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스타

'뉴스공장' 1위에 빛나는 tbs... 이건 정말 너무합니다

정규직화 계획 내놓았지만, 유독 작가에게만 7개월짜리 계약서 내밀어

18.09.13 20:17최종업데이트18.09.13 20:17
원고료주기

방송국을 배경으로 한 KBS 드라마 <라디오 로맨스> 포스터ⓒ KBS


"야, 막내! 너 이번에 나랑 (일)할래? 쟤 DJ로 꼬셔오면 내가 너 메인 시켜줄게."
 
지난 겨울 KBS에서 방송됐던 월화드라마 <라디오 로맨스>에서 라디오 PD로 나온 이강(윤박 분)이 라디오 막내작가인 송그림(김소현 분)에게 던진 대사다. 송그림은 PD가 꼬셔오라던 인기스타 지수호(윤두준 분)를 어렵게 섭외한 끝에 결국 메인작가 자리를 꿰찬다.
 
"야 막내! 내가 너 메인 시켜줄게"라니, 이 얼마나 달콤한 제안인가, 그런데 이걸 뒤집어 말하면 뭐가 될까? "야, 막내! 너 자꾸 그렇게 일하면 다음 개편 땐 나랑 일 못해"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PD는 작가를 메인으로 만들 수도 있지만, 한순간 실업자로 만들 수도 있다. 그렇기에 방송작가의 생존 방식은 '함께 일하는 PD의 마음에 드는 것'이다. 메인작가가 서브와 막내작가를 뽑아 팀을 꾸리는 형태로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경우가 대다수지만 결국 팀 선택권은 PD의 몫이다.
 
그렇다면 PD의 마음에 든다는 건 어떤 걸까. 기본적으로 '일을 잘하는 것'이겠지만, 무엇보다 함께 일하는 PD와 손발이 맞아야 한다. 여기엔 되도록 PD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것도 포함된다.
 
프로그램을 만들다보면 PD와 의견충돌을 빚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PD가 나를 자를 마음이 생기지 않을 만큼"의 의견 개진이다. 연차가 올라갈수록 작가들은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이 어디쯤인지 귀신같이 알아낸다(알아내야 한다). 생존을 위해 생긴 슬픈 요령이라고나 할까.
 
방송작가는 'PD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남는다. 그리고 어떤 PD도 나를 더이상 불러주지 않을 때, 작가의 생명은 끝이 난다. 1년 중 작가들의 신경이 가장 곤두설 때는 개편시즌이 돌아올 때다. "이번 개편 때 프로그램이 없어진다네", "미안해, 다음 개편 때는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아"라는 말을 들을 때는 내 존재가 저 심연의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을 받곤 한다.
 
방송작가는 남들이 평생 한두 번 정도 겪을, '이제 니 자리는 없어'와 같은 존재의 위협을 시시때때로 겪는 직업군 중 하나다. 일을 할 때도 스트레스를 받지만, 프로그램을 그만두어야 할 때 받는 스트레스도 적지 않다. 이제 이골이 날만도 한데 들을 때마다 자괴감이 들고 막막하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지만 방송작가의 고용형태는 어디서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후진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모든 것이 '구두'로 이루어지고 '구두'로 끝난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계약서를 단 한 번도 써보지 않은 작가가 태반이었다.
 
방송작가도 정규직이 될 수 있을까?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이렇게 물었다. "만약 방송작가도 정규직이 될 수 있다면, 정규직 할래?"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응? 방송작가가 정규직? 정말? 그것이 가능해요?"
 
'방송작가=프리랜서'가 하나의 불문율처럼 되어있어서 그렇지 않은 길이 존재한다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세상 모든 이들이 다 정규직이 된다 해도 방송작가만은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방송작가인데, 4대 보험에 가입되고, 육아휴직과 연차를 쓸 수 있다? 무엇보다 개편으로 프로그램이 없어져도 잘리지 않는다? 내 생사여탈권을 PD가 쥐고 있지 않다? 낯설다. 어딘가 모르게 이상하다. 그런데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고 희망의 샘물이 내 몸 속 어느 부위에서 솟아오르는 걸 느낀다.
 
