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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차별과 인종차별이 같나?"... 법관의 질문이 씁쓸했다

[리뷰]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 법의 역사를 뒤바꾼 혁신적인 인물

19.09.09 11:13최종업데이트19.09.09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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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변호인> 포스터ⓒ CGV 아트하우스

 
미국 여성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그린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마케팅 단계에서 실수하면서 관객의 외면을 받은 작품이다. 한국 배급을 담당한 CGV 측에서 포스터 속 '리더', '변호사', '활동가', '정의' 등의 문구를 '핵인싸', '독보적인 스타일', '데일리룩', '러블리한 날' 등으로 바꾸면서 논란에 휩싸였다.

이러한 단어 교체가 문제가 된 이유는 영화의 무드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세련되고 시원한 문구가 시선을 끌 때도 있다. 하지만 영화와 주인공이 지닌 가치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이는 마케팅의 실패나 다름없다. 
 

<세상을 바꾼 변호인> 스틸컷ⓒ CGV 아트하우스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성에 근거한(on the basis of sex)' 차별을 이야기 한 미국 역사상 두 번째 여성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미국 내의 성 차별을 담아낸 이 작품은 '자연법'이라 여겨지는 성의 역할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고 이를 바꾼 기념비적인 인물의 생애를 조명한다.

영화는 도입부에서 말끔한 양복차림을 입은 남자들을 보여준다. 그들은 모두 하버드대학교 로스쿨 입학생들이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단 2%에 해당하는 9명의 여학생들이 있다. 그 중 한 명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는 남편 마틴이 암에 걸리자 남편의 학업을 돕고 아이를 돌보는 힘겨운 나날들을 보낸다. 마틴은 아내 루스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녀가 좋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성 차별이 공공연했던 시대에 그녀는 쉽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결국 교수 자리를 얻게 된다.
 
그리고 1970년대, 루스는 한 남성의 사건을 접하게 된다. 이혼을 한 그는 혼자 노모를 모시고 있지만 남성이라는 이유로 지원금을 받지 못하고 있다. 당시 여성은 부모를 부양하면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이에 루스는 '성에 근거한(on the basis of sex)' 차별이 담긴 178건의 법안을 건 재판을 진행하게 된다. 이 법안들의 특징은 남녀의 성 역할을 한정 짓고, 남녀에 따라 다른 판결을 내린다는 점이다.
  

<세상을 바꾼 변호인> 스틸컷ⓒ CGV 아트하우스

 
영화는 세 가지 측면에서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조명한다. 첫 번째는 미국 사회의 여성 차별 문제다. 긴즈버그의 수업 중, 한 여성의 재판에 배심원이 전원 남성으로 선정돼 여성이 이의를 제기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에 한 남학생은 "여성이 배심원으로 참석하면 아이는 누가 돌보냐"고 말한다. 자신은 깨어있는 사람이라 말하는 이 남학생은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부정하고 역할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긴즈버그는 사회적 차별은 존재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당시 여성은 뉴욕에서 순찰을 할 수 없었고 신용카드는 남성 명의로 만들어야 했으며 초과근무를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에 다닐 때는 여자 화장실도 없었다고 말한다. 긴즈버그는 남성과 여성의 권리가 동등해야 한다고 말한다. 같은 맥락으로, 그는 여성이 부모를 부양하면서 받을 수 있는 세금 공제를 남성은 못 받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다.
 
두 번째는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법과의 대결이다. 긴즈버그가 신청한 재판은 50년간 지속된 인권 전쟁의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재판이다. 이 재판에서 그녀가 마주한 건 인류의 역사를 들먹이는 재판관들이었다. 그들은 인류가 살아온 보편적인 삶의 형태를 이야기하며 남성, 여성의 역할이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 상대편 변호사인 짐 보자스는 성별에 따른 차별이 남녀 모두에게 이롭다고 말한다.
 
특히 세법 변론을 함께 준비하던 남편 마틴에게 "성 차별과 인종 차별이 같다고 생각하냐"는 재판관들의 질문도 인상적이었다. 이는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이라는 법관들조차 당시 성 차별에 무지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긴즈버그의 싸움이 역사에 길이 남은 이유는 미국 사회 성 차별에 대해 처음으로 인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바꾼 변호인> 스틸컷ⓒ CGV 아트하우스

 
세 번째는 믿음이다. 재판을 앞둔 긴즈버그에게 시민 자유연맹 대표 멜 울프는 마틴 역시 같이 변론을 준비해야 된다고 말한다. 마틴이 남성이기에 재판관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고 재판 경력이 많은 만큼 믿음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평생 재판장에 서 본 적 없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만 했던 루스는 믿음을 얻지 못하고 상대편 변호사에 의해 합의를 종용받기도 한다. 경력이 부족한 여성 법조인의 승리를 그 누구도 믿지 못한다.
 
이런 긴즈버그에게 큰 믿음을 주는 존재는 남편인 마틴과 딸 제인이다. 마틴은 자신을 위해 많은 걸 포기하면서도 수석 졸업을 한 아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안다. 그는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을 보인다. 이는 제인 역시 마찬가지다. 시위 등 행동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제인은 법률을 통해 성이라는 가장 큰 장벽을 없애려는 어머니의 도전에 확고한 믿음을 보낸다.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미국 내 '차별'의 역사를 다룬 작품 중 <히든 피겨스>와 함께 통쾌한 여성 서사를 선사하는 영화이다. <히든 피겨스>가 인종차별 문제에도 함께 초점을 맞췄다면 이 작품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라는 상징적인 인물을 통해 성별에 따른 차별을 바탕으로 정의와 평등을 이야기한다. 만약 홍보에 있어서 긴즈버그라는 인물의 이런 상징성을 더 표면적으로 내세웠다면 더 많은 이들이 그녀가 주장하는 가치에 대해 한 번쯤 더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준모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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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겸 영화 칼럼니스트 김준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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