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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헐크' 이만수 감독, 그가 털어놓은 라오스 비하인드

[인터뷰] 이만수 감독, 라오스에 다녀온 이유부터 선수시절 에피소드까지

18.08.28 10:37최종업데이트18.08.28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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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 역사의 큰 한 획을 그었던 이만수 전 SK 감독. 그는 선수 은퇴 이후에도 다른 전설들보다도 화려한 나날을 보냈지만, 감독 생활을 마무리 한 지난 2014년부터 현재까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바로 50년 야구인생 동안 받은 사랑을 다시 돌려주기 위해 재능기부에 나선 것. 그렇다면 도대체 어떠한 이유 때문에 이만수 감독은, 화려한 노후를 포기하고 또 다른 야구인생을 시작하게 된 것일까?

다음은 지난 9일 경기도 안산시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만수 전 SK 와이번스 감독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 안녕하세요. 2014년 이후 어떻게 지내셨나요?

"말씀해주신 것처럼 저는 2014년도 10월 말에 SK 와이번스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동남아시아의 라오스라는 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지난 9일, 안산시 한 카페에서 만난 이만수 SK 와이번스 前 감독 ⓒ 이만수


- 갑작스럽게 라오스에 들어가신 이유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2013년 태어나서 처음으로 6위라는 성적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악플은 물론이고, 어린 학생들까지 면전에서 욕을 하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지치고 괴로웠죠. 그때 마침 라오스에 있는 구단의 한국인 대표께서 제게 봉사차원에서 라오스에 한 번만 방문해 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아직 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부탁을 받아들이기도, 그렇다고 단숨에 거절하기도 정말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렇게 거절은 못하고 사실상 거절의 의미에서 '아 조만간 갈 수 있으면 가겠습니다'고 답했는데, 그 쪽에서 제 말을 순수하게 진심으로 받아들였던 겁니다. 이후로도 '언제 오시냐'는 연락을 많이 받았습니다. 정말 당황스러웠지만, 2014년 일단 야구 용품들을 후원해줬습니다. SK 와이번스 선수들의 유니폼부터 각종 용품들을 전부 다 수거해서 성인 남성만한 박스들을 컨테이너에 실어서 보내주었죠(웃음). 한 달 지나고 나서 라오스에서 제게 사진 한 장을 보내줬는데, 그 모습이 마치 SK 와이번스 3군 같았습니다. 그것이 첫 시작이 된 것이죠.

그러다가 2014년 10월 말, SK에서의 감독 생활을 마무리 하고 그동안 저 때문에 마음고생을 한 제 배우자를 위해서 동유럽행 티켓과 호텔을 예약하고, 카페에서 깜짝 발표를 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보다 제 배우자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당신은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하더군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제 배우자가 그동안 제가 매번 인터뷰를 할 때마다 감독 생활을 끝내면 가장 먼저 '동남아'에 가서 재능기부를 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해주었습니다. 그 약속을 왜 지키지 않느냐는 것이었죠.

그래서 저는 어설프게 제가 준비한 이벤트를 공개했는데, 제 배우자는 '그런 곳은 언제든지 갈 수 있지만 동남아 재능 기부는 하루 빨리 가지 않으면 언제 갈 수 있을지 모른다'고 하더라고요. 1주일 만이었던 지난 2014년 11월 12일, 저는 갑작스럽게 라오스로 가게 되었습니다."

- 라오스는 어떤 곳인가요?

"부끄럽지만 처음 라오스로 갈 때만 해도 라오스라는 국가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알고 보니 라오스는 동남아시아 중에서도 (야구 인프라가) 열악한 나라 중 하나였고,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사회주의 체제의 국가라는 점이었죠. 그리고 야구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처음 라오스에 도착했을 때는 야구선수가 12명뿐이었습니다. 그마저도 슬리퍼를 신고 뛰었죠. 일단은 선수들 테스트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공개 모집을 실시했습니다. 그렇게 약 150명 정도가 응시하여 몇몇 테스트를 거쳐 40명으로 추려졌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반 이상이 맨발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무래도 선수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일단 선수들을 먹고 재우는 것이 더 급선무였죠. 2016년과 2017년에 각각 한국인 코치님 한 분씩을 라오스로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6월에는 '데이비드 토이'라는 회사의 신상훈 대표님께서 개인적으로 한국인 감독님 한 분을 라오스로 파견해주셔서, 총 3명의 한국인 지도자들이 라오스로 파견 되었지만, 최근 한 분께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시면서 앞으로는 두 분의 코치님들이 라오스 팀을 지도할 예정입니다.