가지 않은 길, 아니 아직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어떤 길, 그리하여 그 길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길, 그 길을 우리가 처음 닦고 그 뒤로 수많은 방송작가들이 걸었으면 싶은 길...
 

박원순 시장ⓒ 언론노조


그런데 그 길을 제시한 당사자는 놀랍게도 서울시였다. 이것이 지난 1월 24일, tbs교통방송 작가들에게 일어난 일이다. 서울시는 서울시 산하 사업소인 tbs의 비정규직 프리랜서의 정규직화 계획을 발표했다. 여기엔 소수지만 작가도 포함되었다. 만약 이것이 실제로 이뤄진다면 방송계에서도 노동계에서도 전례가 없는 의미 있는 발걸음이 될 터였다.
 
방송제작에 있어서 방송작가의 영향력은 PD와 비교해도 결코 적지 않다. 프로그램 기획부터 섭외, 자료조사, 구성, 대본, 자막까지, 방송 제작의 거의 모든 것들이 작가의 손을 거친다. 하지만 방송작가의 입지와 고용환경은 그 역할에 비해서도 공공재라는 방송의 무게감에 비해서도 형편없이 가볍다.
 
모래알 같이 흩어져 있던 작가들은 먼저 단톡방을 만들었다. 그리고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고 서로의 입장과 정보를 교류했다. 하지만 우리의 희망은 방송계의 '오랜 관행'에 가로막혔다. 그 관행이란 건, 방송작가가 정규직이 되면 프로그램 질이 저하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방송작가만이라도 프리랜서로 남아서 '새로워야' 한다는 얘기다. 정규직은 대부분 고인물이 되기 때문에 프로그램의 참신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PD는 제작을 총괄하는 사람이고, 방송작가는 PD가 제작하는 방송에 참여하는 스태프의 일부이다. 그렇기에 다른 직군은 몰라도 방송작가만은 프로그램의 새로움을 위해 늘상 바꿔야한다고... 쉽게 말해 '개편 때마다 물갈이를 해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방송작가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프로그램 제작에 가장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고용불안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이다.
 
작가 물갈이를 통해 프로그램의 참신성이 유지되고 프로그램의 질이 높아진다는 명제가 과연 타당한지를 차치하고서라도, 이런 방식이 방송계에서 가장 손쉽게 택해온 관행이었다는 건 부인하기 어렵다. tbs도 마찬가지다. 상식에 의거한 서울시의 정책이 방송계 관행 앞에서 무력화될 처지에 놓였다.
 
