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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렸다"는 후배에게 송은이가 화내며 한 말... 부러웠다

[2020은 이 사람처럼] 각자도생 시대에 다함께 걷는 상생의 꽃길 까는 송은이

20.01.26 19:24최종업데이트20.01.26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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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나 영화, 예능을 보다가 문득 이런 말을 내뱉게 됩니다. "다시 태어나면 저 캐릭터(사람)처럼 살고 싶다." '2020은 이 사람처럼'에서는 닮고 싶은 영화와 드라마 속 캐릭터(사람)들을 살펴봅니다. [편집자말]
 

송은이 ⓒ 이정민

 
살면서 '이보다 좋을 수 없다' 싶을 정도로 행복했던 기억이 몇 개 있다. 지상파 방송국 라디오 작가 공채로 뽑혔을 때가 그랬다. 마흔 넘은 나이에 용기내서 지원한 도전이 합격이라는 결과로 돌아왔을 때, 그야말로 꽃길을 걷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처음 배정받은 팀이 좋았다. 내가 기대하고 생각한 프로그램은 아니었지만, PD와 메인 작가, 그리고 함께 일하게 된 동기 작가까지 모두 일 잘하는 좋은 사람들이었다. 당시 PD는 아쉬운 부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모니터해주었고, 잘한 부분에 대해서도 확실한 피드백을 해주곤 해서 늘 더 잘하고 싶은 기분 좋은 의욕이 몸 구석구석에 꽉 차 있었다.

좋은 팀워크 중 백미는 함께 일하는 공채 동기 동료 작가와의 호흡이었다. 우리는 아이템과 취재에 대해서 수시로 서로 의논하기도 하고, 일상의 수다를 떨기도 하면서 급속도로 친해졌다. 일하면서 느낀 성취감과 보람, 행복은 그때가 최고였다. 회사로 가면서 늘 가슴이 두근거리고 감사기도를 했을 정도로.

하지만 늘 그렇듯 인생은 맑은 날만 계속되지 않는다. 행복이 깨진 건 개편 때였다. 개편 시기에는 PD가 바뀌면서 작가가 바뀌는 경우도 있고, 프로그램이 폐지되거나 바뀌면서 작가가 잘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다행히 좋은 PD가 와서 다음 개편 때까지는 무사했으나 곧 프로그램이 폐지된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그 말은 하루아침에 일터가 없어진다는 뜻.

당시 PD는 고맙게도 백방으로 우리의 일자리를 알아봐주었다. 그나마 나는 구사일생으로 토요일 주말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지만, 동료 작가는 끝까지 기회를 얻지 못했고, 백수가 되어 버렸다. 그때는 그런 상황들이 몹시 당황스러웠다. 내가 생존했다는 기쁨보다 아끼는 동료 작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게 더 안타까웠다. 다행히 다음 개편 때에는 동료가 컴백했지만, 다음에는 내가 잘려서 1년 반이라는 '강제 은퇴기'를 거쳐야 했다.

김숙의 토로, 송은이의 멋진 반응
 

송은이-김신영-안영미-신봉선 ⓒ 이정민


소중히 여기던 일터에서, 그것도 행복한 기억으로 충만하던 일터에서 내가, 그리고 함께 일하던 동료가 하루아침에 쫓겨날 때의 황망함을,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더 싫은 건, 그렇게 날 무참하게 쫓아낸 곳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날 다시 불러주지 않을까 하며 기다리는 내 모습을 보는 거였다.

분노와 비참함, 당혹감, 배신감이 마음 안에서 뒤엉켰다. 그 중에서도 제일 힘든 건 막막함이었다. 기다리다 보면 기회가 온다지만, 임금님에게 간택당하길 기다리는 궁녀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누군가에게 연락이 오면 무조건 감지덕지해야 하는 상황도 한숨이 나왔다. 개편 때마다 마음 졸이고 나가라면 나가야 하는 게 어쩔 수 없는 방송작가의 운명인가. 그 부당함에 대해 큰 저항감이 느껴지면서도 제 앞가림도 잘 못하는 힘없는 방송작가로서 아무런 목소리도 낼 수 없는 현실에 좌절했다.
 
개그우먼 송은이를 보면서 가장 감탄하고 존경스러운 부분이 바로 그 지점이다. 연예인도 방송작가처럼 하루아침에 해고 통보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더라도 상처를 안 받는 건 아니다. 개그우먼 김숙도 자신이 당했던 일을 토로한 적이 있다.