그러다보니 지금 라오스의 가장 큰 문제는 100명이 넘는 선수들에 비해 지도자 수가 너무나도 적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뜻을 같이 해서 이렇게 좋은 일을 함께할 수 있는 코치 분들을 하루 빨리 만나고 싶은 마음입니다."

한국에 방문한 라오스 선수들 ⓒ 헐크 파운데이션 제공


- 최근 라오스 선수들에게 특별한 일이 생겼다고 들었습니다.

"네, 평생 여권도 못 만들었던 선수들이 한국에 2번이나 초청을 받았고, 특별하게는 8월 18일에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웃음).

라오스에 처음 들어간 지가 벌써 4년이 다 되어갔는데, 야구라는 단어도 몰랐던 나라에서 지금은 야구 열풍이 불고 있다니,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또한 누가 봐도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작년 7월 3일에는 라오스 역사상 최초로 야구 협회가 창립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지금은, 제가 운영하고 있는 구단인 라오J브라더스가 라오스 내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고, 주변에서도 야구 지도를 받고 싶다는 수많은 연락들이 오고 있지만, 지도자가 부족해 계속 연기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 요즘에도 꾸준히 야구를 즐기고 계시는지요?

"요즘에도 라오스에는 계절마다 들어가고, 국내에서는 지금까지 39곳에 재능기부를 하러 다녔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운동을 쉬다 보니 오른쪽 어깨 근육이 말려 들어갔고, 현재는 공을 거의 던지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때문에 공을 던지는 데 직접 시범을 보이지 못한다는 게 늘 아쉽습니다. 아프지만 않았더라면 현역 선수들만큼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웃음)."

- 라오스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곳에 다녀오셨나요?

"제가 다녀온 곳은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 이었습니다. 현재는 그곳에, 규모가 크진 않지만 야구 센터를 설립하여 약 스무 명의 선수들의 의식주를 전부 책임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제일 시급한 것은 야구장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축구 경기장을 임대하여 매달 돈을 지불하고 있는 상황이죠. 아무래도 축구장에서는 축구팀들도 훈련을 하기 때문에 시간적인 제약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가장 더운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임대하여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 해에 라오스 대통령 상을 받고, 또 라오스의 교육부 장관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교육부 장관께서 혹시라도 바라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시자, 제가 야구장을 지을 수 있는 땅을 빌려달라고 했죠. 그렇게 야구장 4개 정도를 세울 수 있는 면적의 땅을 받았습니다. 물론 경기장을 지을 수 있는 금액은 없어, 경기장 건설은 제가 직접 해야 되는 것이죠(웃음).

지금도 경기장을 만들기 위해 후원 해주실 한국인들을 만나고, 계속 노력하고 있는데 아직까지는 큰 성과가 없어서 매우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절대 포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많이 힘들지 않으셨나요?

"사실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람들이 신발을 신지 않는 다는 것, 그리고 국민들 자체가 야구를 접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야구의 룰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죠."

라오스 야구협회장과 함께 하고 있는 이만수 감독 ⓒ 헐크 파운데이션 제공


- 언어적인 부분, 문화적 차이는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사실 라오스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언어의 장벽, 그리고 문화 차이로부터 오는 충격이었습니다. 언어 같은 부분은 라오스와 한국을 자주 오가지만, 아무래도 한국에 있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에 아직도 통역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음식에 대해서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사실 한동안은 음식을 잘 못 먹었죠. 유일하게 먹을 수 있는 건 돼지고기와 찰밥, 그리고 쌀국수였습니다(웃음).

일단 향신료가 너무 심해서 힘들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라오스는 열대 지방이다 보니 그런 음식들을 먹으면 모기에게 덜 물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때부터는 저도 현지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고, 지금은 이전보다는 잘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라오스 정치인들과 만난 적이 있었는데, 개구리, 도마뱀 박쥐같은 음식들이 나와서 기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음식들을 먹어야 정치인들과 친해질 수 있다는 말에 눈 감고 먹었는데 막상 먹어보니 맛있더군요(웃음)."

- 라오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였나요?

"지금까지도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처음 라오스에 가보니, 현지 아이들이 낯선 외국인인 저와는 대화도 안 하고 외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매사에 워낙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살기 때문에, 과거에 미국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과 계속 하이파이브도 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다가가니까, 금방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처음 만난 아이들, 즉 창단 멤버들은 지금까지도 관계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초등학생이었던 그 아이들이 벌써 고등학생이 되어, 저보다 키가 컸다니 감회가 정말 새롭네요(웃음)."

