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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이후 '원나잇'... 적극적인 '돌싱' 여성의 삶을 그려내다

[넘버링 무비 148] 잊혔던 나를 찾는 여정, 영화 <글로리아 벨>

19.06.12 15:56최종업데이트19.06.12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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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버링 무비는 영화 작품을 단순히 별점이나 평점으로 평가하는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넘버링 번호 순서대로 제시된 요소들을 통해 영화를 조금 더 깊이, 다양한 시각에서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편집자말]

영화 <글로리아 벨> 메인포스터ⓒ 소니픽쳐스


01.

2013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스크린 데일리' 심사위원 점수 최고점을 기록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은 영화가 있었다. 심사에 참석한 심사위원의 과반수 이상이 이 영화에 만점인 4점을 줬고, 3.4라는 평점으로 당해 최고점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에큐메니칼 심사위원상 경쟁부문 수상, 독일예술영화조합상, 유럽단편영화상, 그리고 여우주연상까지. 비록 대회 최고상인 금곰상까지는 수상하지 못했으나 영화제에서 가장 뜨거운 작품임에는 분명했다.

영화 <글로리아>를 연출한 세바스티안 렐리오 감독은 주인공인 글로리아(폴리나 가르시아 분)의 모습을 통해 중년 여성의 일상과 욕망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이혼한 지 10여 년이 되는 50대 후반의 싱글 여성. 그녀가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통해 사회적 관습이나 외부의 시선에 순종하며 자신의 욕망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남은 삶과 그 삶 속에 다시 있을지도 모르는 사랑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여성의 모습을 그려낸 점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17년 <판타스틱 우먼>을 통해 트렌스젠더 여성의 이야기를 그려냈었던 세바스티안 렐리오 감독은 작품이 크랭크업 하자마자, 2013년의 기억을 되살려 영화 <글로리아>를 다시 한번 연출하기로 결심한다. 여자 주인공인 글로리아는 칠레를 대표하는 배우였던 폴리나 가르시아에서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 줄리안 무어로 바뀌고, 칠레의 산티아고였던 영화 속 배경은 미국 뉴욕. 그러니까 영화 <글로리아 벨>은 자신의 원작인 <글로리아>의 미국판 리메이크 작품인 셈이다.

02.

영화 <글로리아 벨>은 원작인 <글로리아>와 거의 동일한 모습을 하고 있다. 리메이크 자체를 원작의 감독이 직접 나서 스스로 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에 이런 경우 어떻게 설명하는 것이 맞는지 조금 당황스러울 정도다. 그래서인지 영화의 내용은 물론, 대부분의 장면들까지도 원작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가장 큰 변화라면 역시 폴리나 가르시아와 줄리안 무어, 두 배우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 다만 이것은 취향의 차이일 뿐, 두 배우의 연기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에는 큰 의미가 없다.

신작의 글로리아 역을 맡은 줄리안 무어의 경우에는 지난 2015년 개봉한 영화 <스틸 앨리스> 이후 8편의 작품에 출연하며 왕성한 활동을 보였으나, 스스로 극을 이끌어 나가는 역을 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듬해인 2016년에 개봉한 <로렐>에서 미국 뉴저지 최초의 여성 부서장을 꿈꾸는 형사를 맡아 극을 주도한 바 있으나, 엘렌 페이지와의 역할 분담이 적지 않았다.)

때문에 영화 <스틸 앨리스>에서의 줄리안 무어를 좋아했던 관객이라면 이번 작품 속에서 줄리안 무어가 어떻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지 지켜보는 것은 상당히 큰 즐거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만큼 영화 <글로리아 벨>에서 줄리안 무어라는 배우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히 큰 편에 속한다는 뜻이다.
 

영화 <글로리아 벨> 스틸컷ⓒ 소니픽쳐스


03.

퇴근 뒤에 클럽에 들러 데이트 상대를 찾고 마음에 드는 사람과 하룻밤을 즐겁게 보내고. 글로리아는 이혼한 지 10년도 넘은 돌싱이다. 성인이 된 딸과 아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혼자 살고 있는 그녀는 자신의 삶이 필요로 하는 행복과 성적 만족, 타인과의 교류에 적극적인 인물이다. 늦은 밤 홀로 집에 돌아와서 느끼는 근원적 외로움에 대한 해답은 여전히 찾을 수 없지만 출근길에 흘러나오는 노래를 격렬히 따라 부를 정도로 열정적인 삶을 갈구한다. 요가도, 웃음 치료도 그녀는 자신의 삶을 풍족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라면 조금도 거릴 것 없이 뛰어들고 본다.

그런 그녀의 삶 속에 새로운 사랑이 찾아온다. 테마 파크의 소유주인 아놀드(존 터투로 분)다. 클럽에서 만나게 되기는 했지만, 이런 감정을 다시 느끼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며 수줍게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글로리아도 마음의 문을 열고 만다. 그녀에게도 매일 클럽에서 모르는 사람과 의미 없는 춤을 추는 것보다는 누군가와의 진실된 관계가 삶을 더욱 활기 있게 해줄 테니 말이다. 두 사람 모두 한 번의 이혼을 경험한 바 있으니 오히려 더욱 잘 된 일인 것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가 여전히 가족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부모에게 의존적인 두 딸은 물론, 별거 중인 전처까지도 사소한 일이 생기면 연락을 해온다. 그는 자신이 과거의 가정을 떠나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이라고, 새로운 삶을 살고 싶어 위 절제술까지 받으며 모습을 변화시켰다고 말하지만 그의 삶은 조금도 변한 것이 없어 보인다. 모든 것은 그의 우유부단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그런 태도는 글로리아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문제가 된다.

04.

영화 속에서 비춰지는 관계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가 이처럼 철저하게 대조적으로 그려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느 쪽의 방식이 더욱 옳다는 가치적 판단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글로리아가 자신의 주도적인 삶을 개척해 가고자 하는 모습에 힘을 싣기 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등장하는 장면과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 다시 혼자가 된 글로리아가 천천히 무대로 나가 음악에 몸을 맡기고 춤을 추며 자신의 감정에 녹아 드는 부분. 이 지점은 영화의 러닝타임이 쌓아온 에너지를 발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세바스티안 렐리오 감독은 자신의 전작들을 통해서도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왔다. 형식을 설정해 이야기를 직조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와 그 감정 자체를 인정함으로써 인물에게 다가가고 그 감정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퀴어 영화였던 지난 작품 <판타스틱 우먼>이 기억난다. 대부분의 퀴어 작품들이 대상의 정체성을 설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과 달리 그는 그저 이야기를 보여주었다. 대상의 정체성을 설정하는 것이 극 속에서 일어나게 될 사건들에 대한 인과성을 확보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 정체성을 설정하고 인과성을 구한다는 행위 자체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글로리아 벨> 스틸컷ⓒ 소니픽쳐스


05.

이 영화 <글로리아 벨>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관객들에게 소구하기 힘든 작품에 속한다. 잘 알려진 감독의 작품도 아니고, 유명한 배우들이 여럿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소재 자체도 다양한 관객층을 아우르기에 어려운 부분이 있다. 게다가,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손꼽힐 <기생충>과 비슷한 시기에 나란히 개봉하게 되었으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어느 작품에나 그 매력을 이끌어낼 포인트가 하나쯤은 있기 마련.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이 영화에는 줄리안 무어의 연기가 있다. 100분 남짓한 시간 동안 극을 이끌어가는 그녀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을 선택할 이유는 충분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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