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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서울대에서 시작된 '영화운동'의 첫 걸음

[한국영화운동 40년④] 영화운동의 출발 서울대 영화동아리 '얄라셩'

19.12.20 08:07최종업데이트20.03.29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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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영화계 진보와 보수의 비율을 9:1이라고 한다. 그만큼 영화계는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보수정권 시절 '블랙리스트'에 영화인 대다수가 이름을 올릴 정도로, 저항은 거셌다. 다른 문화예술계는 영화계의 단결력에 부러움을 나타내기도 한다. 물론 처음부터 한국영화가 이런 흐름을 보였던 건 아니었다. 젊은 시절 검열과 표현의 자유 제한에 문제 의식을 느끼고 저항해 온 영화인들의 노력이 수십 년 동안 쌓인 결과다. 이들이 한국영화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된 계기가 바로 '영화운동'이었다. '기획-한국영화운동 40년'에선 앞으로 몇 차례에 걸쳐 영화운동에 매진한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본다. [편집자말]

1980년대 얄라셩 회원들. 왼쪽에서 세번째가 김동빈 감독, 네번째 김인수 대표, 오른쪽 끝 김홍준 감독 ⓒ 김인수 제공

 
박정희 군사독재에 대한 반발로 실험영화집단이 생기고, 사회파 영화가 등장하며 한국영화의 방향성에 대해 새로운 모색을 하던 1970대 후반. 서울대 공대에서 생겨난 작은 영화동아리가 이후 한국영화에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 예측한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1979년 서울대 공과대학 학생들이 모이면서 시작된 '얄라셩 영화연구회'는 한국영화운동의 밑바탕 구실을 했던 첫 걸음이라는 점에서 영화사적으로 매우 큰 의의가 있다. 물론 본격적인 영화운동의 출발은 80년 5월 광주학살의 충격으로 시작됐고, 영화운동이라는 표현이 등장한 것도 그 이후였으나, 1979년 출발한 얄라셩은 학생운동이 활발해지는 당시 대학가 유일의 영화 서클로 향후 영화운동의 기초 역할을 맡게 된다.
 
학보 광고를 보고 모인 공대생들
 
출발은 서울대 학보인 <대학신문> 1979년 4월 23일자에 나온 짧은 광고였다. 가로 5.5cm, 세로 15cm로 나온 광고 내용은 간단했다.
 
'당신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소형영화(8mm, 16mm) 제작에 관심이 있는 서울대생을 찾습니다. 얄라셩 영화연구회. (연락처: 서울대학교 보건진료소 최재현)
 
광고를 낸 사람은 서울대 문리대 심리학과 66학번으로 당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감독수업을 받은 후 기획 업무를 맡고 있었던 이봉원 감독이었다. '얄라셩'은 이봉원 감독이 1974년 창단한 극단이름이었다. 당시 기독교방송 피디였던 이봉원은 창작극을 제작 공연하려고 청산별곡에 나오는 노래가락인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에서 '얄라셩'을 극단이름으로 따왔다. 청산별곡의 노래 내용을 좋아해 지은 이름이었다. 이 감독은 대학 시절 '국어운동학생회'를 창립하기도 했다.
 
이봉원 감독은 2002년 서울대 <대학신문>에 보낸 글에서 "당시 여러 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1979년 4월 '얄라셩 영화연구회'를 창립해 1년간 운영하면서, 한국영화계와 관련 있는 영화기획자, 기자, 화가, 작가, 감독, 연극인, 무용가 등으로 '화요일에 만난 사람들'이란 작은 모임을 만들었다"며 "여기에 후배들을 끌어들이려 했다"고 밝혔다. 영화학과도 없고 영화서클도 없는 모교에도 영화에 관심 있는 후배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해, 서울대에서 근무하던 부인을 통해 공고를 낸 것이었다.
 
