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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움은 이제 시작" 김지은씨의 승리를 보고 떠오른 이 여성

[하성태의 드라마틱] '안희정 판결'로 보는 넷플릭스 다큐 <글로리아 올레드>

19.09.15 19:30최종업데이트19.09.15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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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등 여성단체 회원들이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행 선고 환영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안 전 도지사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 받았다.ⓒ 이희훈

  
"앞으로 세상 곳곳에서 숨죽여 살고 있는 성폭력 피해자분들의 곁에 서겠습니다. 그분들의 용기에 함께 하겠습니다."

용기와 변화, 그리고 연대. 대법원이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 대한 3년 6개월의 징역형을 확정 판결했던 지난 9일, 한 천주교성폭력상담소 활동가가 대독한 피해자 김지은씨의 길지 않은 입장문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최초 '미투' 폭로부터 이날 대법원 판결까지 554일 동안 싸워온 김지은씨의 용기가 피해자 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법부의 '성인지 감수성'을 인지한 최종 판결이란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 과정엔 여성들의 연대가 있었다.

'미투 운동'을 동력삼아 성차별과 성폭력, 남성 권력, 굳건한 한국 사회의 편견에 맞서온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를 비롯한 '세상의 김지은들'의 연대 말이다. 그런 점에서, 이날 김민문정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가 김지은씨를 향해 건넨 화답은 확실히 감동적이었다.
 

안희정성폭력사건공동대책위원회 등 여성단체 회원들이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성폭행 선고 환영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안 전 도지사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 받았다.ⓒ 이희훈


세상의 무수한 김지은들

"이 싸움은 나 개인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또 다른 무수한 김지은들을 위한 싸움이다. 촛불혁명으로 만들어낸 시대에 여성의 이름으로 정의를 다시 쓰는 싸움임을 잊지 않고 끝까지 멈추지 않고, 오늘 이 승리를 함께 만들어주신 김지은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미투 운동' 이후 처음으로 2018년 대법원 판결에 '성인지 감수성'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판결 다음날인 10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한 조수진 변호사는 이번 안희정 사건 판결에 대해 "대법원이 '성인지 감수성'을 확고하게 앞으로 계속 쓰겠다, (하급심에서도) 인지하라는 시그널을 보낸 것"이라며 "성범죄 피해 여성이 겪게 될 사회적 차별, 선입견, 2차 가해 이런 걸 고려해서 피해자의 행동을 보고 진술을 믿을만 한가, 아닌가를 판단하라는 의미"라고 평가했다.

"사건을 피해자의 눈으로 바라보라"는 말은 얼핏 대수로울 것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안희정 판결'은 이 명제가 여성 피해자들에게 얼마나 절박한가를 새삼 일깨웠다고 할 수 있다. 향후 성폭력 관련 재판이 '미투 운동'이, 한국 사회의 변화상이 2019년 9월 9일 안희정 판결' 전후로 나뉠 것이라는 전망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리하여, 한 평생 용기와 변화, 그리고 연대를 몸소 실천해 온 여성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글로리아 올레드: 약자 편에 선다>(이하 <글로리아 올레드>)의 주인공, '안희정 판결'로 인해 소환될 수밖에 없는 그 이름, 바로 여성 인권 변호사 '글로리아 올레드' 말이다.
 

장편 다큐멘터리 ‘글로리아 올레드 : 약자 편에 선다’.ⓒ 넷플릭스

 
김지은들의 다른 이름, 글로리아 올레드

1941년생, 우리나이로 '팔순'을 2년 앞둔 현역 변호사이자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울고 나서 싸우자"라고 말하는 여성인권 운동가. 일찌감치 성폭력 피해자들의 변호에 앞장섰으며, '미투 운동'의 복판에서 활약 중인 이 글로리아 올레드에 대한 '보통의' 미국인들의 평판이 꽤나 흥미롭다.

<글로리아 올레드>는 그러한 평판을 숨기지 않는다. 뉴스 토론 프로그램, 토크쇼에 출연하는 이 여성 변호사가 '돈과 이름값을 위해 방송을 이용하는 트러블 메이커'라는 평가를 들었다는 사실은 놀랍다.

그는 미국 전역을 돌며 싸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과격한 언사도 마다않는다. 이 애초부터 기울어진 운동장과 같은 (미국도 별반 다르지 않은) 세계에서 움츠러들고, 입을 닫고, 울고 쓰러지면 지는 거다. 미국의 미디어, 법조계는 그를 흠집 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글로리아 올레드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이 나를 욕한다면 내가 논쟁에서 이겼다는 의미다. 만약 그들에게 나를 반대할 만한 설득력 있는 논리가 있다면 그것을 내세웠을 것이다. 내게 대항할 말이 고작 여성 생식기를 뜻하는 욕설뿐이라면 그들은 차라리 항복의 백기를 드는 게 낫다."
(2018년 3월 <뉴스위크> 한국판 기사 '이제 시작이다' 중에서)


네이버에서 '글로리아 올레드'를 검색해 보라. 비교적 최근의 빌 코스비, 알 켈리부터 라이언 오닐, 로브 로우, 타이거 우즈 등 성폭력 사건과 관련됐던 미 유명인사들의 이름이 줄줄이 소환된다.

