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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장들의 첫 영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환상의 빛>

18.11.23 14:04최종업데이트18.11.23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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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처음'이 있다. 처음에는 부족하고 서툴지만 실수를 반복하면서 성장하게 마련이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될 수도 있고 그냥 실패로 끝날 수도 있다. 성공조차도 단 한 번의 성공으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인 영화계에서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어쩌면 기적과 같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문득 궁금했다. 계속해서 비범한 영화들을 만들어내는 거장들의 첫 영화는 그들의 미래를 예견하고 있을까? 그들은 과연 떡잎부터 달랐을까? - 기자 말.
 

영화 <환상의 빛> 포스터 ⓒ 씨네룩스


창가에 가만히 앉아 밖의 고요한 풍경에 사로잡혀 지루한 줄 모르고 바라보고 있었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익숙한 공간이 낯설게, 낯선 공간이 익숙하게도 다가올 때, 형언하기 힘든 감상에 젖은 우리의 감정은 시간보다 천천히 흘러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 <환상의 빛> 역시 그런 순간처럼 관객을 사로잡는다. 

그냥 화면만 보고 있어도 놀랍도록 아름다운 영화(아니나 다를까 1995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촬영상을 수상했다) <환상의 빛>은 전경 샷에 가까운 익스트림 롱샷과 롱테이크를 자주 사용한다. 이는 관객을 인물과 이야기 속으로 이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천천히 음미하고 관조하게끔 한다.
 

영화 <환상의 빛>의 한 장면. ⓒ 씨네룩스

 
유미코(에스미 마키코)는 어린 시절 치매에 걸린 할머니가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 '가지 말라고 더 말렸어야 했는데, 왜 말리다가 말았을까?' 여느 때처럼 누군가 길 잃은 할머니를 집으로 데려다 줄 것이라는 생각했지만 할머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이때의 기억은 때때로 유미코를 찾아와 그녀를 괴롭힌다.

시간이 흘러 어릴 적 친구 이쿠오(아사노 타다노부)와 결혼한 유미코는 갓 태어난 아들과 함께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행방불명된 할머니에 대한 꿈을 다시 꾸기 시작하면서 평온한 일상에 불안이 엄습하지만, 그녀는 지금의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쿠오가 죽는다. 기차가 오는 것을 알면서도 철길 위를 피하지 않았다는 목격자의 증언은 그의 죽음이 사고사가 아니라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라고 말해준다. 그는 유서 한 장 없이, 방울 소리가 나는 자전거 열쇠고리(유미코가 선물한)와 신발 한 짝을 남겼을 뿐이다.
 

영화 <환상의 빛>의 한 장면. ⓒ 씨네룩스

 
다시 몇 년의 시간이 흐르고, 유미코는 바닷가에 사는 타미오(나이토 타카시)와 재혼한다. 이 결혼으로 유미코에게는 타미오의 딸과 아버지, 그리고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는 마을 사람들까지,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

그녀는 그들과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해 나가지만 이쿠오에 대한 기억,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언제라도 제 존재를 상기시키며 그녀를 한없이 우울하게 만든다. '도대체 이쿠오는 세 달된 아들과 아내를 두고 왜 죽은 걸까? 기차가 오는 걸 알았으면 서도 왜 철길을 걸었던 걸까?' 유미코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지만 대답을 찾을 수가 없다.    
 

영화 <환상의 빛>의 한 장면. ⓒ 씨네룩스

 
미야모토 테루가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는 <환상의 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연출한 영화 중 유일하게 각본 작업에 참여하지 않은 작품이기도 하다. 죽음과 상실이라는 소재를 단정하고 아름답게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는 '죽음'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남겨진 자가 계속해서 살아나가는 '생'과 죽음을 담고 있는 '삶'에 집중하고 있다.  

죽음은 언제나 삶과 함께한다. 죽음은 삶, 그 다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인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작품을 통해 담고자 하는 주제의식들을 하나로 통일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영화에는 언제나 '상실'의 고통과 두려움이 등장한다.

그는 그것들을 극적으로 과장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입장에서 덤덤하게 그리고 있다. 삶은 고통스러우나 또한 그것을 안고 계속해서 살아가기에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다. 
 