당시 공대생으로 첫 모임에 나왔던 김동빈 감독은 "당시 충무로에 있던 이봉원 감독이 젊은 영화인들과 모임을 갖다가 이를 대학생들로 넓혀보자는 취지로 광고를 낸 것으로 알고 있다"며, "첫 모임에 4명이 나왔는데 공교롭게 모두 다 공대생이었다"고 회상했다. 4명은 홍기선, 김동빈, 문원립 등이었는데, 전부 학과가 달랐다.
 
김동빈 감독은 "당시 인문사회계열 학생들이 많을 줄 알았는데 한 명도 없었다"면서 "아마도 인문사회계열은 문화운동에 관심은 있었으나 그만큼 한국영화를 낮게 취급했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당시 모이던 장소가 지금도 있는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위치한 학림다방이었다.
 
보는 영화에서 만드는 영화로
 
하지만 매주 한 번씩 모임을 가졌으나 별다른 진척이 없다 보니 이봉원 감독은 나중에 다시 보자는 식으로 한발 물러섰고, 이후 1명이 빠지고 3명만 남게 됐다. 이들은 프랑스 문화원과 독일 문화원으로 몰려 다니며 영화를 봤고, 당시 평론과 이론에 관심이 많았던 문화원 세대 전양준, 강한섭 등도 만나게 됐다. 당시 20명 정도가 무리 지어 몰려다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것도 점차 재미 없게 느껴지자 직접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어차피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에 촬영장비도 구입한다. 김동빈 감독은 "아르바이트를 해서 8mm카메라를 개인적으로 구입했다"고 말했다.
 
김동빈 감독은 "당시는 서클이 허가제였고 경찰이 학내에 거주하며 사찰할 때라 어용 서클이 아니면 등록해주지 않아 정식 서클은 아닌 3명이 어울리는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피살 이후 자유화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서클도 허가제가 아닌 등록제로 바뀌었다.
 

지난 11월 30일 서울독립영화제 아카이브전 <서울 7000>과 <국풍> 상영후 진행된 시네토크에 참석한 얄라셩 초기 회원들. 김인수 전 시네마서비스 대표, 김정희 한국열린사이버대학교 교수, 황주호 경희대 교수, 김홍준 감독. ⓒ 성하훈

 
공릉동에 있던 공과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후인 1980년 3월 20일, '얄라셩영화연구회'는 서울대 학생회 산하단체로 가입하며 정식 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영화를 만들기 위한 회원 모집에 들어갔다. 초창기 회원은 설립 멤버인 홍기선, 김동빈, 문원립을 비롯해 김홍준, 김인수, 임병용, 이원태, 황주호, 천인국, 이홍철, 김진선, 김홍식, 조철현, 박은미, 박영신 등 16명이었다. 그 이후에 박광수, 송능한, 황규덕이 추가로 합류했다.
 
황규덕 감독은 2004년 하재봉 평론가와의 인터뷰에서 "대학 4학년(1981년) 12월, 학교에 있는 영화서클 '얄라셩'의 문을 두드렸다"며 "당시 (얄라셩 회장이었던) 2학년 김인수가 (내가) 신입부원이 되겠다고 하자 황당해 했다"면서 "선배인 박광수 감독이 없었으면 영화 서클 가입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김동빈 감독은 "서클 이름을 바꾸기 위해 투표도 해봤지만 다들 의견이 달라서 얄라셩이란 이름을 계속 쓰기로 했다"면서 "처음에는 운동적인 관점은 없었다. 이후 과정에서 진화하고 발전했다"라고 말했다.
 
이봉원 감독은 이후 첫 작품 <엘리베이터 올라타기>(1986)을 찍을 때 조감독으로 일하려던 홍기선 감독이 '파랑새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고초를 겪어야 했다. 홍기선 감독이 경찰 조사를 받으며 이봉원의 조감독이라고 신분을 밝힌 데다, 두 번째 작품이었던 <내일은 뭐할거니>(1986)라는 영화를 찍기 위해 등록했던 제작사 이름이 '얄라셩 프로덕션'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얄라셩이라는 이름은 문제단체로 관계 당국에 등록돼있는 상태였다. 이 감독은 졸지에 얄라셩의 대부(?)로 관계당국에 알려지게 되면서 지독한 수난을 겪는다. 이 감독은 처음에는 '얄라성'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얄라셩으로 바뀌어 있었다고 회고했다.
 
