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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장하고 해적선에 탄 여성... 그가 배에서 찾아낸 '보물'

[인터뷰] 겁쟁이 선장부터 검투사까지... 뮤지컬 <해적>에 다시 승선한 배우, 랑연

19.11.22 16:39최종업데이트19.11.22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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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적선을 다시 탄 이유“대학로에서 버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장치적인 배역으로 캐릭터를 소모시키는 작품도 있고요. 깊이 있게 고민하고 연결하면서 연기할 수 있는 캐릭터를 만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배우들이 연기적으로 많이 늘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성장할 기회조차 적으니 그 시간이 억울하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해적>을 만나서 너무 감사해요. 연기에 대한 욕심이 많이 생겼어요. 그간 안주해왔던 저 자신이 조금은 부끄러웠고요.”ⓒ 곽우신

 
그 시대는 과도기이자 공백기였다. 르네상스에 이어 제국주의자들의 '대항해시대'를 거치며 세계는 크게 변혁했다. 과학 기술의 발달 덕분에 인류는 바다를 건너 문명과 문명을 이었다. 서구 유럽은 다른 문명을 약탈했고, 막대한 부가 다른 대륙에서 바다를 통해 유럽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근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종교의 권위는 불완전하게나마 남아있었고, 시민의식도 충분히 성장하기 전이었다. 해군은 식민지를 착취했고, 해적은 그 착취한 부를 강탈했다. 어떤 해적들은 국가의 은밀한 허가를 받고 사략행위를 했고, 바다의 제해권을 둔 국가 간 다툼에 이용되기도 했다. 해적이 해군이 되기도 했고, 해군이 해적이 되기도 했다.

"육지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 하나둘씩 해적선을 탔어. 어쩌다 늙어서 퇴역한 병사, 채찍이 무서워 도망친 노예, 재주가 없어서 쫒겨난 일꾼, 모험을 꿈꾸는 용감한 아이." - 뮤지컬 <해적> No.03 '우리 마을에서 가장 잘생긴 사람' 중에서

온전한 도덕적 선악은 존재하지 않았던 때, 식민지에 대한 행정력도, 바다에 대한 통제권도 완전치 않던 시절, 제도로부터 소외된 이들은 모두 국가의 손이 미처 닿지 않는 바다로 몰려들었다. 그 역사에 기록된 '유이'한 해적이 있다. 앤 보니 그리고 메리 리드. 역사에 이름을 남긴 단 두 명의 여성 해적.
 
뮤지컬 <해적>은 세상에 이름을 남긴 이 두 여성 해적의 이야기, "보물과 북극성과 부서진 나침반과 졸리 로저"의 이야기, 바다로 몰려들었던 모든 이들의 이야기, 바로 그 "해적의 황금시대 이야기"이다.
 
성공적이었던 첫 항해, 다시 닻을 올리다
  

▲ 관객들의 평가에 대해서“관객 분들이 피드백해주실 때 디테일을 이야기해주시는 게 아무래도 기억에 많이 남죠. 캐릭터마다 목소리 차이를 내려고 노력했는데, 그 점을 알아봐주시고 ‘취향저격’이란 말씀해주시니 참 열심히 했구나 생각했어요. 더 열심히 해야죠.”ⓒ 곽우신

 
"첫 대본을 받아봤을 때는 이렇게 잘 될 줄 몰랐어요. 작품이 잘 될 줄은 알았죠. 작가·작곡가·연출까지 해서 저희가 아는 너무나도 멋지신 분들이 멤버로 함께하니까요. 그런데 '저희'가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어요. 여자-여자 페어로 시도를 하는 게 거의 처음이었잖아요. 그 안에서 여자 캐릭터만 연기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남자 역할도 소화해야 하고…. '잘해야 된다'라는 부담이 컸어요. 여러모로 새롭게 시도하는 작품이다 보니 시행착오가 분명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더 열심히 준비하기도 했고요."
 