- 앞으로 라오스에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저는 제 꿈을 스스로 '20년 프로젝트' 라고 부릅니다. 60세부터 80세까지, 라오스에서 빌린 땅에 야구장 4개를 건설하는 것이죠.

라오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위치해있는 다섯 국가(베트남 , 태국, 미얀마, 태국, 라오스) 중에서 유일하게 바다가 없어 다른 국가가 라오스를 거치지 않으면 국가 간에 서로 이동을 할 수가 없는데, 그런 라오스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야구 중심지가 되어, 아시안 대회를 열고 세계대회까지 여는 것이 제 꿈 입니다.

솔직히 제가 죽기 전까지 그 날을 볼 순 없겠지만, 제가 그 주춧돌을 잘 쌓아 놓기만 한다면 언젠간 후배들이 그 마지막을 잘 장식해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라오스 현지 선수들과 이만수 감독 ⓒ 헐크 파운데이션 제공


- 라오스 외에도 '헐크 파운데이션'이라는 이름의 재단을 운영하고 계신데,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라오스에서는 아무래도 재능기부의 형태로 생활하다보니 사비를 너무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더이상 재능기부를 할 수 없을 정도까지에 이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약 2년 전에 '헐크 파운데이션'이라는 이름의 후원재단을 설립하게 되었죠. 헐크 파운데이션에서는 국내의 유소년 선수들과 라오스 현지 선수들을 지원해주는 등 다양한 활동들을 하고 있습니다."

- 유독 나눔을 많이 실천하고 계시는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저는 야구 인생 50년 동안, 운동하는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받기만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 약 10년 동안 있으면서,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자원 봉사가 몸에 베어있다는 것을 보고 큰 영감을 받았죠. 사실 직접적으로 나눔을 실천하게 된 것은 지난 2014년이 처음이었는데, 최근에는 한 병원과, 커브 머신 회사와의 광고모델 계약을 체결했는데 전액 기부하면서 한 번 더 나눔을 실천 할 수 있었습니다(웃음)."

-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야구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이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리 학생들이 야구를 할 때, 눈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지 말고, 먼 미래를 보면서 자신이 과연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생각하다보면, 절대 포기할 수 없게 될 것 입니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꾸준히 야구를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라오스에서, 프로 선수들이 되고 싶은 친구들에게도 한 마디를 하자면, 비록 한국에 오지 못하더라도 끝까지 야구를 포기 하지 않고, 중국 등 많은 국가들이 야구를 하고있기 때문에 그런 나라에 진출하여 반드시 훌륭한 선수로 성장했으면 좋겠습니다(웃음)."

'Never ever give up' 을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는 이만수 감독 ⓒ 이만수


- 이제 현역 시절과 감독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도 '헐크' 라는 별명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계시는데, 별명에 대한 특별한 스토리가 있나요?

"한국 프로야구가 처음 개막했던 1982년 제가 첫 홈런을 쳤는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유행하던 해외 드라마가 바로 '헐크'였습니다. 제가 홈런을 친 후 세리머니를 하니, 관중석 제일 앞에서 저를 지켜보던 초등학생들이 '우와 헐크다'라고 소리쳤던 것을 들었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헐크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고, 저 역시도 이 별명을 정말 좋게 생각하고 있습니다(웃음)."

-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 라는 타이틀을 많이 보유하고 계십니다.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의 감회가 어떤지 듣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도 정말 감사한 것은, 많은 분들께서 부족한 저를 '최초의 사나이'라고 불러주신 것입니다. 최초라는 타이틀이, 낯선 미국이라는 땅에 가서도 언제 어디서든 늘 큰 힘이 되어주었죠. 그 타이틀을 얻은 이후에 아직까지도 저는 어떤 일이든 제가 그 길을 남들보다 먼저 개척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라오스에 가게 된 것도 그런(타이틀로 인한) 영향들이 컸죠. 사실 주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말렸지만, 저는 늘 개척하는 마음으로 아무런 걱정 없이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정말 좋은 타이틀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자면, 한국 프로야구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이 기록은 영원히 남을 텐데, 아직까지도 늘 신기하고 감사할 뿐 입니다."

- 타 선수들에 비해 유독 타격에서 놀라운 장면들을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특별한 노하우가 있었는지?

"사실 제 세대만 하더라도 야구 장비는커녕 정말 아무것도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TV도 없어서 해외 야구도 볼 수 없었죠. 당시만 해도 무식하게 그저 힘으로만 야구를 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힘들었죠. 그저 연습을 많이 하다보니까 자신감을 얻었는데, 지금도 돌아보면, 그 자신감이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정말 그 누가 와도 두렵지가 않았습니다(웃음)."