초기 회원이자 4대 회장이었던 김인수 전 충남문화산업진흥원장에 따르면 처음에는 홍기선 감독이 회장이었고, 1980년 2대 회장은 김동빈 감독, 1981년 3대 회장은 송능한 감독이었다. 김인수는 얄라셩의 첫 8mm 영화 <여럿 그리고 하나>, <국풍> 등 당시 제작된 영화 전반에 참여했다.
 
영화는 메가폰과 대자보 구실을 할 수 있다
 

얄라셩의 첫 작품 <여럿 그리고 하나> 촬영 장면 ⓒ 김인수 제공

 
얄라셩의 중심에는 문화원 세대들이 포진돼 있었다. 1970년대 프랑스문화원과 독일문화원에서 영화를 접했던 문화원 세대가 얄라셩의 중심을 이룬 것이다. 김홍준 감독과 황주호 감독, 박광수 감독 등은 '얄라셩' 이전부터 프랑스 문화원을 오가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운 문화원 세대였다. 홍기선, 김동빈, 문원립도 1979년부터 문화원의 영향을 받게 된다.
 
75학번 김홍준 감독은 "군에서 제대 후 영화를 찍고 싶었는데, 8mm 영화를 찍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1980년 3월에 본부 서클로 등록된 후 회원으로 가입했다"고 말했다. 김홍준 감독은 이미 1976년 황주호 감독과 함께 무성영화 <서울 7000>을 제작한 경험이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얄라셩의 첫 공동제작 영화에 참여했다. 1980년 얄라셩의 첫 번째 영화마당에서는 <여럿 그리고 하나>, <이층침대>, <서울 7000> 등이 함께 상영됐다.
 
초기 얄라셩은 공동작업을 원칙으로 강조하면서 집단적인 창작체제로 운영됐다. 1980년 첫 번째 영화마당 자료집에 김홍준이 쓴 글 '왜 영화인가?를 통해 이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개인의 좁은 울타리를 벗어나 이른바 세계와 만나고 그리하여 세계를 변화시키고 스스로가 변화하기 위한 통로이며 도구로서 영화를 간주한다면 여기에는 두 가지 단서가 붙을 수 있으리라.
 
첫째 영화는 현실참여의 방식으로 정당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영화는 때로 메가폰과 대자보의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영화는 선전 도구 이상이다.(중략) 그러므로 영화를 도구로 한 현실참여는 그 전략적 목표의 달성과는 무관하게 가장 진실에 가까운 기록 활동이라는 의의를 가지며, 따라서 영화는 냉정한 증인의 입장에서라도 현실 참여의 마당에 항상 자리 잡을 권리를 거부당해서는 안 된다. (중략)
 
둘째 영화작업은 공동체의 삶을 체험하고 실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중략) 작가 공동체는 토론과 합의를 거쳐 작품의 이념과 지향을 결정하고 그에 적합한 작업형태를 창출하며, 공동작업으로서 작품을 구체화시키고, 완성된 작품이 관람집단에 전달되기까지의 제 단계를 관리해야 한다.(중략) 이념을 같이하며 동시대적 활동을 전개하는 동인집단의 테두리를 벗어나 작가공동체는 대화와 토론과 작업으로서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여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삶의 형태를 모색하는데 그 의의를 두어야 한다.'

 

제작과정 중 후시녹음(ADR)을 위해 자체적으로 만든 녹음 시스템 ⓒ 김인수 제공

 
대학생들이 영화를 찍는다는 것 자체가 상상을 할 수 없던 시절이었기에 1981년 <중앙일보>는 얄라셩의 활동을 이렇게 주목했다.
 
