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버지니아 울프 유서 속 문장, 그 뜻을 이제야 알게 됐다

[조곤조곤 50] '영원히 함께한 세월'이라는 말, 곱씹어보게 된 이유

19.04.09 17:34최종업데이트19.04.09 17:34
원고료로 응원
글을 적는다면, 특히 영화나 책을 주제로 쓴다면 누구에게나 그런 작품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감히 글로 옮기지 못하는 작품. 그 작품을 향한 마음도, 그 작품이 가진 매력과 의미도 온전히 담아 낼 자신이 없어 끝끝내 쓰기를 포기하게 만드는 작품. 내겐 영화 <디 아워스>가 그런 작품이다.
 

영화 <디 아워스> 포스터 ⓒ 시네마서비스

 
영화가 개봉한 지 햇수로도 20년이 다 되어 간다. 그 시간 동안 나는 글을 썼다 지웠다, 다시 도전했다 포기하기를 반복했다. 나는 거의 매해 이 영화를 찾는다. 사는 게 공허해서 때로는 외로워서 혹은 갖가지 이유로 말이다. 나이를 먹고 다시 만날 때마다 작품에선 새로운 것들이 보였다. 나는 '고전'으로 불리는 영화들이 결코 고인 물이 아니라는 점을 이 영화를 통해서 배웠다. 어떤 영화는 사람과 함께 나이를 먹고 점점 성숙해간다.

간단히 내용을 설명하자면 <디 아워스>는 실존 인물인 버지니아 울프와 창작된 캐릭터인 로라와 클라리사의 삶을 이야기한다. 특이한 점은 이 세 인물이 각각 1923년, 1951년, 2001년을 살아가며 영화는 이들의 인생 중 단 하루만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는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집필을 시작하고, 1951년의 로라는 그 책을 읽으며 2001년의 클라리사는 '댈러웨이 부인'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저 무관해 보이던 세 사람의 인생은 마치 회오리처럼 깊게 얽혀들어간다. 특히나 세 사람의 아침이 교차되며 탁월하게 이어지는 영화의 오프닝은 작품의 서사를 온전히 형상화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영화 <디 아워스> 스틸컷 ⓒ 시네마서비스

 
하지만 <디 아워스>가 훌륭하게 세 사람의 삶을 그려낸 것과 별개로 늘 궁금증이 있었다. 왜 캐릭터들은 각기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어야 했을까. 왜 영화는 작품 내내 분주히 시대를 넘나들며 이들의 하루를 담아 낼까. '원작이 그래서'라는 답은 너무 단순하며 설명으로 충분하지도 않다. 연출자의 선택에 따라 세 주인공의 삶이 조금씩 조각조각 이어지는 소설의 구성 방식은 채택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버지니아 울프와 로라, 클라리사의 하루를 각각 온전히 보여주고 이야기를 1·2·3부로 나누는 방식의 각색도 가능했을 것이다(물론 그랬다면 그 영화는 지금의 <디 아워스>와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었겠지만). 하지만 서사가 산만해질 위험을 무릅쓰고 연출자는 원작의 이야기 구성을 그대로 따라간다. 왜?

세월을 붙들지 못해 고통받는 사람들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다시 영화로 돌아가보자. <디 아워스>의 초반에서 에이즈에 걸린 작가이자 클라리사의 동료인 리처드는 절규하듯 말한다. 자신은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실패했다고 말이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과거의 어느날 아침 꽃을 들고 있던 클라리사가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때에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그리고 지금 느껴지는 몸을 감싼 옷과 수건의 감촉까지도. 하지만 리처드는 이를 글에 담는 데 실패했다고 말한다.
 

영화 <디 아워스> 스틸컷 ⓒ 시네마서비스

 
물론 세상을 완벽하게 '재현'하는 것이 문학의 궁극적인 목표일리는 없다. 하지만 경험과 감정, 흘러간 시간의 세세한 결들을 글로 완벽히 묘사해보는 것은 모든 글쓴이들이 한 번쯤은 가져본 욕망일 것이다. 그 세월을 글 속에 담아 가두는 것. 단지 누군가는 그 일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타협하거나 혹은 끝까지 마주한 한계와 싸워볼 뿐이다.

다른 한편, 끊임없이 공허함을 이야기하는 리처드를 곁에 두고 클라리사 역시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자신의 딸인 줄리아에게 이런 말을 한다. 젊은 시절 어느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이것이 행복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고. 그리고 자신이 더욱 행복해지리라 생각했다고. 하지만 후에 그녀는 깨닫는다. 결코 삶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음을. 희망을 품었던 그 순간이 최고로 행복했던 때였음을. 그렇기에 클라리사는 단조로운 일상이 하찮다고 이야기하는 리처드를 놓지 못한다.

이는 단지 과거에 두 사람이 연인이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름다운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현재는 공허하다는 리처드는 클라리사의 과거가 행복 그 자체였음을 알려주는 유일한 증거다. 그마저도 사라진다면 클라리사로선 삶에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는 셈이다.

