않고 위험으로부터 가족을 지켜낸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태도는 멜로리의 태도에도 감화를 일으켜 결정적인 순간의 선택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영화 <버드박스> 스틸컷 ⓒ 넷플릭스


바로 옆을 지나가는 자동차가 폭발하고 거리의 사람들이 눈 앞에서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면서도 교통 신호를 지키던 멜로리의 동생 제시카(사라 폴슨 분)의 태도라던가, 타인의 기회를 빼앗아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행동을 보이는 펠릭스(머신건 켈리 분)와 루시(로사 살라자르 분) 커플의 선택. 또한,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춘 채 타인에게 접근해 적극적인 태도로 피해를 입히고자 하는 게리(톰 홀랜더 분)의 행동 등 작품 속에 등장하는 다른 인물들의 모습들 역시 앞서 언급한 멜로리와 톰의 모습만큼이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재난 상황에서 드러날 수 있는 다양한 군상으로서 제시된다.

전체적인 영화의 흐름을 놓고 볼 때, 멜로리와 두 아이가 끝내 다다르게 되는 생존자 커뮤니티의 등장에는 분명히 아쉬운 부분이 있다. 영화의 타이틀인 <버드 박스>의 의미와 작품 속 설정을 연결하고자 하는 노력은 엿보이나 성급하게 마무리 된 느낌이 든다. 물론 극의 처음에 등장한 멜로리와 다른 생존자들이 속해있던 피난처의 모습과는 달리, 바깥 세상과 단절된 상태로 자신들만의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높은 결속력을 보이는 또다른 형태의 군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의미를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소재의 참신함에 뚜렷한 매력이 돋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온전한 만족스러움을 느낄 수는 없었던 이 작품이 지금의 시점에서 떠오르는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동일한 상황 속에서도 각자의 선택과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극 중 인물들의 행동이 '코로나 19'를 겪고 있는 현실 속 우리의 모습과 전혀 무관해보이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이느냐가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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