'5인치 TV수상기만한 영상편집기. 5∼6개의 필름·테이프를 돌려가며 가위질이 한창이다. 화면엔 열쇠를 닮은 교문, 은행나무가 즐비한 등교길, 잔디밭에 둘러앉은 학생, 도서관 등 서울대 관악캠퍼스 풍물이 스친다. 텅 빈 강의실에서 책가방을 들고 뚜벅뚜벅 걸어나가는 학생 2명이 클로스업되고 소란스런 구내식당과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꺼내는 장면이 이어진다.
 
서울대 얄라셩 영화연구회. 지난 겨울방학동안 촬영한 8㎜ 소형영화를 편집하고 있는 남녀회원10여 명의 눈망울엔 결실을 앞에 둔 뿌듯함이 어린다. 79년 첫 모임을 가진 이 연구회의 현재 회원은 모두 30명. 문학·미술 등 여러 예술 장르 중 영상예술이 소재인 이 '서클'은 영상언어가 살아있는 영화를 만들어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다.
 
회장 송능한군(20·불어교육과3년)은 "대학문화 속에 영화예술이 그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며 "견제·비판세력으로 있으면서 창조적인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우리영화의 앞날을 제시해 보이겠다"고 포부를 말했다.
 
회원들은 직접 시나리오를 쓰며 공동감독·공동조연출로 영화를 만든다. 배우가 되는가하면 촬영기사 역할도 한 단편집·녹음·음향까지 회원들의 손으로 마무리된다.'
  

학생운동 심화되면서 영화도 운동으로
 
얄라셩이 처음부터 영화운동의 성격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독립영화의 역사를 기록한 <변방으로 중심으로>(1997)에 따르면 '운동의 일환으로서 영화를 수용하는 경향과 예술로서의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공존'했다. '이후 학생운동이 심화 되는 과정에서 변혁운동의 도구로 영화를 고민했고, 80년대 초반까지는 미숙한 단계'였다.
 
얄라셩 출신 홍기선 감독이 참여해 <오! 꿈의 나라>(1989) <파업전야>(1990)를 만든 '장산곶매'는 1991년, '90년대 초반 영화운동'을 정리한 문건에서 '80년대의 영화운동'을 이렇게 평가했다.
 
'영원한 잠에 빠질 것 같았던 영화운동은 1980년대에 들어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소시민적 민주화운동에 빠졌던 남한의 진보적 운동진영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변혁운동의 새로운 전망을 모색하게 되었으며, 변혁운동은 계급적 깊이를 더해가면서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장되어 나아갔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하에서 대학의 영화서클 회원들이나 문화운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영화를 변혁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은 80년대 초반까지 다분히 자기 만족적인 성격이 강했다. 이들은 헐리우드 영화에 대한 강한 저항감을 갖고 유럽의 누벨바그, 프레시네마 등을 접하면서 진보적 영화에 대한 동경을 꿈꾸는 정도에 불과했다.'

 
얄라셩을 만든 초기 회원들이 대학 졸업 후 1982년 '서울영화집단'을 만든 뒤, 얄라셩의 방향성도 운동적인 색채가 강해진다. 여기에는 홍기선 감독의 영향이 컸다.
 

얄라셩 다섯번째 영화마당 자료. ⓒ 서울독립영화제


1984년 얄라셩의 '다섯 번째 영화마당'에서는 노동운동 영화 <얼어붙은 땀방울>을 만든 후 '제작집단의 변'을 통해 영화에 대한 고민을 이렇게 털어놨다. 이 작품은 노동자뉴스제작단을 만들었던 81학번 김명준(현 미디액트 소장)이 제작에 참여했다.
 