21세기가 도래하기 훨씬 이전부터 글로리아 올레드는 피해자들의 법정 대리인을 자처했고 그는 이들을 위해 세상에 맞서 목소리를 내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세상의 여성차별에 맞서 미디어라는 스피커를 그 누구보다 적극으로 이용해 왔던 셈이다.
 

장편 다큐멘터리 ‘글로리아 올레드 : 약자 편에 선다'의 스틸 이미지.ⓒ 넷플릭스

 
싸움은 이제 시작입니다

2018년에 공개된 <글로리아 올레드>가 중심에 내세운 사건은 단연 전 세계를 충격에 휩싸이게 한 '연쇄 폭행범' 빌 코스비 사건이다. 2017년 6월 최초 폭로 이후 무려 60명이 넘는 피해자들의 '미투'가 쏟아졌다.

수많은 피해자들이 글로리아 올레드를 찾았고, 그의 손을 잡고 기자회견에 나섰다. 적지 않은 피해자들이 미디어에 노출된 그의 '투사' 이미지를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가 아니면 도저히 안 될 거란 생각에 변호와 기자회견을 자청했다고 고백했다. 글로리아의 세상과의 싸움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순간이라 할 만하다.

<글로리아 올레드>는 결백을 주장했던 빌 코스비에 대항하는 글로리아 올레드와 피해자들의 눈물겨운 투쟁 과정을 카메라에 담는 동시에, 결국 의미 있는 판결을 이끌어내는 피해자들의 법정에서의 호소 또한 놓치지 않고 담아 낸다. 지난 2018년 9월, 미 펜실베니아주 법원은 빌 코스비에게 최대 10년 형을 선고했다. 미국 내 '미투 운동'이 일궈낸 첫 실형 선고였다.

이렇게 20대에 법대와 로스쿨을 졸업한 뒤, 평생 법조계와 여성인권 운동에 몸담은 글로리아 올레드가 '당사자성'에 눈뜨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첫 아이의 아빠와 이혼한 글로리아 올레드에게 닥친 사건은 실로 충격이었다. <뉴스위크> 한국판 기사에 따르면, 그는 젊은 시절 멕시코로 여행을 갔다가 데이트상대였던 의사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임신했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서는 낙태가 허용되지 않아 불법 시술을 받아야 했던 그는 과다출혈로 입원까지 해야 했다. 자신의 아픈 과거를 다큐멘터리 카메라 앞에서 그는 담담히 털어놓았다.

더 놀라운 것은, 올리비아 글레드의 투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끝날 수도 없으리란 사실이다. 그의 주요 의뢰인 중 하나는 바로 트럼프 미 대통령을 취임 3일 전 성추행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 여성이었다. 트럼프와 싸우겠다고 선언한 여성들이 올리비아 글레드를 찾았고, 올리비아 글레드 역시 기꺼이 그들의 옆에 섰다. 그리고, 트럼프 당선 직후 미 워싱턴 광장에서 열린 '반 트럼프' 집회에 참석한 올리비아 글레드는 "여성은 안전하고 저렴하며 합법적인 낙태를 선택할 헌법상의 권리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침묵하지 않을 겁니다. 실패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싸웁시다"라고 외쳤다.

"러브 트럼프스 헤이트"와 "글로리아"를 연호하는 여성들과 청중들에게 둘러싸인 글로리아 올레드는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외친다. '미투' 운동이, 여성 운동의 연대가 변화시킬 세상은 이제 시작이라는 듯, 그 전망 또한 '밝은 미래'가 될 것이라는 듯.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카메라는 사무실 유리창 너머로 빌딩숲을 내려다보는 글로리아 올레드의 뒷모습을 비추며 이런 음성을 전한다.

"싸움은 이제 시작입니다."
 

장편 다큐멘터리 ‘글로리아 올레드 : 약자 편에 선다’영화에 삽입된 뉴욕 매거진 커버 이미지 일부. 빌 코스비의 성폭력을 고발한 여성들의 모습이다. 영화 장면을 캡처했다.ⓒ KATAHDIN PRODUCTIONS

 
끝나지 않은 싸움, 아름다운 연대 

자신 스스로가 피해자였으며, 40년 넘게 '피해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몸소 실천 중인 글로리아 올레드. 그의 딸 역시 법조인으로 성장, 어머니의 길을 따라가는 중이다. 한평생 용기를 내왔으며, 고통스럽지만 아름다운 연대를 위해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오늘도 싸움에 나서는 어머니의 길을.

이 위대한 변호인을 위해 <글로리아 올레드>를 연출한 두 여성 여성 감독은 '로라 브래니건'의 유명 팝송 '글로리아'(Gloria)를 헌사한다. 근래 보기 드문, 다큐로서는 사뭇 감동적인 엔딩이다. 

'글로리아'의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자신의 모습을 완벽히 패러디한 '게이' 친구와 함께 퀴어 페스티벌에 참가, 글로리아 올레드가 오픈카 퍼레이드에 한창이다. 그리고, 페스티벌 참가자들의 환호에 응답하는 글로리와 올레드의 환한 미소가 카메라에 담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연대인가.

때때로 고통스러운 싸움일지라도 결코 물러서지 않을 거란 이 70대 여성 파이터가 설파하는 비전에, 현실론에, 낙관론에 무조건 동참하고 싶어지는, 마치 마법과 같은 엔딩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 여기에서도, 거기에서도, 다시, 싸움은 이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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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영화 기자, 오늘은 프리랜서 글쟁이. 살다보니 시나리오 쓰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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