현역 시절의 이만수 감독 ⓒ 헐크 파운데이션


- 현역 시절 상대했던 선수 중 가장 힘들었던 선수는 누구였나요?

"제가 활동하던 당시에는 최동원, 선동열, 조계현 선수 등 정말 좋은 투수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 기억으로는 당시 해태 타이거즈 투수들이 상당히 까다로웠습니다.

그리고 故 최동원 선수는 정말 좋은 친구였습니다. 모든 면에서 적극적이었고, 특히 어떤 선수를 상대로도 절대 도망가지 않고 정면 승부하는 그런 투수였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롭성 커브를 잘 던졌던 선수로 기억에 남습니다. 커브가 정면에서 떨어져서 치기가 정말 까다로웠고, 빠르면서도 무거운 공을 던지는, 말 그대로 정말 최고의 투수였습니다."

- 한국인 코치 최초로 메이저 리그에 진출했는데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1998년 삼성 라이온즈에서 나오고, 정말 막막했던 시기에 에이전트의 권유로 무작정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당시 클리블랜드 싱글A 팀, 킨스턴 인디언스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1루 작전 코치로 활동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제가 팀의 선수들 보다 홈런도 많이 치고, 조용하고 딱딱한 메이저리그의 분위기에 비해 유독 시끄러운 모션이나 싸인 때문에 주목을 받아서 그런지, 1999년도엔 시카고 화이트 삭스 산하 팀에 들어가 타격과 수비 코치를 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에는 시카고 화이트 삭스에서 불펜 코치로 활동하게 되었죠(웃음).

시카고에 있었을 때는 정말 제 인생 중 가장 최고의 순간이 아니었나 싶은 정도로 꿈같은 나날들을 보냈습니다. 하루는 구단에서 마련해준 전용기를 탑승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인생 최고의 경험이었습니다. 처음 비행기에 탑승해서 제일 앞에 있는 비즈니스 석은 제 자리가 아닌 것 같아, 제일 뒤 구석에 위치한 좌석에 앉았는데 구단 관계자들이 당황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네요(웃음).

그 이외에도 팀원들과 함께 공항에 내려 택시를 찾고 있었는데 구단에서 리무진을 불러주기도 하는 등 정말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지난 2015년에는 시카고 화이트 삭스의 우승 10주년 기념으로 구단이 직접 저를 초청해, 온 가족이 미국에 잠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도 늘 잊지 않고 저를 기억해준 구단에게 정말 고마운 마음입니다."

- 2005년 월드시리즈 우승 당시의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월드시리즈 우승은 아직까지도 절대 잊지 못하는 경험입니다. 사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시즌 전, 많은 전문가들이 시카고 화이트 삭스의 최하위 순위를 예상했었습니다. 그만큼 화이트 삭스는 주목받는 팀이 아니었던 것이죠. 하지만 시즌 초반에 팀은 엄청난 실력을 보여줬고,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우승까지는 꿈도 못 꿨었는데, 월드시리즈까지 올라가 보스톤과 LA, 휴스턴까지 꺾으면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당시 결승 경기의 티켓 중, 800만 원에 가까운 티켓이 있었는데, 그 티켓을 시카고의 한 할머니께서 구매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했지만, 그 할머니께서는 88년 동안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고 말하셨어요. 그 만큼 현지인들에게는 이 결승전이 엄청난 의미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 순간이었죠. 물론 결승전 역시 구단에서 가족들에게 전용기까지 지원해주면서 경기장에 초청해주었는데 저에게도, 제 가족들에게도 정말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라오스 현지인들과 이만수 감독 ⓒ 헐크 파운데이션



- 모든 면에서 타향살이가 쉽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극복법이 있었나요?

"41세 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가족들도 없이 혼자(첫 해에) 미국에 와서 다 큰 남성이 수도 없이 홀로 우는 등 정말 힘들었습니다. 또 라오스에서도 그랬듯 미국에서도 음식, 문화, 언어의 벽에 부딪혔습니다. 특히 당황스러웠던 것은 미국 같은 경우 우리나라와 문화가 많이 달라서 선수들이 다 큰 코치들에게 욕설은 물론이고 심한 장난들을 거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문화적 충격이 가장 힘들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야구 스타일도 많이 달랐습니다. 한국에서는 코치들이 소리도 많이 지르는데, 미국에서는 그런 장면을 많이 볼 수 없죠. 팀 훈련도 한국에 비해 굉장히 적고, 대부분이 개인 훈련으로 이루어집니다.

