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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치면 되지, 왜 버려요" 복싱 선수의 이 말, 가슴 울렸다

[리뷰] 영화 <판소리 복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

19.10.11 10:27최종업데이트19.10.1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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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판소리 복서> 스틸텃ⓒ CGV 아트하우스


석양이 짙게 깔린 바닷가, 남자는 복싱을 하고 여자는 장구를 친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권투와 판소리가 만나 새로운 장르가 된다. 이름하여 판소리 복싱. 여자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 최고가 될 거야. 가장 한국적인 게 가장 세계적인 거니까. 우리 자기 분야에서 세계 최고가 되자!"

잃어버리고 있는 한 남자의 인생
 

영화 <판소리 복서> 스틸컷ⓒ CGV 아트하우스

 
<판소리 복서>는 단편 <뎀프시롤: 참회록>의 장편 버전이다. 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상영 때만 해도 일본 권투 만화 <더 파이팅>의 주인공 필살기에서 따온 <뎀프시롤>이란 가제로 관객과 만났다. 팔자로 머리를 흔드는 기술인데, 펀치드렁크를 앓고 있는 병구의 모습과 닮았다. 단편을 장편으로 늘리면서 이야기를 덧붙이고 배우를 교체했다. 엄태구의 순박하고 어눌한 매력, 활력을 불어 넣는 이혜리, 영화의 중심을 잡고 있는 김희원의 연기가 인상적이다.

펀치드렁크에 걸린 복서 병구(엄태구)는 무기력하게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펀치드렁크'는 복싱선수처럼 뇌에 많은 손상을 입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뇌세포 손상증이다. 치매와 유사한 형태로 진행되는데, 길고 이상한 꿈을 꾼 것 같다는 대사로 봉구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꿈에서 깨는 장면, 긴가민가 하는 장면은 오프닝과 클로징이 맞닿은 증거다. 뫼비우스 띠지처럼 연결된 이야기는 끝남과 동시에 다시 시작한다.

(만으로) 스물아홉, 병구는 링 위에 오르려 한다. 40대에 WBC 헤비급 챔피언을 딴 '조지 포먼'의 사례를 재차 강조하며, 늦지 않았다고 말한다. 몸이 기억한다면 할 수 있다고, 한 번 사는 인생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살아야 한다며 자신감을 보인다. 과연 병구는 지키지 못한 약속을 지키고, 판소리 복싱을 완성할 수 있을까?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영화 <판소리 복서> 스틸컷ⓒ CGV 아트하우스

 
영화 <판소리 복서>는 사라져가는 것들의 아쉬움, 잃어버린 꿈을 이야기한다. 디지털 사진기에 밀려 필름 사진은 더 이상 찍지 않는다. 가요나 팝에 밀려 판소리는 자취를 감춘지 오래다. 복싱은 또 어떤가? 이종격투기에 밀려 다이어트 분야로 간신히 우리 곁에 남아 있을 뿐이다. 주변에서 잊힌 수많은 것들을 상기해보는 영화다. 화려했던 전성기가 가고 퇴물이 되거나 아예 자취를 감춘 것들. 우리는 다시 이것들을 소환해 새로운 옛것 '뉴트로(New-tro)'라 부른다.

병구는 고장난 텔레비전을 고치러 온 수리기사에게 괜히 화풀이한다. 고치는 비용보다 새로 사는 비용이 더 싸다는 권유에 무조건 고쳐달라고 떼쓴다. 그리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고장 나면 고치면 되잖아, 왜 버려요"라고. 시대가 변했다고 끝난 건 아니다. 가슴 뛰는 일보다 안정적인 공무원을 준비하고, 복싱밖에 모르던 박 과장이 재개발로 체육관을 팔지언정, 꾸준히 맡은 바 소임을 다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단단해진다.
 

영화 <판소리 복서> 스틸컷ⓒ CGV 아트하우스

 
병구는 기억하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잊힐 것을 알지만, 마지막으로 힘을 내본다. 후회하기 싫으면 하고 싶은 것을 해야 한다는 민지의 말에 고무된다. 옛 친구와 꿈꾸던 판소리 복싱을 세상에 보여줄 것이다. 과연 마지막 장면은 환상일까, 현실일까? 이는 진위 여부를 떠나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응원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꿈을 그냥 흘려보내고 있다. <판소리 복서>는 흘려버린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안함에 대한 참회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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