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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만든 사극 '봉오동 전투', 이거 알고 보면 더 완벽

[사극으로 역사읽기] 이 영화의 주인공은 홍범도가 아니다

19.08.06 18:55최종업데이트19.08.06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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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의 이 글에는 영화 <봉오동 전투>의 내용이 일부 담겨 있습니다.
 

<봉오동 전투> 포스터.ⓒ 더블유 픽처스

  
'한국 독립운동' 하면 흔히 만세 시위나 폭탄 투척 등이 연상된다. 이런 방식이 주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살수대첩이나 명량대첩까지는 아닐지라도 '대첩'으로 표현할 만한 승전도 어느 정도 있었다. 1920년 6월의 봉오동 전투도 그중 하나다.
 
이 전투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연합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의 대대급 부대를 격파한 사건이다. 일본군이 대패한 것은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됐기 때문이다. 봉오동 산들에 포위돼 사방에서 사격을 받았던 것이다. 독립운동가 이강훈(1903~2003년)이 1975년 펴낸 <무장독립운동사>에 당시의 봉오동 지형이 설명돼 있다.
 
"왕청현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가량 떨어진 산간이다. 장백산의 지맥인 고려령의 험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꾸불꾸불 갈 지(之)자 형으로 장장 2십 리를 뻗은 계곡 지대에 1백 수십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다."
 
사방이 산이고 중앙은 편평한 봉오동 안으로 일본군이 독립군 잡는다며 발을 들였다. 얼마 안 있어 그들은 산 곳곳에 매복한 독립군들로부터 집중 포격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독 안에 든 쥐 신세가 된 게 그들의 패인 중 하나였다.
 

<고등학교 국사>에서 보여주는 봉오동의 위치.ⓒ 국사편찬위원회

  
당시 임시정부 군무부의 발표에 따르면, 일본군에서는 전사 157명 및 부상 300여 명의 손실이 발생한 반면, 한국군에서는 전사 4명 및 부상 2명의 인명손실이 생겼다. 그런데 일본군 집계에 따르면, 일본군에서는 1명이 전사하고 2명이 부상했으며, 한국군에서는 33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부상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기획하고 장세윤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이 집필한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의 독립전쟁>은 이렇게 정리한다.
 
"중국 신문인 <상해신문보>, 간도 국민회의 호외, <독립신문>, 홍범도의 일지, <김정규 일기> 등을 토대로 냉정히 조사하면, 대체로 일본군 측 피해는 120 또는 150명 내외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독립군 측에서는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지 않았나 추정된다."
 
독립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은 것으로 보이지만 일본군이 120 혹은 150명 내외의 대규모 인명손실을 입었으니, 봉오동 전투가 독립운동사에 기록될 만한 일대 사건인 것만은 확실하다. 이 사건을 전문적으로 다룬 영화가 7일 개봉되는 원신연 감독의 <봉오동 전투>다.
 
영웅 중심의 기존 독립운동사에 대한 도전
 

독립군 황해철(유해진 분).ⓒ 더블유 픽처스

  
<봉오동 전투>는 다소 색다른 관점에서 독립전쟁을 조명한다. 독립군 지도부나 명망가들의 시선이 아니라 부대원인 민중들의 시각으로 항일전쟁을 바라보는 것이다.
 
공동 주인공인 황해철(유해진 분), 이장하(류준열 분), 마병구(조우진 분)는 홍범도 대장의 산하 부대에 속한 중하위 간부들이다. 역사가 관심을 두지 않는 그런 부대원들의 입장에서 독립전쟁을 조명하다 보니, 이 영화는 거의 다 역사적 상상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다.
 
해철이 이끄는 부대원들은 대부분 농민들이다. 부농이나 지주는 없는 듯하다. 다들 소작농 출신들로 보인다. 고향도 제각각이다. 함경도·강원도·경상도·제주도 출신들이 영화에 등장한다. 각지에서 모여든 민중들이 봉오동 전투라는 역사적 승리를 도출한 원동력이었음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영웅 중심으로 서술되는 기존의 독립운동사에 대한 도전이라 할 수 있다.
 
두만강 유역에서 성장한 해철은 어릴 때 일본군의 만행으로 동생을 잃었다. 일본군 몇 명의 두만강 도강을 안내해준 게 화근이었다. 두 형제 덕분에 무사히 강을 건넌 일본군이 도강 직후에 선물이라며 건네준 보따리에 폭탄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해철의 항일투쟁을 추동하는 에너지 중 하나는 그것이다. 일본제국주의한테 동생을 잃었다는 분노가 가슴 깊숙이에서 그를 흔들어대고 있다. 그런 그가 비슷한 계급의 전우들과 함께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에 참여해서 역사적 승리를 일궈내는 과정이 영화 스토리를 이루고 있다.
 