방송작가 정규직은 0명... 우리는 쓰고 버리는 치약과 같은 존재 
 

tbs 간판 프로그램이자 동시간대 청취율 1위인 <김어준의 뉴스공장>ⓒ tbs작가


tbs는 현재 1년 후(2019년 7월)에 있을 재단법인화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의 중간단계로써 '프리랜서들의 1단계 직접고용 계약직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tbs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모든 직군이 1년의 계약기간을 보장받은 반면, 작가 직군은 1년이 아닌 '다음 개편 때까지'로 계약 기간을 다르게 두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해마다 3월쯤 봄 개편이 이뤄짐을 감안해보면, 사실상 7개월짜리 계약서이며 동시에 비정기 개편이 단행되면 언제든지 계약 종료를 이유로 즉시 해고될 수 있는 계약서다. 다른 스태프들에겐 보장되는 최소한의 '1년'이 방송작가들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7개월 후 계약을 종료할지 아니면 재계약할지 여부를 판단하는 주체는 바로 PD들이다.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을 위한 서울시의 정책이 오히려 작가들의 고용불안은 물론이고 PD들에게 업무상 종속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대한민국 전체 방송작가의 규모는 대략 1만 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상파와 종합유선, 방송채널사용사업 등을 포함한 방송사 정규직이 2만 6천 여 명이란 점을 비춰보면 전체 방송인력 가운데 방송작가가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업무의 특수성에서도 수적인 면에서도 방송의 핵심인력인 방송작가는 왜 단 한 명의 정규직도 없는 것일까? 왜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특수 고용노동자로 전락했을까? 세상은 나날이 변해가는데 왜 내가 처음 일했던 16년 전이나 지금이나 고용환경은 전혀 변하지 않았을까? 일련의 사건을 겪다보니 여러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tbs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방송국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공공기관의 비정규직 문제와 청소노동자의 열악한 근무환경과 최저임금조차 받지 못하는 아르바이트생의 부당한 처우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이 일하는 일터의 부조리에 대해서는 마치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이 빚어진 건 당연하다. 쉽게 쓰고 쉽게 버리는 소비재 같은 특수고용 노동자인 방송작가는 사용자의 입장에서 보면 가장 매력적인 인력이다. 이런 인력을 과연 누가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그것이 방송국을 원활하게 돌아가게 했고 지금껏 큰 문제도 불거지지 않았는데 갑자기 누가 이 시스템을 바꾸겠다고 나설까.
 
방송을 만드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방송계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말도 안 되는 제작환경에서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이제 좋은 방송을 만들어내는 힘이 제작진의 희생에 의해 세워져서는 안 된다.ⓒ tbs작가


지난 3일 방송의 날 기념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방송의 독립성과 공영성을 철저히 보장하겠다", "불필요한 규제는 제거하고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당부의 한마디를 덧붙였다.
 
"방송 콘텐츠의 결과물만큼 제작 과정도 중요하다."
"제작 현장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현장의 모든 분들을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존중해 주시면 좋겠다."
"노동이 존중되고, 사람이 먼저인 일터가 되어야 창의력이 넘치는 젊고 우수한 청년들이 마음껏 역량을 펼칠 수 있을 것"
 

하지만 방송들은 이 부분을 주요하게 다루지 않았다. 이는 '사람'이 빠져 있는 현 방송 관행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좋은 방송의 조건 안에 독립성·공영성·참신성·재미·화제성은 있지만 사람은 없는 씁쓸한 현실 말이다. 이제 모든 방송제작자들이 이 문제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이라도 방송제작 스태프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다면, 그것은 결코 좋은 프로그램이 아니다.
 
비단 방송작가만의 문제는 아니다. 방송계의 수많은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말도 안 되는 제작환경에서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좋은 방송을 만들고 있다는 자부심만으로 그 모든 부조리함을 감내하고 있다.
 
이제 좋은 방송이라는 패러다임을 바꿀 때가 되었다. 좋은 방송을 만들어내는 힘이 더 이상 일부 스태프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져선 안된다. 제대로 대우해주고, 제대로 계약서를 쓰고, 제대로 된 노동환경을 갖춘 다음에, 그 기반 위에 좋은 방송을 만들어야 한다. 지금 tbs 비정규직 프리랜서 노동자들이 그 출발점에 서 있다.
 
tbs 방송제작자들도 방송계의 관행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바꿔나가는데 기꺼이 동참하길 바란다. 여태껏 동료로서 함께 방송을 만들어온 것처럼 방송환경 개선이라는 큰 뜻을 함께 이뤄가기를 바란다.
 
사람을 바꾸지 않아도 참신하고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다는 선례를 함께 같이 만들어 나가기를 바란다. 작가와 PD가 동등한 관계에서 서로 협력하며 '오래도록 함께' 하기를 바란다. 좋은 방송의 1순위가 '시청률'이 아닌 '사람'이 되는 세상을 바란다. 그 패러다임을 바꾸는 시작점이 tbs가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전국언론노조 tbs지부 조합원입니다.
댓글2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방송작가들의 노동조합, <방송작가유니온>

네이버 채널에서 오마이뉴스를 구독하세요

A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