지난 3월부터 5월까지 약 두 달 간의 항해를 마쳤던 뮤지컬 <해적>이 팬들의 성원에 힘입어 앙코르 공연으로 돌아왔다. 여자 배우의 페어로 초연 때 크게 주목 받았던 임찬민-랑연 배우도 그대로 함께 승선했다. 지옥에서 돌아왔지만 사람을 죽인 적 없는 캡틴 잭 그리고 전설적인 해적 검투사이자 포세이돈으로 불리는 메리 리드를 맡은 랑연을 만나고 싶었던 이유였다. 지난 11일, '카페 드 원피스'에서 그와 재회했다. 2017년 <리틀잭> 때에 이어 인터뷰로 기자와 만난 건 2년 만이다. (관련 기사: 심장이 너덜너덜해지는 작품, 그녀의 목소리가 유독 청량하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너무 긴장되고, 무대 위로 나가는 매 순간 심장이 너무 떨려 요. 페어인 (임)찬민이랑 둘이 시작하기 전에 앉지 않으면 안돼요. 너무 부담이 되고, 팬 분들이 기대를 많이 가지고 계시니깐…. 했던 작품이어도 부담 되고 걱정되고 이런 부분들은 똑같은 것 같아요. 긴장 많이 돼요. (웃음)"
  

▲ 해결하고 싶었던 과제“호흡도 그렇고, 같이 했던 파트너가 있기 때문에 익숙해진 부분은 분명히 있어요. 하지만 그거를 더 넘어서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깊이 파고든 부분들이 있죠. 초연 때는 보지 못했던, 제가 연기로 깊게 보여주지 못했던 부분들이 분명히 있더라고요.”ⓒ 곽우신

 
첫 출항임에도 불구하고 소극장 창작 뮤지컬 시장에서 이 작품이 성공적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다양한 요소들을 꼽아볼 수 있겠지만, 그 중에 배우의 역할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두 명의 배우들만으로 끌고 가야 하는 2인극, 남성과 여성 캐릭터를 교차해가며 연기해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해적>의 배우들은 훌륭히 무대라는 갑판 위에서 제 몫을 해냈다. 하지만 랑연은 다른 요소들을 더 강조했다. "배를 탄다는 데 대한 희열감"이나 "두 배우가 작품을 끌고 가는 것의 매력" 등을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작품의 힘 그리고 작품 속 인물들의 매력 덕분이라고 이야기했다.
 
"배우들이 노력한 것도 있지만 그거는 저희가 숟가락을 얹은 느낌이고요. (웃음) 배우들도 중요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초연 작품에 제일 큰 건 기본적인 뼈대 같아요. 작가·작곡·연출·무대·스태프 분들의 힘이 없었으면 절대절대 성황리에 올릴 수 없다고 생각해요.
 
또, 인간적인 면모가 제일 많은 작품이잖아요. 하나하나 다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거든요. 인간적인 부족함이든, 각자의 다양한 사랑이든, 아픔과 사랑과 슬픔들이 작품 안에 흡수 되어 있어요. 그 자체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들이 공존하면서, 관객 분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이 더 많은 것 같아요."

 
강인했지만, 슬픔과 아픔을 간직했던 포세이돈
  

▲ 캡틴 잭과 랑연의 닮은 점“능청스러움이 닮은 것 같아요. 그리고 마음이 약해요. 마음이 약해서 사람을 좀…. 엄마가 그래서 ‘너는 홍익인간이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웃음) 그리고 제가 리드하는 거 좋아합니다! 리드해야 하는 성격이에요. 리더 기질이 있는 것 같아요, 솔직히. (웃음)”ⓒ 곽우신

 
"제가 겉으로는 활발하고 말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웃음) 사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건 가만히 혼자 생각할 수 있는 적막함이거든요. 메리와 빗대어서 얘기하자면, 싸움을 미친 듯이 하고서 혼자 있는 걸 즐기고, 막 사람들과 지내다가도 혼자 있으려고 하고…. 메리라는 친구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게, 약간 흘러가는 대로 두면 그게 맞더라고요. 메리는 그 공허함을 즐길 수 있는 친구에요. 저와 메리는 그런 점에서 비슷해요."
 

"여자 해적 처음 봐?"라고 당차게 쏘아 붙이는 메리 리드. 해적들 사이에서 전설적인 검투사였던 그는 말수도 많지 않는 카리스마적 존재였다. 작품 속에서 다른 여자 해적 앤 보니가 배를 타게 되는 과정은 자세하게 표현되는 데 비해, 메리 리드의 과거에 대해서는 세밀하게 표현되지 않는다.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옮긴 다큐멘터리가 아니기에, 뮤지컬 <해적> 속 메리 리드에게는 미처 표현되지 않은 사연이 있을 것만 같다. 그가 바다로 나오게 된 전사가 사뭇 궁금했다.
 