세월이 지나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은 '미국에서 힘들었던 그 시간들을 즐겼더라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들 때 입니다. 당시에는 정말 쓸데없이 매일매일이 불안했죠. 하루는 원정 경기를 위해 워싱턴에 방문했었는데, 근처에 한인 식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구단 코치진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자 한인 식당으로 함께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친 이후, 식당 주인 분께서 저를 보시더니 식사비는 내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의도치 않게 동료들 사이에서, 제가 한국에서는 엄청난 사람이라는 등의 소문이 펴졌죠(웃음). 그런 경험들을 세월이 흘러 돌아보았을 때 (미국에서) 조금 더 편안한 마음으로 생활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이 종종 들곤 합니다."

- 한국에서 유독 재미있는 퍼포먼스들을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으셨나요?

"제가 미국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느낀 것은,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관중이 없으면 자신들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활동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세리머니를 한) 가장 우선적인 이유는 한국에서도 그런 문화를 형성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주변에서 정말 좋지 못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에도 말씀드렸듯, 저는 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싶었습니다."

SK 수석코치 시절 공약을 실행한 이만수 감독 ⓒ 헐크 파운데이션


- 그 중에서도 일명 '팬티 세리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들어볼 수 있을까요?

"사실 팬티 세리머니는 제가 구단 코치들과 농담 삼아 꺼낸 말을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제가 알기론 문학 야구장이 만원 관중을 채운 지 정말 오래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제가 장난삼아 코치진들 사이에서 문학 구장이 만원이 되면 팬티만 입고 경기장을 돌겠다고 했는데, 코치 중 한 명이 지상파 아나운서에게 인터뷰 도중 그 말을 전한 것입니다(웃음). 그 이후 그 공약이 기자들 사이에서 전해지면서, 기자들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저를 찾아왔고, 정말 당혹스러웠지만 그렇게 공식적으로 저는 공약(?)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가족들한테도 정말 많은 야단을 맞았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라는 사람이, 그리고 프로야구 구단의 수석코치가, 수많은 관중들 앞에서 속옷만 입고 경기장을 뛰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이냐는 것이었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당시 저 또한 정말 만원이 될 줄 몰랐습니다(웃음).

그 당시 경기장을 뛰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제가 약속을 지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몇몇 팬들은 감동을 받아서 울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국은 약속을 정말 잘 지키는 나라였는데, 다시 돌아온 이후의 한국은 정말 많은 분야에서, 각 분야를 대표하는 이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것이죠. 많은 팬들께서 그 세리머니를 보고 상처들을 치유 받았다고 말씀해주시면서 저 역시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 날 있었던 세리머니가 한국 10대 뉴스에 선정되고, 외국에서까지 그 이야기가 보도 되었다는 것입니다(웃음)."

- 정말 많은 야구 팬들이 감독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의 특별한 계획은 없으신가요?

"어느 곳을 가던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프로 구단에) 언제 다시 돌아올 것인지에 대한 질문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돌아가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고, 당장은 제가 지금하고 있는 재능기부에 집중을 하고 싶습니다. 때가 되면 언젠간 팬 분들을 야구장에서 다시 뵐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야구인으로서의 최종목표를 듣고 싶습니다.

"팬 분들께 참 좋은 야구인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야구인으로서 본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앞서 언급했듯이 인생의 마지막 목표를 꼭 이루고 싶습니다."

좋은 야구인으로 기억에 남길 바라다는 이만수 감독 ⓒ 헐크 파운데이션 제공


- 마지막으로 팬분들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저는 50년 동안 야구만을 해왔습니다. 그리고 50년 동안 많은 사랑을 받기만 했습니다. 이제, 남은 인생 동안에는 지금까지도 받고 있는 사랑을 또 다른 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습니다. 한국 뿐 아니라 열약한 국가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제가 활동하고 있는 이 일에, 많은 분들께서도 함께해주신다면 정말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인터뷰 당일로부터 약 2주 후 인 지난 22일, 이만수 라오스 야구소프트볼협회 부회장과 함께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 참가한 라오스 국가대표 야구팀은 아쉽게도 1승을 거두지 못하면서 대회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이로써 아쉽게도, 라오스가 1승을 거둘 경우 수도 비엔티안에서 팬티 세리머니를 다시 한 번 보여주겠다는 이만수 감독의 공약은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4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 야구 불모지였던 라오스에서 그가 이루어낸 성과들은 '기적'에 가까웠다.

라오스 뿐 아니라, 한국과 세계 곳곳의 이들에게 야구를 통해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그와 함께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아래의 링크를 통해 의미 있는 일에 동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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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헐크 파운데이션: http://www.hulkfoundation.org/main/main.ph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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