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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모아달라고 그 난리치더니... '국가부도의 날' 엔딩에 경악

[리뷰] 사람 아닌 자본이 주인인 세상... IMF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18.12.05 17:19최종업데이트18.12.05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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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도의 날> 스틸컷 ⓒ CJ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은 불필요한 부분의 경비를 줄였으며, 해외에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어요. 또 노동자와 기업가가 서로 양보하고 협동하여 기업을 발전시켰지요. 정부는 일자리를 만들고, 나라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여러 제도를 정비했답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2001년에 IMF에서 빌린 돈을 모두 갚고, 지금은 외환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어요." - <재미있는 지구촌 경제 이야기>(가나출판사)

2014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발행된 한 통합교과학습서의 서술처럼, IMF 구제금융은 '해피엔딩'으로 끝났을까? 지난 20여 년 동안의 역사는 1997년 외환위기의 원인을 진단하고 책임을 캐묻기보다, 극복 과정을 미화해 국민통합과 성장 동력으로 삼았다.
 
외환위기를 불러온 기업과 국가의 정경유착 실정은 은폐되었고, 그 자리는 돌 반지를 모아서 국난을 극복한 '위대한 국민'을 칭송하는 것으로 메워졌다. 그래서 1997년 외환위기는 부끄러운 역사이기보다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리매김 되었다. 최근 가장 빠른 시기에 외환위기를 극복했다는 국민의 자긍심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은 영화가 등장했다. 바로 <국가부도의 날>이다. 영화를 보면서 영화 속 내용이 모두 허구가 아니라 조금의 진실이라도 담고 있다면 'IMF 체제를 끝났다'라는 주장은 거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과 경제 최고위층의 무능이 저지른 비극
 

영화 <국가부도의 날>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영화 속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 분)은 동남아 국가들의 달러 가뭄으로 인한 채무불이행 사태가 곧 우리나라에도 닥칠 것임을 직감해 총재(권해효 분)에게 대책의 시급함을 알린다. 경제 수석과 재정국 차관 등을 주축으로 한 비밀대책팀이 꾸려지고, 대책팀은 긴박하게 전개되는 기업의 연쇄부도 진화에 나선다.
 
대통령에게 위기를 브리핑하는 자리. 한 관료는 대통령을 만나기 전 "(대통령님은) 어렵게 얘기하시면 역정을 내십니다"라며 한시현 팀장에게 주의를 준다. 비록 뒷모습만 나오는 영화 속 대통령이지만 시기상 그가 누구인지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대통령과 경제 최고위층들에게는 상황에 대한 올바른 이해조차 없었다. 영화 속 그들은 "달러가 조금 모자라는 게 무슨 대수냐", "돈 갚는 날 미루고 다른 돈 끌어다 메우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정도로 외환위기에 대한 이해가 없었고 실기를 거듭하며 위기를 걷잡을 수 없이 키웠다.
 
외환위기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대책팀은 위기를 감추기에 급급했고, 대선이 코앞인데 야당후보에게 쓸데없는 시빗거리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며 한시현 팀장을 막아섰다. 미도파 백화점과 한보, 대우로 이어지는 부도사태. 위기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나 적극적인 수습의 의지만 있었더라도 국가 살림살이를 몽땅 국제통화기금(IMF)에 저당 잡히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과 경제 관료들의 무능만이 파국의 원인이 된 것은 아니었다. 연쇄 부도를 막지 못한 건 경제 관료들의 무능이라고 치더라도, 국제통화기금(IMF)과 모욕적인 협상에는 악의를 숨긴 결단이 있었다고 본다. "잘못하면 벌 받는 것은 맞는데 여기는 잘못하면 죽여 버리는 곳입니다." 한시현의 부하직원 이대한이 말한 국제통화기금(IMF)의 숨겨진 얼굴. 대책팀 관료들도 미국이 최대 주주로 있는 IMF의 실체를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국민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최악의 선택지
 

영화 <국가부도의 날> ⓒ CJ 엔터테인먼트


"나라를 한 방에 바꿀 수 있는 기회다."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의 표현처럼 위기를 자신들만의 기회로 만든 건 악의에 찬 정권인 셈이다. 결국 20여 년이 지난 현재 우리는 쉬운 해고와 저임금의 기조를 유지할 수 있는 경제 시스템 앞에서 시름하고 있다. 더불어 대다수 국민들은 먹고 사는 문제 이외에는 눈 돌릴 여유를 가지지 못하는 사회가 됐다.

당시 정치권력과 경제 권력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국민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최악의 선택지를 빼들었다. 당시 정부가 IMF 구제금융을 택한 것이 필연적 결과가 아니라 악의적 선택이었다는 것이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고픈 진실의 한 장면이 아닐까 생각했다.
 
"저는 일주일 안에 대한민국이 망할 거라 생각합니다."
 
