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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Y 캐슬' 되바라진 혜나 보고 불편했던 나, 반성합니다

[리뷰] 염정아에게 "죽여보라"며 맞서는데... '약자다움'의 프레임을 깨다

19.01.11 12:27최종업데이트19.01.11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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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타임머신이 있어서 어디로 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예전에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데, 이걸 다시 살라고? 아이고~ 됐다.' 사는 게 만만치 않다는 걸 안 뒤로는 '노 땡큐'였지만, 요즘은 조금 다른 질문이 생겼다. 만약 20대로 다시 간다면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묻는다면? 아주 명확하다. 나는 되바라지게 살아보고 싶다.

되바라지다. 사전을 찾아보니 여러 가지의 뜻이 있다. 내가 말하는 되바라지다는 "어린 나이에 어수룩한 데가 없고 얄밉도록 지나치게 똑똑하다"라는 의미다. 최근 화제의 중심에 있는 JTBC 드라마 < SKY 캐슬 >에는 되바라진 아이들이 등장한다. 순전히 내 기준에서 보면 예서, 예빈이, 혜나가 그 범주에 속한다.
 
< SKY 캐슬 >은 여러모로 나를 당혹시킨 드라마다. 먼저, 한서진(염정아)이 이수임(이태란)보다 지지를 받을 때 '뭐지?'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기존 입시 제도와 캐슬 사람들의 입시 전쟁에 대해 '이건 좀 잘못된 거야'라는 입장의 수임이 압도적으로 지지받을 것이라 예상했던 탓이다. 아마 한서진이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는 서사와 그 서사를 잘 담아내는 염정아의 연기에 설득당했기 때문인 것 같다. 어쩌면 주어진 가정환경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을 업그레이드 하고자 하는 한서진의 욕망과 절박함에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가 없어진 우리의 마음을 투영해서인지도 모르겠다.
 

JTBC 드라마 < SKY캐슬 >의 한 장면.ⓒ JTBC

 

JTBC 드라마 < SKY캐슬 >의 한 장면.ⓒ JTBC

 
또 하나 나를 당황시킨 것이 혜나(김보라)다. 사실 처음에는 혜나의 캐릭터에 대한 기대가 있었다. 병든 엄마의 병 수발을 드는 혜나는 학원 하나 다니지 않으면서도 전교 1, 2등을 다툰다. 그는 똑소리 나고 당차고 나름대로의 정의감이 있는 '사이다' 같은 역할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웬걸. 혜나의 행보는 얄밉도록 영악하고 독했다. 만약 내가 현실 세계에서 혜나 같은 아이를 만났다면 아마 슬그머니 '눈을 깔았'을 것이다. 뒤돌아서서 씩씩거리며 분통 터져 하고 '이불킥'을 할 수는 있어도 난 절대 이겨먹을 수 없는 캐릭터다.
 
혜나가 다른 학생의 수행평가를 대신 해주는 아르바이트를 할 때만 해도 놀라기는 했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엄마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서 그 아이가 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선택이었을 테니까. 그런데 엄마가 돌아가신 후, 자신이 준상(정준호)의 딸임을 알게 된 순간부터 시작된 혜나의 폭주는 무서울 만큼 과감했다.

의도를 갖고 준상의 둘째 딸 예빈(이지원)에게 접근해 입주 가정교사가 되고, 되도록 주인집 사람들 눈에 띄지 말라는 규칙을 어기며 식구들이 나가면 제 집처럼 활보를 하고, 자기 방에 들어온 가사도우미에게 불 같이 화를 내는 등 스릴러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행보를 보인다. 게다가 라이벌 예서(김혜윤)를 자극하기 위해 순수한 마음으로 혜나를 좋아하는 우주(찬희)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기도 한다. 준상의 숨겨진 딸이라는 정체를 들키고도 서진에게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게 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절대 주눅 들거나 물러서거나 양보하지 않는다. 어떻게든 물고 늘어지고 맞서고 얻어낸다. 고분고분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 오늘만 사는 사람처럼 사납고 도발적이다.

나는 왠지 그게 불편했다. 그 불편함은 똑같이 되바라진 예서를 포함해 다른 캐릭터들을 보며 느끼는 꼴보기 싫음과는 다른 결의 감정이었다. 캐슬 사람들의 부조리와 잘못된 모습은 으레 그러려니 하면서, 유독 혜나한테는 그게 안 됐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염정아 앞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아갈머리를 확 찢어버리겠다"는 염정아의 서슬 퍼런 협박에도 "그럼 죽여보시든가"라고 맞서는 모습이 나는 통쾌하지 않고 왜 불편할까 궁금했다.
  