죽음 속에서 나는 삶을 선택했어요

리처드와 클라리사가 과거에 묶인 인물이라면 아마 버지니아 울프와 로라는 보이지 않는 미래에 절망하는 캐릭터일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안온하다 못해 적막한 교외와 중산층의 생활에 질식할 듯한 감정을 표현한다. 울프는 안정이 필요하다는 의사의 진단 때문에, 로라는 아이와 남편 때문에 고인 삶에 묶여있다. 그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영화의 서두에 등장하듯 울프는 죽음을 실행하며 로라는 자살을 꿈꾼다.

죽기 위해 찾아간 호텔에서 침대에 누워 잠든 로라는 방에 점점 차오르는 물에 잠겨 가라앉는 꿈을 꾼다(그리고 이 장면은 영화의 시작에 울프가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는 장면과 연결되기도 한다). 후에 알려지는 것은 로라가 사실은 리처드의 어머니였으며, 그가 소설에 쓴 것과 달리 로라는 결코 자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로라는 결국 집을 떠나기를 감행하고 살아남는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노년의 모습으로 클라리사를 마주한 로라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죽음 속에서 나는 삶을 선택했어요."
 

영화 <디 아워스> 스틸컷 ⓒ 시네마서비스

 
영화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자신의 소설에서 누군가는 꼭 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자 남편인 레너드는 질문한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그러자 버지니아는 누가 죽어야만 남은 이들이 삶의 소중함을 깨닫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레너드는 다시 질문한다. 그렇다면 누가 죽는가. 버지니아 울프는 다시 대답한다.

"시인이 죽어요, 선지자요."

나는 오랫동안 울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지금도 그렇다. 다만 머리를 굴려 추측하기를 반복해볼 뿐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질문했다. 왜 누군가는 죽어야만 할까. 왜 죽는 이는 시인이어야 할까. 그 사람이 선지자라면 과연 무엇을 보았기에 죽음을 택하거나 맞이할까. 한편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영화 속 울프의 말은 현실에서 진정 누군가 죽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은유이지는 않았을까. 그렇다면 '죽음'이라는 은유를 통해 울프가 그리고 영화가 드러내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영원히 함께한 세월

<디 아워스>에서 누군가는 흘러간 시간을 붙들지 못해 괴로워하고 누군가는 정체된 세월 속에서 고통스러워 한다. 하지만 세월은 흐르기에 세월이고 그 속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 끝에 죽음이 놓여있다고 해도 말이다. 오히려 세월에 따라 흐르지 못한 채 고인 이들은 로라의 말처럼 '죽음'을 사는 것이나 다름 없게 된다. 그래서 로라는 도피를 통해 삶을 택한다. 울프는 정체된 삶 속에서 무너져 사망에 이르기를 거부하고 죽음을 향해 발을 내딛기를 '주체적'으로 선택한다.

허무한가. 그렇지는 않다. 1923년의 버지니아 울프는 댈러웨이 부인의 운명을 고민하다 그녀를 살리기로 결심한다. <댈러웨이 부인>을 읽은 1954년의 로라는 위장된 삶을 거부하고 집을 떠나 살아남는다. 그리고 2001년의 클라리사를 만나 자신의 선택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야기한다. 이후 클라리사는 자신의 연인인 샐리와 깊은 키스를 나눈다. 나는 그녀가 과거에서 벗어나 변화한 지금을 그리고 곁을 살피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앞서 했던 질문에 부족하게나마 답을 하고자 한다. 왜 <디 아워스>는 각기 다른 세 주인공의 하루를 분주히 오가며 이야기를 전개했을까. 마치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지면 은은한 물결이 가장자리로 흘러가듯, 한 시대의 인물이 했던 선택은 다음 세대의 캐릭터에게 영향을 미친다. 마치 퀼트처럼 직조된 <디 아워스>의 서사는 그렇게 동떨어진 시대와 그 속의 인물들을 섬세하게 엮는다.

나는 이 글에서도 세월이 '흘러간다'고 표현했지만 이는 절반의 진실이다. 시간은 그저 흘러가지 않는다. 세월은 또한 누적되기도 한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시간의 영향 위에서 현재에 남은 이들은 삶을 살아간다. <디 아워스>는 마치 한 편의 시처럼 그런 세월을 영상으로 옮긴다. 그런 면에서 나에게 이 영화는 형식과 주제가 탁월하게 일치한 작품이다.
 

영화 <디 아워스> 스틸컷 ⓒ 시네마서비스

 
얼마 전 지인의 장례식에 다녀온 후 나는 이 영화를 다시 찾았다. 우리의 삶이 흐르고 흘러 결국 마주할 것이 소실점이라면 너무 슬프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것이 소실되지는 않는다. 시간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우리를 무(無)로 데려가지 않기 때문이다. 단조로운 일상도 충만했던 순간도, 그리고 경험도 그 속에서 느꼈던 감정도 누적될 것이다. 세월은 그런 것이다. 억울할 것도 허망할 것도 없다.

끝으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버지니아 울프가 레너드에게 남긴 유서에 담은 문장으로 글을 닫고자 한다. 언뜻 비문과도 같은 그 문장의 의미를 영화를 마지막까지 보았다면 아마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함께한 세월을요, 영원히 함께한 세월을요, 영원한 그 사랑을요, 영원한 그 세월을요."
디 아워스 버지니아울프 세월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