"메리는 10대를 지나면서 자신이 여자인 것을 포기하고 남장을 한 채 남자로 살아가야 하는 게 굉장히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겉으로 굉장히 거칠고 강인하고 당차 보이지만, 굉장히 아픔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해요. 아픔 그리고 깊이 가라앉아 있는 슬픔이 굉장히 많이 내포되어 있어요. 선택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메리는 '나'를 찾기 위해서 메리는 배를 타지 않았을까요.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선장이었던 아버지의 피가 몸에 흐르는 걸 알았으니 '나는 배를 타야 돼'라는 생각도 같이 흘렀을지 모르고요. 육지에서보다는 바다에서 자신에게 접근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싸움을 하면서 희열도 느꼈을 것 같아요. 자신의 적성에 맞는다고 느끼고, 앤을 만나기 전까지는 남장을 한 채로 살아왔죠. 바다 같은 친구랄까요. (웃음)"

 
많은 해적들은 로즈 사파이어로 대표되는 보물을 찾아서 이 배에 탑승했다. 그러나 작품 속 보석은 하나의 상징일 뿐이다. 각자에게는 각자가 바라는 보물들이 따로 있었다. 잭의 보물이 다르고, 루이스의 보물이 달랐다. '나'를 찾겠다고 배에 오른 메리의 보물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 보물을 찾았을까.
 
"다 아시잖아요. (웃음) 메리에게 보물은 앤이죠, 앤. 처음부터 앤일 거라고 생각은 못했겠죠. 사실 제가 연기하면서 메리한테 가장 '번뜩'했던 부분이 두 군데인데, 하나는 보물섬이 아니라 유령선을 발견했을 때 그리고 앤을 발견했을 때에요. 메리는 보물섬이나 보물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계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고 생각해요. 유령선하면 딱 떠올리는 게 뭔가 음산한 느낌이지만, 메리에게는 호기심도 생기고 굉장히 편안한 곳이에요.
 
'유령선' 노래 들어 갈 때, '바람도 한 점 없는데 저기 깃발은 혼자 펄럭이고, 바다 가운데 떠 있는 바다, 하늘 아래 또 하나의 하늘' 그 공간 자체가 메리에게는 삶이었겠죠. 그런데 앤을 만나면서 보물을 찾았다는 걸 알게 되는 것 같아요."

  

▲ 메리가 느낀 앤의 매력"배우가 그리는 앤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임찬민 배우의 앤은 강단이 있어요. 그리고 그 안에 길을 잃은 사람만이 지닌 아픔이 있어요. 정말 아름다운 상대이지만, 감싸주고 싶은 부분이 있죠."ⓒ 곽우신

 
각자 서로에게 '보물'과도 같았던 메리와 앤. 한 번도 패배해본 적 없는, 해신 포세이돈으로 불리던 메리가 앤과의 결투에서 지고 그의 포로가 된 건 우연이었을까. 흔들려 본 적 없는 그를 흔들었던 것은, 자신을 닮은 앤이라는 존재 그 자체였다. 메리는 왜 앤에게 빠져들 수밖에 없었을까.
 
"이유는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첫눈에 누구한테 빠져본 적은 없지만,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요. 예를 들어서 저는 이 작품 이름이 <해적>인지도 모르고 계약했어요. '연출님 제목이 뭔데요?'하니까 '해적' '아, 잘됐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직감적인 느낌이랄까요?
 
메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과 싸움을 했겠어요? 그런데 앤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이 기운이 그냥 일반적인 선원과의 싸움과는 다르지 않았을까요. 싸우면서 왜 여기에 떨림이 있고, 왜 그런지에 대해서 혼돈이 오거든요. 나도 모르게 앤한테 나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되잖아요. 왜 그랬을까? 나도 모르게 나의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주는 연기를 해야 되더라고요.
 
결국엔 나도 모르게 그 아이한테 끌린 거죠. 앤과 메리는 닮았어요. 표현되는 부분과 겉모습이 조금 다를 뿐이에요. 짐승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메리니까, 서로 닮은 존재라는 걸 알았을 거예요."

