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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놀라게 한 '윤봉길 의거', 한국사 뛰어넘는 사건이었다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드라마 <이몽> 속 윤봉길 의거

19.06.30 13:59최종업데이트19.06.30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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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의 윤봉길(이강민 분).ⓒ MBC

 
 
1932년 4월 29일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윤봉길 의거가 MBC 드라마 <이몽>에서 비중 있게 다뤄졌다. 의열단장 김원봉(유지태 분)에 의해 발탁된 뒤 김구(유하복 분)의 지휘와 김원봉의 협력 하에 의거를 준비한 윤봉길(이강민 분)이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거사에 성공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군 지도부와 외교관들이 윤봉길의 폭탄 때문에 죽거나 다친 사건은 임시정부에 대한 일본의 탄압으로 이어졌고, 이는 임정이 1919년 이래의 보금자리인 상하이를 떠나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 뒤 임정은 대체로 서쪽 방향인 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으로 이동해 갔다.
 
드라마 <이몽>에서 윤봉길이 김원봉에 의해 발탁됐다는 부분이나, 윤봉길이 김원봉·김구와 함께 의거를 준비했다는 부분은 실제 사실과 다르다. 김원봉과 김구는 개인적으로는 친했지만, 공식 활동에서는 경쟁자였다. 김원봉은 민중을 착취하는 정부 체제를 반대한다는 의미에서 무정부주의자였고, 김구는 그 같은 진보적 이념을 거부하고 오로지 민족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민족주의자였다.
 
사상적으로 화합하기 힘들었다는 점 외에, 두 사람은 투쟁 방식이 비슷하다는 점 때문에도 경쟁자가 되기 쉬웠다. 두 사람 다 처음에는 암살 같은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수행하다가, 나중에는 조선의용대(김원봉)와 한국광복군(김구·김원봉) 같은 군대를 운용하는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나이차는 22년으로 김구가 아버지뻘이지만, 사상이 다른 데다가 투쟁 방식이 겹치다 보니 라이벌 관계가 형성될 소지가 많았다. 그런 두 사람이 윤봉길 의거를 함께 준비하는 것은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폭탄을 던지는 윤봉길ⓒ . MBC

 
 
<이몽>이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 부분이 또 있다. 바로, 윤봉길 의거의 영향에 관한 것이다. <이몽>에서는 이 의거가 일본인들에게 충격을 주고 임시정부가 상하이를 떠나게 만드는 정도의 영향만 끼친 것처럼 묘사됐다.
 
하지만, 이 사건은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한국사를 뛰어넘는 일이었던 것이다. 항일투쟁을 한민족과 일본 사이의 일로만 좁게 이해하는, 또 그렇게 이해할 수밖에 없는 우리 한국인들의 시각이 윤봉길 의거의 역사적 의의를 축소시키는 측면이 없지 않다. 민족적 관점에서 벗어나 관찰하면, 이 일은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고 평가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대형 사건이었다.
 
윤봉길 의거 7개월 전인 1931년 9월,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략을 감행했다. 이로 인한 중국인들의 저항과 비판적인 세계 여론을 피해나갈 목적으로 일본이 벌인 게 1932년 1월 상하이 사변이다.
 
상하이(상해)에서 발생한 중국군과 일본군의 충돌을 빌미로, 일본은 육군 3개 사단을 파견해 중국군을 몰아내고 상하이를 점령했다. 상하이에는 외국인 구역인 조계를 경비하는 일본군이 있었다. 그 일본군이 중국군과 충돌을 빚자, 일본군 3개 사단이 증파됐던 것이다.
 
그렇게 점령한 상하이에서 일본이 벌인 행사가 1932년 4월 29일의 천장절(일왕 생일) 겸 전승 축하 기념식이었다. 히로히토(현재 일왕의 할아버지) 생일과 상하이 점령을 축하하는 행사장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던진 것이다.
 
3개월 전인 그해 1월에는 이봉창 의사(1901~1932)가 히로히토 일왕 암살에 착수했다가 미수에 그쳤다. 그로부터 3개월 뒤에는 윤봉길(1908~1932)이 히로히토의 생일 기념식에 폭탄을 던졌으니, 히로히토(1901년 생)의 서른한 살은 수난의 한 해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진짜로 억울한 수난을 당한 주인공인 그 때문에 그해에 순국한 이봉창과 윤봉길이다.
 
 

의거 후 만세를 부르는 윤봉길.ⓒ MBC

 
 
일본이 만주사변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를 돌파할 목적으로 새롭게 침략을 개시한 곳이 상하이였다. 바로 그 상하이에서 일어난 일이 윤봉길 의거이기 때문에, 이 사건은 단순히 한국 독립운동의 의미만 띠는 게 아니라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에 항의하는 의미도 동시에 띠는 것이었다. 중국은 세계 제국주의의 경쟁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그런 뜻에서, 윤봉길 의거는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 사건이었다.
 
이봉창 의거와 더불어 윤봉길 의거는 1919년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뒤 한동안 활발했다가 얼마 안 있어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 진영에 일대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됐다. 임시정부 수립 뒤의 좌우 대립과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직무유기로 인해 침체에 빠진 독립운동 진영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두 청년의 의거를 보고 충격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독립운동이 다시 활기를 찾는 계기가 됐다. 윤봉길 의거가 드라마 <이몽>에서처럼 임시정부의 상하이 탈출을 초래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독립운동에 미친 긍정적 영향이 훨씬 더 컸다.
 
이봉창 의거와 더불어 윤봉길 의거는 중국인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특히 윤봉길 의거가 그랬다. 중국인들 입장에서는, 윤봉길이 상하이에서 벌인 사건이 한국 독립운동보다는 중국 항일투쟁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었다. 중국인이 해야 할 일을 한국 청년이 대신 수행한 것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격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시 용산구의 전쟁기념관에서 찍은 윤봉길상.ⓒ 김종성

 
 
전년도인 1931년 7월 만주에서 만보산 사건이 발생했다. 만주에 정착한 한국 농민들과 현지에 살고 있던 중국 농민들의 분쟁으로 촉발된 사건이다. 두 민족 농민들의 패싸움으로 끝날 수도 있는 사건에 일본 경찰이 개입하면서 사건이 커지게 됐다. 일본 경찰은 총을 쏘며 중국 농민들을 몰아냈다. 이를 계기로 중국인들은 한국인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게 됐다. 한국인과 일본인을 같은 부류로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봉창 의거에 뒤이은 윤봉길 의거는 만보산 사건으로 발생한 한·중 두 민족의 불편한 감정을 일소하는 데 기여했다. 중국인들은 한국인이 일본 편이 아니며 중국과 같은 처지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이는 중국인들이 한국 독립운동을 열심히 응원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됐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훗날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라는 군대를, 김구가 한국광복군이라는 군대를 중국에서 창설할 수 있었다.
 
이처럼 윤봉길 의거는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뿐 아니라 중국 침략에 대해서도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했다. 더 나아가 한·중 두 민족을 단결시키는 역할도 했다. 이는 1945년 일제 패망 때까지 두 민족이 공고한 연대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 기반이 됐다. 이 같은 윤봉길 의거의 진짜 면모들이 드라마 <이몽>에서 제대로 조명되지 않아 안타까움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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