JTBC 드라마 < SKY캐슬 >의 한 장면.ⓒ JTBC

JTBC 드라마 < SKY캐슬 >의 한 장면.ⓒ JTBC

 
저 아이가 좀 더 착한 캐릭터였다면 달랐을까. 맞다. 아마 캔디 캐릭터로 예서나 염정아한테 당했다면 100% 혜나의 편이 되었을 것이다. 거기서 답이 나왔다. 혜나는 약자다워보이지 않았던 거다. 내 머릿속에 있는 약자다움이란, 당당하게 자기 목소리를 내거나 권리를 주장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주면 주는 대로 고마워하고, 뭔가 처량하고, 100을 가진 사람에게서 1만 받아도 고마워하고, 그래서 부당해도 웬만한 건 참고 넘어가는.

프리랜서 방송작가이던 내가 불친절한 해고를 당해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을 때, 나는 그 해고의 부당함에 대해 분노하며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고발성 글을 올리겠노라고 친한 사람들에게 분노를 터트린 적이 있다. 그때 열에 열은(열에 아홉도 아니었다) 참으라고 했다. 이 바닥이 뻔하니 계속 일할 거면 그렇게 해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이었다. 나도 그저 너무 화가 나서 화풀이용으로 내지른 것뿐이지 진짜 행동으로 옮길 자신은 없었다. 나는 갑에 의해 '다음'을 도모할 수밖에 없는 을이니까.

얼마 뒤, 그 피디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신이 주최 측이 되어 개최하는 한 노조 집회에 오라는 초대였다. '나한테 보낸 메시지가 맞나' 싶어 한 동안 답신을 안 하고 기다릴 정도로 황당했다. 자기가 자른 사람에게 뜬금없이 연락해 노조 집회에 참석하라니.

"당신 같으면 가겠어요? 나는 언론의 자유는 지지하지만, 당신 같은 사람이 주장하는 당신들만의 정의는 토 나옵니다."

이렇게 되받아치고 싶었지만 '또' 꾹 참았다. 그리고 불쾌함은 아주 한참동안이나 계속되었다. '나는 해고당한 고통 속에 살고 있었는데 저 사람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잘 살고 있었구나.'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바보 등신. 그때 한번 따끔거리게 짹 소리라도 하지.' 아무리 쥐어박고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난 후일을 생각하며 참았지만 나한테 그 후일은 영영 이르지 않았고, 부당함과 억울함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초라하게 매장되어 버렸다.
 
그때의 내 모습을 후회하면서 나와 정반대로 행동한 혜나에게 느끼는 불편함은 당혹스러웠다. 물론 혜나가 다 잘한 것은 아니나, 혜나의 주장과 욕망이 잘못된 것만도 아니다. 혜나의 방법이 독하고 서툴렀을 수는 있어도 당하는 것이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혜나는 순순히 당해주지 않았다.
 

JTBC 드라마 < SKY캐슬 >의 한 장면.ⓒ JTBC


'어린 게 저렇게 독해서 어떡해. 쟤는 왜 하지 말라는 짓을 하고 난리야. 좀 적당히 하지.' 부끄럽게도 내가 혜나를 보는 시각이었다. 도대체 그 적당하다의 기준은 무엇이고, 그 기준은 누가 정하는 것이며, 그 '적당하다'는 과연 누구를 위한 '적당함'일까.
 
'어른한테 대들면 안 돼. 착하게 살아야지 나중에 다 나한테 돌아와. 끝을 잘 맺어야 해. 너무 나대지 말고 겸손해야 돼.' 이런 교훈에 갇혀서 정작 진짜 맞서고 물고 늘어지고 주장해야 할 때, 스스로 약자다움의 모드로 전환해 버린 나. 나는 쓸데없이 순종적이었고, 부당한 모욕을 참았고, 겸손을 가장해서 욕망을 억누르기도 했다. 그게 안전하다고 생각했지만 살아보니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내가 혜나에게서 느낀 불편함 만큼, 나는 약자다움의 프레임에 익숙했던 것이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고, 혜나는 캐슬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에 균열을 일으켰다.
  

JTBC 드라마 < SKY캐슬 >의 한 장면.ⓒ JTBC

 
그런 의미에서 난 혜나가 내가 생각하고 그렸던 모든 약자다움의 프레임을 깨줘서 고맙다. 그리고 약자로 살지 않기 위해 약자다움과 맞선 혜나의 당찬 되바라짐이 부럽다. 만약 다시 돌아간다면,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 부당한 것에 대해 어떻게든 맞서고, 내가 얻고 싶은 것에 대해서 당당하게 표현해 보고 싶다. 아니, 조금 늦긴 했지만 이제 조금씩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제야 혜나를 보는 게 편해져서 진심으로 응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지난 방송분에서 혜나는 추락한 듯 피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꼭 이렇게 한발씩 늦는다. 그래도 이것으로 혜나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후에 일어날 파장이 기대된다. 균열은 어떤 모양으로든 반드시 변화를 가져오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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