 
사람을 죽이기 싫었던 선장의 이야기
  

▲ 앤을 바라보는 잭의 눈빛은 어땠을까?"잭도 앤을 보는 순간 그냥 첫눈에 빠져요. 이유가 없죠. 그런데 앤이 별을 쏘는 순간 그 사랑이라는 감정이 걷잡을 수 없게 증식한다고 생각해요. 잭의 눈에는 정말로 앤이 쏜 별이 부서져요. '경이롭다'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릴것 같아요. 설레는 감정보다 놀랍고 현실 같지 않은? 잭이 '내가 부서져 사라졌다'라고 노래로 표현할 정도의 놀라움이죠. 글도 못 읽는 잭이 사랑에 빠져서 마치 시를 지어내는 것처럼 말하잖아요. 그러니 메리와 앤의 관계를 알게 되도 쿨한 척 하는 거죠. 전략상 후퇴, 기회는 계속 노리면서요."ⓒ 곽우신

 
사실 배우가 메리보다 더 오랜 시간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인물은 '캡틴 칼리코 잭'이다. 지옥에서 돌아온 전설적인 해적, 무인도에 버려졌지만 대왕 거북이를 타고 탈출한 뒤로 거북이 고기를 먹지 않는 해적, 배는 허락을 받지 않고 후불로 빌리는 해적 그리고 케일럽의 절친한 동료였고 케일럽이 죽은 뒤 그의 아들 루이스의 해적선 승선을 허가한 해적. 하지만 실제로는 사람을 한 번도 죽인 적이 없다는 사람.
 
"잭은 되게 허술한 인물이에요. 제가 봤을 때는 가장 허술한 친구가 잭이고, 가장 인간다운 사람도 잭이에요. 그래서 저는 잭이 제일 안타깝고, 제일 사랑스러워요. 꼭 사람을 죽여야 하고, 쟁탈을 하고, 사람의 피를 보는 걸 좋아해야지만 해적을 한다는 건 일반적인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잭은 작은 섬 하나 차지해서 지상낙원을 만들 거라고 하잖아요. 그 친구는 그 삶이 행복한 거죠.
 
잭에게 제일 중요한 대사는 '같은 배를 탔던 선원들의 우정이 얼마나 뜨거운지 모를 거야'에요. 물론 비겁하기는 하죠. 선장은 되고 싶고, 허세는 부리고 싶고, 누구의 발밑에 있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남들이 싸울 때 본인은 피를 안 보고, 숨고…. 그게 모순적일 수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허술한 친구로 캐릭터를 잡고 있어요.
 
'사실 나는 사람을 직접 죽인 적이 없다'라는 대사가 너무 힘들었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까, 그 사람의 마음이 끌리지 않아서 사람을 죽이지 않았던 건데 그거를 두고 '정답이다' '아니다'라고는 얘기할 수 없겠더라고요. 꼭 누구를 죽이지 않더라도, 그는 해적인 거죠."

 
잭의 꿈은 어쩌면 소박했는지 모른다. 케일럽이 남긴 보물지도를 통해 로즈 사파이어를 찾고, 그 보물로 해적들만의 낙원을 만드는 것. 버려지고 갈 곳 없는 이들의 행복한 안식처를 꾸리는 것. 잭은 케일럽의 지도를 머리로 기억한 뒤 꿀꺽 삼켜버린 루이스를 주저하면서도 결국 배에 태우고야 만다. 자신이 지키지도 못할 해적의 원칙을 설파하고, 자신에 대한 비밀 이야기를 루이스에게 털어놓는다. 메리와 앤이 서로를 한눈에 알아본 운명적 사이라면, 잭은 루이스를 점점 더 곁에 두고 아끼게 된다.
 
"제가 초연 때 연기하다가, 마지막에 밧줄에 묶여서 나가기 전에 루이스에게 저도 모르게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제가 잭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그 순간에는 케일럽이더라고요. '내가 너에게 아빠가 되어 주지 못했다'는 거죠. 잭은 루이스에게 형, 친구 더 나아가 아빠가 되어 주고 싶었어요.
 
유일하게 잭을 옹호했던 사람이 케일럽이잖아요. 자신을 옹호해주고 사랑해주고 제일 따뜻했던 선원이 케일럽이었으니까 그 마음이 계속 남아 있었겠죠. 그래서 죽은 케일럽을 대신해 그의 아들 루이스에게 선원이자 동료로서 다가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그래서 유달리 아낄 수밖에 없었던, 허술한 부분을 제일 많이 들켰던, 자신의 치부를 제일 많이 보여주는 친구."