'한 사회의 기층적 역할을 담당하는 노동자는 직접적 생산자로서 역사발전의 주체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열악한 노동조건, 세계 최초의 노동시간. 월수 10만원 이하의 노동자가 전체의 50%, 노동조합의 어용화, 민주노조의 파괴. 개악된 노동법 등등 종속적 발전에 의하여 희생된 한국의 노동자들은 실로 암담한 상태에 있다. 이렇듯 왜곡된 사회구조의 희생자로서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집약되어 있는 노동자들에 대한 당위적 관심에서 우리는 노동 문제를 영화의 소재로 선택하였다.
 
구체적인 영화제작에 앞서 한국의 노동경제구조, 노동운동, 노동문학, 노동자 수기 등을 나름대로 공부해 가면서 노동자들이 겪는 삶과 그러한 구체적 삶을 통하여 드러나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총체적으로 표현해보고자 했지만 우리가 지닌 의식의 한계성과 삶의 자리의 차이에서 오는 표현의 부족이 점점 명확해졌고, 그러한 점들은 영화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고 생각된다.
 
우리가 몸짓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를 연기해가면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노동자들의 어려움에 대한 단순한 관심과 그 어려움을 몸소 체현하고 나아가 그들의 고통을 나누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지를 새삼 깨달았다. (중략)
 
30분이라는 시간 속에 우리의 긴 겨울방학과 우리의 모든 의식이 융해되어 있다. 우리의 삶을 구체적인 현실 속에 몸담음으로써 언젠가는 노동자들의 고통이 치열하게 표현된 영화가 나오고, 그들의 삶이 우리의 주체가 되고 그런 가운데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회복하기를 바라며 이 영화를 바친다.'

 
민중영화의 개념 제시
 
80년대 학생운동은 이후 노동현장으로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얄라셩이 노동영화를 만들었던 것도 이런 흐름이 작용한 것이었다. 이들의 고민과 바람대로 몇 해 뒤 노동자들의 고통이 치열하게 표현된 영화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초기 알랴셩의 영화운동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에 대해 이후 얄라셩에서 활동했던 후배들은 1987년 3월에 발간한 회지 '영상과 현실'에서 민중영화의 개념을 제기했다고 평가한다.
 
"영화운동이라는 용어가 새롭게 대두된 것은 1980년대였다. 이 말은 단순히 저질의 대명사인 한국영화를 보다 높은 예술적 차원으로 소화시키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영화운동은 1970년대 문화운동의 성과와 1980년대 한국영화운동의 성숙을 수렴하면서 대학권에서 제기된 것이다.

1980년 서울대 얄라셩 영화연구회는 창립과 더불어 지배 이데올로기의 수단과 상품화된 상업영화를 비판하면서 민중영화의 개념을 제시했다. 또한 제 3세계 영화운동의 경험을 참조하면서 영화 소집단운동의 구체적 방법으로서 '서울영화집단'을 구성하였다.
 
서울대 얄라셩과 서울영화집단은 35mm 상업영화를 위한 연습 과정으로서 소형영화운동을 부정하고 상업영화에 대한 일종의 대항영화로서 소형영화를 제기하였다. 즉 영화는 현실인식과 실천의 수단이 되어야 하며 진정한 영화는 민중과 함께 호흡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상업영화가 비록 밝은 모습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체제에 적응된 범위내에서의 영화에 불과하고 결코 이 땅에 사는 대다수 민중의 요구를 반영한 것은 아니다." 

 

1987년 발간된 얄라셩 회보 <영상과 현실> ⓒ 신종관 제공

 
얄라셩 회원으로 장산곶매에서도 활동했던 85학번 신종관은 이 당시 흐름에 대해 "85년 이후 새로운 영화를 통한 변혁운동으로서의 고민이 현장성의 강화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즉 "그동안은 영화를 외형으로 운동을 강조했다면, 영화를 강조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얄라셩은 이후 대동제나 시위대 상황을 촬영해 프로파 간다로 활용한다. 노동자들의 파업현장에 취재 완장을 차고 들어가 비디오카메라로 투쟁 상황을 담았다.
 
