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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독립군에 불안해 하던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

[TV 리뷰] <다큐세상> '봉오동 전투-독립전쟁의 서막을 열다' 편

19.08.02 11:36최종업데이트19.08.02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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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오동 전투-독립전쟁의 서막을 열다’ 편다큐의 한 장면ⓒ KBS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의 독립군은 1920년 6월 7일 중국 간도 왕청현 봉오동에서 일본의 정규군을 상대로 대규모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국내외 동포들과 세계만방에 조선 독립의 희망을 알린 신호탄이자 항일무장투쟁의 서막을 연 역사적인 사건이다.

독립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당시 세계적인 수준의 군사력을 자랑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어떻게 이길 수 있었을까?

지난 7월 23일 KBS에서 방송한 <다큐세상> '봉오동 전투-독립전쟁의 서막을 열다' 편은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봉오동 전투가 벌어진 현장을 방문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증언과 각종 기록을 바탕으로 승리 비결을 분석하고, 봉오동 전투가 우리 민족사에 남긴 의미를 살펴봤다.
 

▲ ‘봉오동 전투-독립전쟁의 서막을 열다’ 편다큐의 한 장면ⓒ KBS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 만세운동' 이후 국내외 정세는 조선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한민족이 얼마나 독립을 열망하는지를 전 세계에 알려주었던 평화적인 3.1 만세운동을 일제는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일본의 폭력에 자극을 받아 무장독립투쟁에 돌입했다.

국제 정세도 무장독립투쟁에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 승전국들은 패전국과의 조약 협상, 그리고 전후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조치를 협의하기 위해 1919년~1920년 파리에서 '파리강화회의'를 열었다.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패전국들의 식민지 문제를 해결하는 원칙으로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웠다.

민족자결주의의 발표는 당시 강대국의 지배를 받던 전 세계의 약소민족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발칸반도 및 동유럽의 패전국의 식민지에만 해당하는 원칙일 뿐이었다.

서구열강이 조선의 독립에 관심 없음이 확인되자, 평화적인 독립선언이나 만세시위보다 무장독립투쟁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받았고 곳곳에서 다양한 독립군 단체가 결성되었다. 1919년 만주 일대엔 60여 개에 달하는 독립군 단체가 생겼다.
 

▲ ‘봉오동 전투-독립전쟁의 서막을 열다’ 편다큐의 한 장면ⓒ KBS


1920년 1월부터 6월까지 독립군 단체들이 28차례나 국내진공작전을 벌이자 일제는 국경 지역에 더 많은 병력을 배치하고 조선 독립군 및 독립 투쟁 세력을 토벌하는 작전을 폈다. 1920년 6월 4일, 중국 국경을 침범한 일본군은 삼둔자 마을에 몸을 피한 독립군을 추격하다가 놓치자 민간인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다.

기존의 병력으론 독립군을 토벌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일본군 지휘부는 야스카와 추격대대(월강 추격대)를 편성하여 '간도 독립군 섬멸 명령'을 내린다. 독립군의 움직임에 불안함을 느낀 일본군은 단단히 준비한 군대를 보내고 국경을 넘는 무리수까지 두었다.

<다큐 세상> '봉오동 전투-독립전쟁의 서막을 열다' 편의 제작진은 독립운동과 관련한 전문가들을 만나 봉오동 전투의 승리가 어쩌다 일어난 게 아니라 치밀한 준비 아래 이뤄낸 결과임을 확인한다. 독립군들은 봉오동에서 일본군과 맞서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을까?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네 가지
 

▲ ‘봉오동 전투-독립전쟁의 서막을 열다’ 편다큐의 한 장면ⓒ KBS


하나, '연합의 힘'이다. 흩어진 독립군 단체들은 대통합을 이루어 봉오동 전투에 임했다. 여러 독립군 단체들은 접촉하기 좋은 위치인 봉오동에서 전투 한 달 전부터 통합 논의를 나누었다. 그 결과 최진동 형제가 이끄는 군무도독부, 홍범도 장군이 지휘하는 대한독립군, 안무가 통솔하던 대한국민회 등이 손을 잡고 독립군 연합체인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한다. 대한북로독군부는 보급, 인원 등 각 단체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하며 군대로서 체계를 갖추었다.

둘, '보급의 힘'이다. 1916년 당시 북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의 숫자는 18만 명에 달했다. 경제적인 기반을 마련한 이들은 조선 독립군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 주었다. 이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학교를 세워 교육으로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시켰다. 무기, 식량, 의복 등 보급도 도왔다.

특히 봉오동 전투에서 사용한 독립군의 무기는 주목할 만하다. 이전까지 독립군들은 조총 수준에 불과하던 화승총을 쓰거나, 다양한 수입 무기를 구해 사용했다. 당연히 성능이나 탄약 보급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봉오동 전투는 상황이 달랐다. 독립군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본국으로 돌아가던 체코 군단이 무장을 해제하는 과정에서 넘긴 러시아제 무기 '모신나강'이란 최신 무기를 대량으로 사들여 전력과 탄약 보급을 크게 강화했다.
 

▲ ‘봉오동 전투-독립전쟁의 서막을 열다’ 편다큐의 한 장면ⓒ KBS


셋, '작전의 힘'이다. 독립군은 산세가 험하고 산림이 우거졌으며 고립된 골짜기이지만, 꽉 막혀 퇴로가 차단된 공간이 아닌 봉오동의 지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최선의 작전을 세웠다. 독립군은 봉오동을 둘러싼 산마다 부대를 매복시켰다. 독립군의 화력을 화승총 수준으로 오판한 일본군은 매복의 가능성을 무시하고 추격 작전을 벌이다가 속절없이 무너졌다. 갑작스레 기상이 나빠져 우박이 내리는 통에 일본군은 적과 아군의 식별마저 어려웠다.

넷, '무명 독립군들의 힘'이다. 봉오동 전투의 승리는 연합, 보급, 작전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이름을 남기지 못한 수많은 독립군의 희생이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향을 떠나 무장독립투쟁에 몸을 던진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들이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최초의 승전보다. 봉오동 전투 이후 일본군은 독립군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되었다. 제대로 훈련된 군대이고 작전, 정보력도 한 수 위라고 평가할 정도로 두려움을 가졌다.

"승리의 역사를 기억하는 건 우리의 의무다"
 

▲ ‘봉오동 전투-독립전쟁의 서막을 열다’ 편다큐의 한 장면ⓒ KBS

  
우리 민족은 봉오동 전투에서 이기며 다시 한번 독립의 희망을 품게 되었다. 상해임시정부는 본격적인 독립군 통합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은 청산리 전투의 대대적인 독립군 연합작전으로 이어졌다. 청산리 전투가 승리를 거둔 밑바탕엔 동포 사회에 녹아든 봉오동 전투의 경험이 자리 잡고 있다.

봉오동 전투에 참전한 무명 독립군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들이 바란 건 부와 명예가 아니다. 오로지 조국의 독립이었다. 그것을 위해 이들은 목숨을 바쳤다. <다큐 세상> '봉오동 전투-독립전쟁의 서막을 열다' 편은 마지막에 이렇게 강조한다.

"승리의 역사 봉오동 전투. 그 역사를 기억하는 건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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