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부자와 가난한 자... 누가 진짜 '기생충'인가

[김성호의 씨네만세 270] <기생충> 평론 2부

19.06.06 15:38최종업데이트19.06.06 15:42
원고료로 응원
* 주의! 이 글에는 영화 <기생충>의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 269'에서 계속됩니다(http://omn.kr/1jl34).
 

▲ 기생충 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누가 기생충인가. 부잣집에 숨어든 가난한 이들인가, 가정부와 운전기사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인가.

<기생충> 속 소통의 부재는 무얼 말하기 위함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영화 속 상징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봉 감독은 세 가족을 단순한 가족을 넘어선 무엇에 대응시킨다. 때로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보이고, 때로는 미국과 남·북한으로 읽히며, 또 때로는 자유주의의 탈을 쓴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와 그에 착취당하는 집단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봉 감독이 특유의 친절함으로 수차례에 걸쳐 상징이 상징임을 확인하고 있으므로 충분히 가능한 해석일 것이다.

기택과 문광의 가족이 마주한 순간부터 빚어지는 갈등은 이전까지 계급적 상징으로만 보였던 모든 것을 국제정세 및 체제에 대한 것으로 일거에 전환시킨다. 문광이 지하실에 고립돼 있던 근세의 입에 우유병을 물리는 장면은 노골적으로 기아상태에 놓인 이들을 생각하게 한다. 북한과 난민, 아프리카 및 라틴아메리카 지역 후진국, 심지어는 선진국 내부의 하층민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근세의 기괴한 외모부터, 실재하는 인간인 그를 유령으로 오해했다는 다송의 이야기, 문광이 박 사장에게 끊임없이 모르스 부호로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면서도 사는 곳이 달라 서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게 되고, 점차 멀어져 심지어는 서로가 존재하는지도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 바로 우리의 이야기가 아닌가.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굶주림으로 죽음을 맞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또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 특정한 집단에서 한글을 읽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세대가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며, 역시 아주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본 일 없이 일상을 산다.

만나지 못하는 두 세계가 있다
 

▲ 기생충 영화는 서로 다른 세 가족이 만나 빚어내는 이야기다. ⓒ CJ 엔터테인먼트


정몽준 전 의원이 수년 전 증명했듯 대중교통 요금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는 이가 넘쳐나고, 지하철을 탔거나 재래시장에서 물건을 사본 기억이 까마득한 사람도 수없이 많다. 이들이 나빠서가 아니다. 사는 세계가 그렇다.

그런데 이건 당연한 일이 아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부자와 빈자는 가까운 곳에 살았다. 부자들 곁에는 언제나 일을 할 사람들이 함께 살았다. 함께 살다보니 오고가는 것이 많았고, 서로에 대한 이해 역시 높을 수밖에 없었다. 부자와 가난한 이들은 서로가 무얼 먹고 입는지, 무얼 보고 읽는지를 알 수 있었다.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씨를 쓰는지도 알았다. 적어도 지금보다는 그랬다.

하지만 이젠 세계 곳곳에서 부와 빈의 경계가 뚜렷해진다. 부자들이 사는 곳은 택배기사들조차 쉽게 접근할 수 없다. 빈자들이 사는 곳엔 호기심 많은 이들조차 접근을 꺼린다.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한 채로 살다 죽는다. 분명히 존재하고 있지만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다. 영화와 드라마에도 나오지 않는 이들은 이내 잊혀져간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모습을 드러낸 이들은 괴물이나 유령처럼 여겨진다. 근세가 그랬듯.

북한과 예멘 난민을 대하는 일부 사람들의 모습에서 근세를 목격한 박 사장과 연교를 본다. 가끔은 이민자와 노숙자, 장애인과 빈자들이 근세가 된다. 적지 않은 근세들이 박 사장을 존경하며 그에게 끊임없는 메시지를 보내지만, 투박하고 불편한 것이 되어버린 옛 언어는 박 사장에게 가 닿지 않는다.