영화 <환상의 빛>의 한 장면. ⓒ 씨네룩스

 
생의 경계를 맴도는 죽음은 언제 그 선을 넘을지 모른다. 고요했던 바다의 파도가 높아지고 바람이 거칠어진 저녁. 유미코는 마음을 진정시키기가 힘들다. 가까운 이웃이자 해녀인 토메노씨가 물질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물질을 해온 베테랑 해녀라지만 토메노씨의 나이를 생각하면 바람에 흔들리는 유리창처럼 유미코의 마음도 불안으로 흔들거린다. 게를 잡아다 주겠다며 명랑하게 바다로 들어가던 토메노씨의 뒷모습은 다행히 그녀의 마지막이 아니었다. 토메노씨가 무사히 돌아오고 유미코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고향에서 죽고 싶다며 보따리를 싸서 떠나는 할머니의 느린 걸음과 우산을 가지러 집에 왔다가 다시 나가는 이쿠오의 뒷모습. 마지막일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던, 예상치 못한 이별은 유미코에게 상처를 남기고, 유미코는 이쿠오가 남긴 자전거 열쇠를 두 손으로 꽉 감싸 쥐면서 자신의 슬픔을,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다.

조용히 참아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도 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그녀의 생각은 길을 잃고 혼란스러워 한다. 새로운 가정이 생기고 이쿠오와의 추억이 있는 오사카에서도 멀리 떨어져서 살고 있지만 그녀는 과거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꾹꾹 눌러 담았던 유미코의 감정은 결국 터져버린다. 혼란스러운 마음을 어찌하지 못한 그녀는 타미오에게 이쿠오가 왜 떠났는지 모르겠다며 울먹인다. 그는 한때 뱃사람이었던 아버지가 홀로 바다에 나가 있으면 저 멀리 빛나는 빛이 자신을 부르는 것 같았다고,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 아니겠냐고 그녀를 위로한다.

이 둘의 대화는 멀리서 롱테이크로, 바다를 배경으로 선 두 사람의 실루엣만 보이도록 담았는데 얼굴이 전혀 보이지 않음에도 유미코의 터져 나오는 감정은 고스란히 관객에게 전달된다.

카메라는 바람과 함께 흩날리는 눈발의 처연함과 누군가의 장례행렬을 따라가는 유미코의 절망을 천천히 관객에게 전달한다. 수평선과 평행을 이루는 장례행렬 신의 구도는 단연 압권이다.
 

영화 <환상의 빛>의 한 장면. ⓒ 씨네룩스

 
타미오의 위로가 힘이 된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슬픔을 끄집어낸 것이 감정의 정화가 된 것일까. 겨울이 지나고 다시 여름이 왔을 때, 유미코는 영화가 시작되고 처음으로 검정이 아닌 흰색 셔츠와 남색 치마를 입고 타미오와 함께 노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어두운 방 안에 들어갔을 때, 처음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눈이 어둠에 익숙해지고 나면 방 안에 스며든 빛이 보이고 점점 사물도 보인다. 빛의 사용이 인상적인 <환상의 빛>에서 인물(유미코)은 하나의 오브제처럼 공간에 위치하고 관객은 충분히 그녀를 관찰할 시간을 갖는다. 조용한 바닷가 마을의 사계절과 그 공간을 채우는 아이들의 모습도 관객이 보는 것은 비록 몇 분 내외이지만 느끼는 것은 영화 속에서 지나가는 그 계절만큼의 시간이다. 
 

영화 <환상의 빛>의 한 장면. ⓒ 씨네룩스

 
이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작품들(보다 구체적인 주제의식과 플롯을 가진)은 플롯이랄 게 거의 없는 <환상의 빛>과 스타일이 조금 다르다. 그러나 상실과 가족이라는 소재, 인물들에게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자세는 이후로도 일관되게 지속되고 있다. 그가 이 영화 전에 수 년 동안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왔다는 것을 감안해도 <환상의 빛>이 보여주는 섬세함과 단정함은 이미 장인의 그것과도 같다.

이제 그는 일본을 벗어나 프랑스에서 에단 호크, 줄리엣 비노쉬, 캐서린 드뇌브와 함께 영화를 찍고 있다. 그의 차분하고 깊이 있는, 그리고 겸손함이 묻어 있는 시선이 이 배우들과 만나 어떤 그림을 만들어낼지,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려본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강지원 시민기자의 브런치 계정에도 실렸습니다.
환상의 빛 고레에다 히로카즈 일본영화 상실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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