그 당시 영화운동 진영이 충무로로 대변되는 제도권 영화에 대항해 재야에서 영화를 만들었던 것에 대해서는 한 운동권 선배의 제안 때문이었다고 기억했다. "노동현장에 들어가는 것도 좋지만 꼭 현장을 고집하기보다는 영화를 직접 만들어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해 방향을 그쪽으로 집중한 것도 있다"고 말했다.
 
80년대를 대표했던 얄라셩의 영화운동 흐름은 90년대부터는 약해진다. 신종관은 "얄라셩의 운동적 흐름이 90~91년까지 이어지다가 이후 학생운동이 약해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영향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초기 얄라셩 회원들은 이후 한국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얄라셩 창립 멤버였던 홍기선 감독은 한국영화운동의 1세대로 꼽히며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1992), <선택>(2003), <이태원 살인사건>(2009), 유작 <1급기밀>(2017)을 남겼다. 김동빈 감독은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1995), <링>(1999), <두 개의 달>(2012) 등을 연출했다. 박광수 감독은 <칠수와 만수>(1988)를 연출하고 같은 해 <성공시대>(1988)로 데뷔한 장선우 감독 등과 함께 '코리안 뉴웨이브'의 선두주자가 됐다. 부산영화제 부집행위원장과 부산영상위원장을 역임한 뒤 한국예술종합학교영상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김홍준 감독은 영상인류학을 전공한 뒤 임권택 감독의 조감독을 거쳐 〈장미빛 인생〉(1994) 등을 연출하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충무로뮤지컬영화제 예술감독, 강릉국제영화제 예술감독, 영상원 교수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황규덕 감독은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1990) 등을 연출하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주임교수를 지냈다. 송능한 감독은 시나리오 작가로 경력을 시작하여 배우 송강호의 데뷔작 <넘버3>(1997) 등을 연출했다.

부산영화제 초창기 자막시스템을 만들었고 현재 동국대에서 영화를 지도하고 있는 문원립 감독이나, 영화사 시네마서비스와 영화진흥위원회 사무국장, 충남문화산업진흥원장을 역임한 김인수 대표 등 한국영화의 요소요소에 얄라셩이 존재한다.

김인수 대표가 얄라셩에서 촬영한 영화 <국풍>(1981)과 초기 회원들이 만들었던 <전야제>(황규덕 감독, 1982), <결투>(문원립 감독. 1982), <그들도 우리처럼>(박광수 감독, 1982), <그 여름>·<수리세>(홍기선 감독, 1984) 등은 2006년에 영상자료원이 선정한 '독립영화 50선'에 이름을 올렸다.

80년대 후반 이후 입학하여 현재까지 영화계에서 현역으로 활동 중인 얄라셩 출신들은 이상훈 <머니백> 제작·젠앤벤처스 대표, 정미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김우형 <1987>·<암살> 촬영감독, 유운성 영화평론가·영상전문지 <오큘로> 공동발행인, 최성록 음향감독, 박정미 노동자뉴스제작단 감독, 안건형 다큐멘터리 <한국인을 관두는 법> 감독(2018년 미디어시티 비엔날레 대상), 오준호 서강대학교 영상대학원 원장, 소상민 <나는 곤경에 처했다!> 감독(2009년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상), 이응일 <불청객> 감독, 박문칠 <파란나비효과>·<마이 플레이스> 다큐멘터리 감독, 권봉근 단편영화 <로망, 그레꼬로망>(2013) 감독, 정호중 <안녕? 허대짜수짜님!> 감독, 최종만 다큐멘터리 <아직도 우리는 이주노동자다> 감독, 장혜진 <백두산> PD, 김정훈 <들개>(2013) 감독 등이다. 2000년 이후 입학한 회원들 중 일부는 2015년부터 영화 팟캐스트 <영화장실>을 운영 중이다.

문원립 감독 <결투> 촬영현장. 왼쪽부터 김인수, 황규덕 ⓒ 김인수 제공

 
얄라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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