카메오 홍범도
 

독립군 이장하(류준열 분).ⓒ 더블유 픽처스

  
영화 막판에 카메오로 등장하는 홍범도를 기대하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갑자기 등장한 홍범도 때문에 주연배우 유해진이 순간적으로 조연처럼 비칠 수도 있다. 다른 시대의 항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명장이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1920년 6월의 만주에 등장한 것 같은 느낌이 잠시나마 일어날지도 모른다.
 
홍범도처럼 봉오동 전투를 실제 지휘했던 인물들이 이 영화에서는 낮은 비중으로 처리되고 있다. 홍범도가 카메오로 등장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그의 부대에 참가한 민중들 사이에서 있었을 법한 스토리가 극적 상상을 통해 영화 화면상으로 재구성된다.
 
상상력에 의존하다 보니 실제 역사와 많이 어긋날 만도 하지만, 이 영화는 그렇지도 않다. 스토리의 전반적 흐름이 실제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실제의 봉오동 전투는 오후 4시 20분경 천둥·번개와 함께 쏟아진 비와 우박 때문에 종결된 것에 비해, 영화 속의 봉오동 전투는 거의 오로지 한국군의 압도적 공세로 인해 종결된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 이처럼 실제와 영화 사이에 괴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타 사극과 비교하면 실제 역사를 상당히 존중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또 민중의 역량을 높게 평가했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괜찮은 사극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시대상이 좀더 충분히 반영됐으면 하는 안타까움도 조금은 있다.
 

독립군 마병구(조우진 분).ⓒ 더블유 픽처스


아쉬움 1 : 사라진 제국주의의 세련미

일례로, 영화 속 일본이 지나치게 야만스럽게 묘사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해철의 동생을 죽이는 장면도 그렇고, 한국 호랑이를 잔인하게 해부하는 일본군 얼굴에 호랑이 피가 잔뜩 묻어 있는 장면도 그렇고, 일본군이 한국 농민 여성들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장면도 그렇다. 물론 충분히 있을 수 있었던 장면이기는 하지만, 일본제국주의가 대체로 그런 외양을 띠었던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는 장면들이다.
 
일본을 포함해서 당시의 제국주의 국가들은 '문명개화'라는 명분을 걸고 식민지를 착취했다. 본질적으로는 탐욕스러웠지만,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세련된 외양을 유지했다. 일본 역시 적어도 겉으로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또 일본은 전쟁이 아닌 외교로 조선을 강점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노골적인 야만성을 보여주기는 쉽지 않았다. 겉으로는 아닌 척 하면서도 속으로는 야만적이고 탐욕스러운 게 제국주의였다. 영화 속 제국주의는 속뿐 아니라 겉까지 너무 지나치게 야만스럽다는 점에서 좀 과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세련미 속에 감춰진 야만성이 제국주의의 본질이었다는 점을 드러내지 못해 다소 아쉽다.
 
아쉬움 2 : 승리의 핵심 동력

또 봉오동 전투 승리의 원동력이 좀더 세밀히 다뤄지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피할 수 없었다. 이 영화에서는 배우 유해진의 친숙한 얼굴로 나타나는 서민 대중의 열정이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핵심 동력으로 나타난다. 물론 그런 측면도 컸지만, 당시가 3·1운동 직후였다는 점을 이 영화는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다.
 
봉오동 전투가 대승으로 끝날 수 있었던 것은 독립군 부대들의 연합 덕분이었다. 북로군정서·국민회·군무도독부·신민단·광복단·의군단 등이 힘을 합쳐 800~900명 내외의 병력을 봉오동 골짜기에 배치했기에 대대급 일본군 부대를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국 독립운동에서는 내부 분열이 무척 심했다. 강력한 자금력을 확보한 지도자가 없었던 탓에, 이념과 사상을 놓고 오랫동안 분열상을 보였다. 그런 분열로 인해 한국 독립운동은 좀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런데 봉오동 전투 때는 독립군이 단결해서 승리를 얻어냈다. 독립군이 분열을 극복하고 단일 대오를 이뤘던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1919년 3·1운동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200만 정도의 한국인들이 참여한 3·1운동이 독립운동권의 통합을 촉진하는 요인이 됐던 것이다.
 
독립운동가들이 상하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한때나마 뭉칠 수 있었던 것도 3·1운동의 열기를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거대한 민중혁명 직후에는 운동권이 민중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운동권의 분열이 감소하거나 억제되기 마련이다. 1919년에 임시정부가 구성된 것이나 1920년에 봉오동 전투 및 청산리 대첩이 가능했던 것은 독립운동권이 민중의 기세로 인해 분열상을 보이기 힘들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항일투쟁의 단일 대오를 촉구하는 그런 분위기가 봉오동 전투를 낳은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이 전투는 민중이 나서면 운동권이 분열하기 힘들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민중 중심의 독립운동을 보여주고자 한 <봉오동 전투>가 그 같은 민중의 역량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점은 조금 아쉬운 대목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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