명징한 상징을 읽는 지적 유희의 시간  
 

▲ 기생충 박 사장(이선균 분)과 연교(조여정 분)는 쉬운 일 하나도 직접 해내지 못하거나 기피하는, 무능하거나 비겁한 인물로 그려진다. ⓒ CJ 엔터테인먼트


많은 이들이 선진국과 중산층의 새로운 세대에게 기대를 걸었다. 성장 없이 지속되고 유지되는 경제, 공존과 공유의 가치를 말하는 세대가 나타났다 믿었다. 이들이 모르스 부호를 해독하는 다송이처럼 고립되고 소외된 자들의 손을 맞잡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봉 감독은 <기생충>의 결말에서 그 모든 기대를 와장창 깨뜨린다.

근세네와 기택이네의 싸움도 볼만하다. 가진 것 없는 계층 사이에서 흔하게 목격되는 정치적 갈등이나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바라봐도 손색이 없다. 건축가 남궁현자의 걸작을 알아보는 근세네와 그런 것엔 전혀 관심이 없는 박 사장 내외, 오직 집의 물질적 가치에만 신경쓰는 기택이네의 모습도 재미있다. <기생충>은 온통 명징한 상징들로 가득하다.

의미심장하게 등장하는 수석 역시 마찬가지. 물에서 꺼내 관상용으로 쓰였다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간 수석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영화의 후반부, 경찰처럼 안 생긴 경찰과 의사처럼 안 생긴 의사는 또 무얼 말함일까. 집의 가치도 몰라보는 주인내외를 보며 근세네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쉽게 속아 넘어가는 주인내외를 보며 기택이네는 또 어떤 마음을 가졌을까. 우리보다 나은 상황에 있는 누구를 향해서 "왜 얘네가?"하는 질문 한 번 속으로 안 해본 이가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보통 노예가 주인에게 의존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의존하는 건 주인일 수 있다. 노예는 열심히 일하고 주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이 있어 노예가 있을 수 있다는 것도, 한 명의 천재가 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신화도 어쩌면 거짓말일 수 있다.

누가 기생충인가  
 

▲ 기생충 영화의 주 무대인 박 사장 집에선 유독 계단이 의미심장하게 강조되는 형태다. ⓒ CJ 엔터테인먼트


기우가 열심히 노력하면 박 사장의 집을 살 수 있을까? 후진국도 분발하면 선진국이 될 수 있는 걸까? 어쩌면 작금의 이데올로기와 경제체제가 후진국과 빈민, 노동자들에게 거짓을 전하고 있는 건 아닐까? 선을 넘지 않는 박 사장은 이제 선을 넘을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인디언을 쫓아내고 땅을 빼앗은 미국이 더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무언가를 얻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기택과 근세를 몰락하게 한 '대만 카스텔라'가 그저 어느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 때문에 망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이야기도 무용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 뒤에 자리한 불안정하고 불공정한 프랜차이즈 시스템과 이를 방치하고 정당화하는 자유주의 이데올로기, 그리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가맹본사와 건물주의 배만 불리고 있는 가맹점주들을 볼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이 영화가 그저 두 시간의 즐거움 이상의 의미로 다가올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져본다.

제목 '기생충'은 영화에서 가장 분명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다른 누구의 노력으로 배를 불리는 기생충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를 인식하게 하고,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체제를 바라보게 하며, 궁극적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입장을 정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것만으로도 봉 감독의 성취는 분명하다 하겠다.

이 영화의 상징이 극과 어떤 상호관계를 가지는지, 이를 통해 영화가 어디까지 나아가고자 했으며 실제로 나아가고 있는지, 그리하여 <기생충>이 어떤 작품이 되었는지는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고 국내 영화팬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작품에 대해선 이 글과 같이 긍정적인 말만 해도 모자라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팟캐스트 '김성호의 블랙리스트(http://www.podbbang.com/ch/7703)'에서 다양한 영화이야기를 즐겨보세요.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기생충 CJ 엔터테인먼트 봉준호 송강호 김성호의 씨네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