  

▲ 잭은 ‘모태 해적’이었을까?"네, 그럼요. 모태 해적이죠. 모태 ‘허세’ 해적."ⓒ 곽우신

 
절망적인 마지막 전투에서 피해있던 겁쟁이 선장 잭은 '밧줄 춤'을 추러 가게 되면서 재판부에 호소한다.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는 게 아니었다. 함께 탔던 루이스를 봐달라고 하는 거였다. 그는 해적도 아니었으니, 저 어린 친구는 살려달라고. 루이스는 거부하지만, 잭은 소설가가 되겠다고 학교를 그만둔 바보 같은 루이스가 항해일지를 완성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항해일지를 빌미로 루이스를 밧줄 춤에서 빼낸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그 아이를 살리기 위해서 어떻게든 다독여야 한다는 1차원적인 생각이 우선 있어요. 두 번째는, 죽음을 앞두고 자기의 흔적이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육지에는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게 뭐라도 있잖아요. 그런데 배위에서는 어느 누가 죽어 버리고 나면 아무런 이야기가 남을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깐 '네가 우리가 함께했던 그 이야기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나라는 인물을 항해일지 안에 만들어 줬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컸겠죠."
 

앤 보니는 혼인 서약을 통해서만 어딘가에 기록될 수 있었기에 결혼했다. 그리고 그 교회에서 스스로 뛰쳐나와 이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길 다른 방법을 선택했다. 자신이 살았던 증거를 어떻게든 남기고 싶었던 사람들은 육지에서 등떠밀려 바다로 나아가면서도, 파도 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을 물결 대신 어딘가에 자신을 남기고 싶었던 걸까. 잭에게도 어딘가에 기록되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걸까.
 
"당연하죠. 그 시대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저조차도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나의 어떤 모습을 기록해주고 싶을 것 같아요. 죽고 나면 나는 기약할 수 없는 기억이잖아요. 내 후손이든, 누군가가 기억을 해줘야죠. 잭은 그렇게 허세를 부렸는데 그거라도 남겨 놓고 가야지. (웃음) 그렇지 않겠어요? 잭은 약간 관종이예요. 사랑스러운 관종."
 
아직 오지 않은 마지막 항해
 
 

▲ 루이스를 위해 내뱉은 잭의 한마디“목숨을 걸고 루이스를 배려하는 잭을 반전이라고 많이 보기도 하죠. 사실 저희 작품 자체가 인물이 성장하는 그래프가 계속 보여야만 하는 작품이에요. 마치 어린아이가 성인까지 되어가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감정의 깊이가 생겼다고 할까요. 그래서 마지막에 나오자마자 내가 죽기 싫어서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이 아이를 생각하는 말을 하죠. 그 무서운 순간에, 겁쟁이 해적인데도 불구하고 잭이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처음 등장 했을 때부터 성장을 해왔기 때문이에요.”ⓒ 곽우신

 
뮤지컬 <해적> 속의 인물들은 대부분 어딘가에 빈자리가 있는 인물들이다. 그들 각자가 원하는 보물은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 결여된 부분만큼 관객이 감정 이입할 수 있는 틈이 생긴다. 잭이 부족하고 모자란 이들이 함께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작은 해적섬을 꿈꿨던 것처럼, <해적>은 관객들이 외부의 편견으로부터 도망쳐 잠시 치유받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
 
"그 부족함이 작품의 핵심인 것 같아요. 다리가 하나 없다든가,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흠이 있다든가, 사생아이고 여자로 살지 못한다 거나…. 이런 부족한 부분들이 극 안에서 정형화 되고 만들어지긴 했지만, 각자가 모두 완벽할 수는 없잖아요. 사람이니까요. 대신 '그런 부분도 괜찮다' '네 존재 자체가 괜찮다'라고 하는 것 같아요. 사실 의미 없는 존재는 없잖아요? 살아가는 데 의미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그 자체로 괜찮다고 얘기해 주는 메시지가 아닐까 싶어요.
 
작품의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잭이 불쌍하고, 루이스가 불쌍하고, 함께 펑펑 운 뒤에 해소되면서 힐링이 되었다고 생각하시잖아요. '나도 괜찮다', '이래도 괜찮다', '어떠한 삶이어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가고 그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면 괜찮다'라는 걸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배우들도 무대 위에서 '열심히 잘 살았어'하고 내려오거든요."