"모 방송에서 전날 잘려요. 아무 통보 없이. 런칭을 코앞에 둔 타이틀 촬영 전날, 넌 빠져라 하는 거예요. 서러운 마음에 은이 언니에게 전화를 했죠."

김숙의 이야기를 들은 송은이는 너무 화가 나서 자기도 모르게 이 말이 나왔다고 한다.

"우리가 잘리지 않는 방송을 만들자."

그게 바로 팟캐스트 <비밀보장>이었다. 비밀보장을 시작한 2015년만 해도 정치 위주의 팟캐스트가 많았던 터라 예능 장르로서는 개척하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우려와는 달리 방송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예상밖으로 승승장구하면서 결국 <비밀보장>은 <언니네라디오>라는 이름으로 지상파 방송국에 입성했다. 보란 듯이 금의환향한 것이다.

이후로도 송은이는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서 시도했다. 후배들과 함께 셀럽파이브를 결성하기도 했고, 최화정, 이영자와 함께 <밥블레스유>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편들어주고 덩달아 화내주는 언니표 위로를 전해주는 등 TV에서 송은이의 지분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예능의 판도 바뀌었다. 여성 예능인들이 노는 판이 많아진 것이다.

송은이의 행보에 존경심이 들면서도 부러웠던 이유

작년 말, 한 예능 시상식에서 소감을 말하는 송은이를 보며 그 자리에 오기까지의 시간들이 가늠되었다. 남성 연예인들의 판 속에서 조용히 때를 기다리며 버텨야 했던 시간, 여기까지인가 하며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을 얼마나 많이 꿀꺽 삼켜 넘겼을까. 쓰디 쓴 시간을 버티며 송은이는 다른 누가 판을 깔아주길 기다리는 대신, 자신과 동료들이 걸을 꽃길을 스스로 깔았다.

그의 행보에 존경심이 들면서도 부러운 건, 동료가 하루아침에 실직했을 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다는 무력감, 내가 하루아침에 잘렸을 때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씁쓸함이 컸기 때문이다. 각자도생의 시대에, 다함께 걷는 상생의 꽃길을 깔고, 함께 놀기 위한 판을 짜는 누군가가 있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사실 누구나 그런 존재가 절실하지 않은가.
 

송은이 ⓒ 이정민

 
2020년에는 두드러지지 않더라도 함께 신명나게 놀 수 있도록 판을 까는 송은이처럼 살고 싶다. 잘릴까봐 노심초사하거나 기다리기만 하면서 '왜 내 길은 늘 자갈밭이냐' 하는 하나마나한 푸념을 하느니 "내 꽃길은 내가 깐다"는 정신으로!

내가 잘리지 않는 일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내게 주어진 일을 꾸준하게 잘해내며 버티는 건 기본. 일단 계약한 두 권의 책에 집중하고, 지금 하고 있는 주말 프로그램을 좀 더 재밌게 만드는 게 우선이다. 더 나아가 올해는 개인방송을 만드는 게 목표다. 내가 원고를 쓰고 그 원고를 내가 진행해 보려 한다. 만약 잘 된다면, 다른 사람들과도 함께할 수 있는 좀 더 넓고 다양한 판을 깔고 싶다.

궁극적으로는, 처음 라디오작가로 일하면서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었던 그때처럼 신명나게 일하고 싶다. 작가로, 기획자로, 내가 좋아하는 동료들과 함께. 그래서 2020년 끝자락에는 나와 함께하는 사람들이 잘 되는 걸 흐뭇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싶다. 2019년 연예대상 시상식 때 여자 후배들이 상 타는 모습을 보며 애틋하게 바라보던 송은이처럼 말이다.
 
2020년을 송은이처럼 살고 싶다고 하면서 든 생각 하나. 송은이가 지난 1월 7일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 출연했다는 말을 듣고 생각했다. 새로운 버전의 <여성시대>같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져서 MC는 송은이였으면 좋겠다고. 최화정, 이영자 같은 대선배와 신봉선, 장도연 같은 후배들을 두루두루 아우르는 유연함과 포용력이 있는 송은이라면, 시대가 변하면서 조금은 달라진 여성의 입장과 이야기를 잘 들어주며 풀어낼 것 같고, 그가 여성들을 위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수다의 판을 깔아줄 것이라는 기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 끝에 나도 모르게 사라진 줄 알았던 욕망이 불쑥 튀어 올라 나왔다.

"송은이하고 그런 프로그램을 같이 만들면 좋겠다." 아브라카다브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개인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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