영화 속 종금사 직원 윤정학(유아인 분)은 위기에 베팅하고 투자자를 불러 모은다. 그리고 일확천금을 거머쥔다. 800원에 달러를 사서 2000원을 넘겨서 팔고, 부도나고 회사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급매물로 내놓은 아파트를 있는 대로 사 모은다. 그는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을 매번 의심했고 국가 정책을 철저히 불신했다. 국가 정책에 대한 의심과 불신은 그에게 막대한 부를 안겼다. 우습고도 서글픈 장면이다.

"위기는 반복된다"라는 윤정학의 영화 속 예견이 또 한 번 현실로 다가온 건 그리 먼 일도 아니었다. 환율이 급격하게 오를 일은 '절대' 없으며 오히려 저환율을 대비해야 한다며 파생금융상품을 팔았던 2008년 '키코 사태'를 떠올리면 그렇다. 당시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넘어서면서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도산했다. 이명박 정부는 당시 임의적으로 고환율 정책을 고수했고 은행들은 위험성을 철저하게 감춘 채 파생상품 판매에만 급급했다. 그 누구 하나 책임을 지겠다며 나서지 않았고, 1997년 외환위기 때에 버금갈 정도로 중소기업들이 도산했다. 또다시 대기업과 새로운 윤정학이 일확천금을 거머쥐었다. 위기는 반복되었고 그에 맞춰 베팅한 이들은 또다시 성공했다.

윤정학과 대비되는 인물이 갑수(허준호 분)다. 그릇을 납품하는 백화점이 도산해 버리고, 백화점이 납품 대금 대신 그의 손에 쥐어준 어음은 휴지 조각이 된다. 집을 팔아서라도 거래처에 물품 대금을 지급하리라 마음을 먹지만, 우후죽순 쏟아져 나온 매물들 때문에 집값이 폭락해 그것조차 여의치 않아진다. 결국 아파트 베란다 창을 열고 뛰어내리려다 아이들의 인기척에 놀라 주저앉아서 서럽게 울던, 무능력하기 짝이 없던 가장이 어디 갑수뿐이겠는가?
 
베란다에 올라서고 한강 다리 난간을 넘었던 사람들부터 차압당한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웠던 사람까지. 언론은 그런 사람들 뒤통수에 대고 나라를 살리려면 금모으기에 나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일각에선 '국민들 씀씀이가 문제'라며 국민들을 '아나바다 운동' 한복판으로 떠밀었다. 당시 그런 목소리를 냈던 언론들 중 그것을 제대로 반성하는 곳을 본 적이 없다.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국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야 나라 경제가 산다고 쓴다.

사람보다 자본이 주인인 세상...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한 장면. ⓒ CJ 엔터테인먼트


2001년 8월, 대한민국은 IMF로부터 받은 구제금융 자금을 모두 상환했다. 정부는 IMF의 통제를 받지 않게 되었다고 말했고 언론은 'IMF 구제 금융을 받은 나라 중 가장 빨리 위기를 극복했다'고 축포를 터뜨렸다. 그러나 이는 절반만 진실이다. IMF에서 빌린 자금을 상환했을지는 모르지만, 구제금융의 대가로 저당 잡힌 경제주권이나 노동권은 아직 온전히 돌려받지 못했다.
 
외환위기 당시 IMF가 요구했던 노동시장 유연화는 여전히 손쉬운 해고와 저임금 정책을 강요하는 강력한 경제 질서다. 국가 정책과 거꾸로 가야 돈을 번다는 믿음 또한 부동산 시장에서는 여전이 굳건하다. 따라서 노동보다, 사람보다 자본이 주인인 세상을 두고 IMF 체제는 끝났다고 하는 건 틀린 주장이다.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실업이 일상이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을 오게 하면 안 됩니다."

영화 속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은 결국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금융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이 땅에는 비정규직이 늘어나고 실업이 일상이 되는 세상이 왔다. 지난 20여년은 IMF 체제를 끝낸 세월이 아니라, IMF 요구 조건을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의 욕심에 맞추어 토착화시킨 세월에 불과했다. 일할수록 가난해지고 자본이 돈을 버는 세상, 편의점주와 알바생이 서로 싸워 살 길을 찾아야 하는 세상이 IMF 체제를 제대로 끝내지 못한 우리의 현실인 것이다.

죽을 만큼 일을 해도 빚만 늘어가는 이유가 궁금한 이들은 이 영화를 보았으면 한다. 장사가 점점 힘들다는 영세 자영업자들 또한 불황의 근원이 어디인지 이 영화에서 그 답을 구해 보았으면 한다. "지기 싫으면 항상 깨어 있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것"이란 영화 속 한시현 팀장의 일갈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린 아직 IMF 체제의 어두운 그늘을 걷어 내지 못했다. '끝났다'는 것은 한몫 챙긴 사람들, 경제 주권을 팔아먹은 위정자들의 도피이자 변명일 뿐이다.
국가부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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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진보는 냉철한 시민의식을 필요로 합니다. 찌라시 보다 못한 언론이 훗날 역사가 되지 않으려면 모두가 스스로의 기록자가 되어야 합니다. 글은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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