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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기억이 사라지는 여자,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넘버링 무비 161]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비가 그친 후>

19.10.10 12:05최종업데이트19.10.10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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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2019 부산국제영화제 ⓒ 부산국제영화제


01.

사랑 이야기에서 기억은 자주 활용되는 소재다. 기억의 상실은 그 어떤 종류의 사랑도 무용하게 만들기에 그로 인한 관객들의 안타까움을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알츠하이머나 <첫 키스만 50번째>의 단기 기억 상실처럼 말이다. 단지 연인의 사랑에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스틸 앨리스>에서 기억을 잃어가는 앨리스는 가족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나의 관계가 상대의 존재를 인지하고 기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여기 또 하나의 기억이 있다. 아니,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이 있다. 일본 영화를 이끌어 갈 새로운 주자로 주목받고 있는 나카가와 류타로 감독의 신작 <비가 그친 후>의 이야기다. 1990년생으로 상당히 젊은 편에 속하는 감독의 데뷔작인 <도쿄의 8월>과 두번째 연출작 <도쿄 해돋이>가 호평을 받고, <여름에 개화하다>가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국제평론가협회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현대 사회가 잃어가고 있는 순수한 감정을 스크린에 투영해내는 능력을 인정받아 1990년대에 강점이 있었던 드라마, 멜로 장르의 계보를 이을 만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 영화는 다리 한 쪽이 불편한 고고학자 유키스케(나카노 타이카 분)와 붕어빵을 파는 코요미(에토 미사 분)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고 가까워지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잦아지고 친밀해 지던 중 코요미가 사고로 가까운 과거의 기억을 기억하지 못하는 후유증을 앓게 된다. 오래된 기억에는 문제가 없지만 이제 막 만들어지기 시작하는 기억들은 다음날 금세 사라져버리는 상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키스케는 그녀에 대한 감정을 혼자서라도 지켜나가려고 하지만, 아직 무르익지 못한 서로의 관계에 대해 혼란스러워지고 만다.
 

영화 <비가 그친 후>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2.

영화 <비가 그친 후>는 클래식한 드라마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듯한 작품이다. 어떤 변주도 없이 두 사람이 만나 관계를 형성해가는 과정을 기존의 공식대로 풀어나간다. 불완전한 상태에 놓인 이들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감정을 형성해 가는 것. 그 동안 우리가 흔하게 만나왔던 사랑과 엇갈림의 모습이다. 다만 여기에 변수가 되는 것이 하나 있다면, 이제까지의 다른 작품들과 달리 두 사람의 관계가 명확히 형성되기 이전에 '기억의 상실'이라는 사건이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에서 애틋한 심상의 극대화를 위해 위기의 발생을 관계의 최고조, 정점에 두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와 같은 설정은 유사한 흐름과 흔한 소재로 극을 이끌어가고는 있지만 감독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이 단지 애틋한 감정만은 아니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게 만든다. 약간의 비틀린 설정을 통해 변주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완전히 친한 관계도 아닌, 그렇다고 완전히 타인의 관계도 아닌, 상당히 애매한 거리에서 여자의 사건에 관여하게 된 남자는 이 상황을 그녀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함께 엮으며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2주만에 깨어난 코요미가 어제의 기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더욱 말이다. 인지상정의 마음으로 오갈 데 없는 그녀에게 자신의 집에서 함께 지내자고 제안하는 남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다음날이면 자신이 왜 유키스케의 집에서 잤는지 기억할 수 없는 여자. 두 사람의 애매한 관계가 지속된다.

03.

한 마디로 이 작품은 사건 그 자체보다 관계의 본질에 대해 들여다보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처음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의 관계라는 것은 타인의 기억에 의해 존재가 유의미한 뒤에야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니 말이다. 아담 샌들러 주연의 <첫 키스만 50번째>에서도 유사한 내용이 다루어진 바 있다. 루시(드류 베리모어 분)의 단기 기억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나카가와 류타로 감독이 이번 작품 속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이야기 역시 유사한 지점에 있다. 다만,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관계와 기억의 고리는 조금 더 진지하고 무거운 톤으로 형성된다.

매일 아침 현재의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 유키스케와 그의 설명에 의존해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코요미에게 상대에 대한 정보의 불균형이 형성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상대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에 대한 내용부터 코요미는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아침을 맞이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코요미에게는 매일이 새로운 기억인 것과 달리 그녀의 새로운 매일들이 유키스케에게는 축적되어 간다는 점이다. 두 사람이 시작할 때 서로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로 시작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이 차이는 대단히 중요한 설정이다.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감정을 쌓아나가는 것이 관계라고 한다면, 이 관계는 애초에 영원히 일방적일 수 밖에 없도록 설정된 것이나 다름 없는 것 아닌가.

또한, 코요미 본인의 의지로 인해 보여준 것이 아니라, 당사자는 기억을 잃어버리는 상황에서 타자인 유키스케가 선택적으로 코요미의 정보를 취득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 또한 다른 문제가 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한 사람에게도 수백, 수천 가지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말이다. A라는 사람에게도 그 사람 나름대로 판단된 나의 세상이 있을 것이고, B라는 사람에게도 그 나름대로 형성된 나의 세상이 있겠지만, 둘 모두 진짜 나의 세상과 모습이 동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유키스케가 코요미의 모습을 쌓아간다고 하더라도, 그 모습이 진짜 코요미의 전부를 아는 행위로 귀결될 수 있는 지는 또 다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이유다.
 

영화 <비가 그친 후> 스틸컷 ⓒ 부산국제영화제


04.

결국 유키스케는 무너지고 만다. 자신은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조차 자신을 기억해 주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 무력해지고 마는 것이다. 오히려 그녀가 모든 기억을 잃었으면 조금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다른 모든 사람을 기억하면서 사고 직전에 만난 자신의 기억만 잃어버린 상태이기에 그는 더욱 큰 상실감을 느끼게 된다. 무엇이든 어느 한쪽의 노력만으로 유지되는 관계는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후의 영화는 조금 상투적이다. 이런 종류의 작품들이 그렇듯 어쩔 수 없이 보여줄 수 밖에 없는 결말의 모양새가 이 작품에서도 그려진다. 커다란 갈등 이후, 기억의 상실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여전히 사랑해주는 유키스케에 대한 기억을 집안 곳곳에 남겨둔 코요미의 행동을 뒤늦게 발견하게 되는 그런 결말. 자신이 적어놓은 기록들의 존재를 그녀 자신이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녀의 어제에 타인은 물론 자신도 없다는 사실의 다른 표현이랄까.

05.

누군가에게 이 영화는 상투적이고 지루한 이야기로 남겨질 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감독이 피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과도 같다. 다만, 이런 종류의 작품이 보여줬던 감성을 좋아했던 관객들에게는 또 하나의 새로운 흥미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유의 분위기는 물론 명암을 활용한 감정의 형성이 극의 감정을 최대한으로 이끌어 내는 점 또한 눈의 띈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코요미의 대사를 통해 '포기의 색깔'이라는 말이 등장한다. 유키스케를 처음 만났을 때 코요미가 그의 눈으로부터 떠올렸다는 말이다. 어쩌면 평범해 보이는 이 단어가 두 사람의 관계를 보고 있으면 의미 있게 느껴지는 이유는, 역시 두 사람의 모습이 포기를 하는 일과 포기를 하지 않는 일 경계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살아가는 일도, 사랑하는 일도 모두가 말이다.
영화 부산국제영화제 비가그친후 나카노타이가 에토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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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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