 
랑연은 소극장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과 일종의 '동지애'를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비록 비극적인 결말을 향해 치달아가지만, <해적>을 보러 온 관객들이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에 감동하며 함께 울고 웃을 때 랑연은 관객과 배우가 마치 한 배에 탄 사람들 같다고 이야기했다. 공연이 끝나고, 관객들이 무대 밖으로 '하선'하더라도, 같은 배를 탔던 그 우정을 기억해주기를 바랐다.
 
"비극은 비극이죠.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를 극화하면서 비극으로 만들어졌어요. 하지만 오히려 비극이기 때문에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는 거 아닌가 싶어요. 너무 슬프지만, 그 비극을 극대화시키면서 남는 희망적인 메시지들이 있는 것 같아요. 예컨대 죽음이 꼭 삶의 끝은 아니다. 형식적이지만 죽음이 삶이 끝이 아니라는 걸 얘기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항해 일지로 남겨 놓는 게 아니었을까요.
 
'같은 배를 탔던 선원들의 우정이 얼마나 뜨거운 지 너는 모를 거야'라는 대목이 있잖아요. 하선해도 '우리가 같이 항해했다'라는 것만은 관객 분들도 기억해 줬으면 좋겠어요. 사실 공연을 보는 것도 같은 배를 타는 거잖아요. 그 같은 배를 탔던 사람들만 솔직히 느낄 수 있는 것들, 여러가지 사랑의 형태와 허술하지만 인간적인 면모들을 다 볼 수 있잖아요.
 
직접 와서 보지 않는 이상 그 무대의 감동을 가져갈 수 없어요. 그게 무대의 매력이죠. 그 매번의 항해가 다 다르니까 저도 매번 공연할 때마다 너무너무 아까워요. 저도 느꼈던 감정이 매번 다르니까요. 그래서 매일 저희를 보러 오시는 분들도 많잖아요? 그냥 그걸 그대로만 가져 가셨으면 좋겠어요."

 
랑연 배우와의 인터뷰도 마칠 시간이 다가왔다. 끝난 줄 알았던 첫 항해의 연장선에 다시 올랐던 랑연. <해적>은 그에게 연기적인 부분에서 많이 성장하게 해준 작품이라고 한다.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배우로서 집중할 수 있는 능력도 커졌다. 매번 "이번이 마지막 항해"라고 떠났지만 결국 다음 항해를 떠나고야 말았던 루이스의 아버지 케일럽처럼, 그도 다음 출항 때 함께 이 배를 타고 떠나고 싶은지 물었다.
 
"네, 승선 하고 싶어요. 사실 초연하고 나서 이번 첫 공연 때 너무 힘들었어요. 관객들의 기대가 많이 높아져 있는 작품이잖아요. 무대도 넓어졌는데, 혹시라도 제가 실수할까봐, 그 실수 때문에 이 공연의 이미지가 안 좋아질까 봐 부담이 너무 컸어요. 그런데 다들 그리워 하셨더 라고요. 덕분에 관객들과 같이 즐기면서 공연을 했던 것 같아요.
 
사실 하고 나면 '다음에는 진짜 못하겠다' 이 생각이 들면서도, '계속하고 싶다'라는 생각도 하게 돼요. 진짜 쉽지 않은 작품이에요, 정말. 다음에 재연이 올 때도 똑같이 심장이 벌렁벌렁 댈 것 같지만, 그만큼 더 성장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해적>을 하고 나면 어떤 작품을 가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관객 입장에서도 그렇게 느껴지지 않나요? 시켜만 주신다면야. (웃음)"
 

서울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 2관에서 순항 중인 뮤지컬 <해적>의 항해는 오는 12월 1일에 끝날 예정이다.
 

▲ 그 무엇도 아닌, '배우' 랑연“배우가 스펙터클하게 무대 위에서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가 아직은 부족한 것 같아요. 여자·남자를 떠나서, 그냥 ‘나는 배우이니까 이 캐릭터를 소화한다’는 역할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배우는 캐릭터를 소화하는 직업이잖아요. 메시지를 전달하고, 인간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를 표현하고 전달해주는 사람. 제가 하는 배역 중에 여자가 있는 거지, 여자라서 잭과 메리를 연기하는 게 아니잖아요. 여자·남자를 가리지 않는 작품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곽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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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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