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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그 아이를 모르겠다... 가깝던 사람이 낯설어질 때

[조곤조곤 15] 영화 <우리의 20세기>가 흥미로웠던 이유

18.04.14 16:47최종업데이트18.04.1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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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곤조곤'은 책과 영화, 드라마와 노래 속 인상적인 한 마디를 이야기하는 코너입니다. 무심코 스치는 구절에서 인상적인 부분을 이야기로 풀거나, 그 말이 전하는 통찰과 질문들을 짚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있잖아, 엄마는 가끔 네가 너무 무서울 때가 있어"

어린 시절 엄마는 나와 차를 마시다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예상치 못한 말에 나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유를 물었고, 엄마는 내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너무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때는 뜬금없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세월이 흐르며 무심코 넘겼던 그 말이 다시 떠오를 때가 있었다.

특히 연애를 하던 때,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나와 같은 감정일지 아니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를 묻곤 했다. 그리고 답은 늘 '알 수 없다'였다. 그럴 때면 약간은 나른한 두려움이 찾아왔다. 가장 가깝게 여겨졌던 사람이 순간적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애정을 제외하곤 우리를 묶을 그렇다할 틀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이 미지의 존재가 나를 훌쩍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꼈다.

이렇듯 우리와 밀착해서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여겨지지만 여전히 베일에 휩싸인 존재들은 무척이나 많다. 가족, 연인, 친구뿐이랴 심지어 우리가 통과해온 과거의 경험도 그렇다. 기억은 사건이 일어난 순간에 자연히 기입되는 것이 아니라 사후에 구성되고 발생한다. 현재의 내가 시간이 형성한 단절을 경유해 과거를 다시 형성하는 셈이다. 이러니 같은 경험도 누가 떠올리는지에 따라 내용과 결이 달라지지만 어느 시기의 내가 돌아보는가도 차이의 요인이 된다. 추억으로 생각했던 일이 실제로 알고 보면 당시에는 한시 바삐 벗어나고 싶었던 고역일 수도 있다. 인생의 한 시기, 내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좋았을 수도 더 나빴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스스로의 기억을 확고한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우리의 20세기> 포스터. ⓒ 그린나래미디어(주)


친숙하지만 낯선 미지의 존재들

이런 이유에선지 역사극이나 시대극에는 미래의 시점에서 과거를 이야기 하거나 혹은 사건과 무관한 제3의 화자가 등장하곤 한다. 특히나 하나의 역사적 사건보다는 작가의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다루는 작품에서 더욱 그렇다. 적어도 나에게 이 내레이터의 존재는 회고담이 한 개인의 해석과 평가임을 드러내는 상징이다. 이런 형식의 작품에서 관객들이 보다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기가 용이할 것이다. 화자가 명확하고 그것이 굳어진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시선임이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하는 이를 신뢰해야 할지, 그 사람이 과거를 돌아보는 방식에 동의를 할 수 있을지를 질문하게 된다. 사실 대부분의 텍스트를 마주할 때 거치는 작업이지만 장르의 특성상 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이런 점에서 내게 영화 <우리의 20세기>(여담이지만 이 영화의 원래 제목은 <20세기의 여인들>이었고 나는 여전히 그 제목이 이 작품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는 매우 특별한 영화였다. 1970년대 말 미국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에는 마이크 밀즈 감독이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만든 주인공 도로시아가 등장한다. 한마디로 가상의 이야기이긴 하나 어느 정도 자전적인 내용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우리의 20세기>에는 아마도 감독 본인으로 추정되는 소년 제이미가 등장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된 제이미나 혹은 지금 시대의 또 다른 누군가가 영화의 과거를 회고하는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점의 각 인물들이 자기 자신과 주변 인물들의 삶의 내레이터가 된다. 79년의 인물들이 영화 속에서 직접 그들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읊조리는 식이다.

영화 <우리의 20세기>의 한 장면 ⓒ 그린나래미디어(주)


영화 <우리의 20세기>가 흥미로웠던 이유

물론 이 대사들 역시 각본을 담당한 밀즈의 머리에서 나온 것은 맞다. 하지만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 영화는 보다 과거 속 캐릭터들을 존중하는 모양새를 보인다. 인물들을 누군가가 돌아보는 옛날의 '그들'로 남겨두지 않고 자신의 삶에 대해 직접 말하도록 마이크를 넘긴 셈이다. 한 마디로 이 작품에서 발언의 주도권은 그 시대를 살아간 개인들이 쥐고 있고 그만큼 각각의 캐릭터들은 생생함과 입체성을 얻는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서 1979년 또한 그 의미가 고정된 하나의 명확한 시대로 그려지지 않는다. 지금의 우리는 종종 까먹곤 하지만 과거인 그 시간 또한 많은 것이 새롭고 변화도 많았던 때였다. 혼란스럽고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막막하다.

<우리의 20세기>는 이런 역동성을 설명하는 대신 관객들을 그 속으로 초대해 느끼도록 만든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어디론가 빠르게 이동하는 주인공들을 카메라가 길게 쫓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또한 역동성은 필연적으로 불확실성을 내포한다. 움직이는 모든 것은 심지어 목적지가 정해져 있어도 어디로 갈지, 얼마나 가게 될지를 완벽하게 확신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캐릭터들은 자신의 미래를 설명하는 순간에 '되었다'가 아니라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에겐 확실한 인물들의 이후 행보가 그들에겐 여전히 막연한 미래다. 작품은 무심코 지나칠 이 간극까지도 세심하게 갈무리한다.

온화함을 잃지 않을 때, 우리에게 남는 것들

그리고 이 같은 방식은 영화의 주제 의식과도 맞아 떨어진다. 도로시아는 자신의 아이에 대해 이야기 하며 이렇게 말한다. '갈수록 그 아이를 모르겠다.' 클라이맥스에서 제이미는 자신의 아들에게 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를 설명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도로시아는 아들과 서로 소통하고 존중하는 관계를 맺으려고 하고 제이미 역시 페미니즘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정도로 열린 사람이지만 둘의 사이는 지속적으로 엇나간다. 가장 가까운 사이지만 서로에 대해 모르는 부분은 여전히 존재하고 그래서 때로는 아무리 진실일지라도 어떤 이야기는 결코 전달해선 안 됨을 알지 못한다. 물론 두 사람이 서로를 온전하게 이해하는 순간이 찾아오는 때도 있지만 영화의 대사처럼 그 시간은 결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영화 <우리의 20세기> 속 도로시아(아네트 베닝) ⓒ 그린나래미디어(주)


알 수 없는 시대, 알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도,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도 마찬가지다. 충돌과 엇나감은 필연적인 결과다. 다만 밀즈 감독은 영화 속에서 인물들 간의 갈등과 방황을 극적으로 증폭시키기 보다는 담담하게 그저 흘러가는 일상의 순간처럼 묘사한다. 그리고 나머지의 부분을 서로를 알고, 그래서 이해하고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캐릭터들의 애정 어린 움직임으로 채운다.

어쩌면 감독은 그런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삶도 관계도 하나의 경지나 완벽한 이해를 성취하기에 가능해지는 게 아니라 그것을 향한 부단한 노동을 통해 이어지는 것일 뿐이라고. 우리가 그런 온화함을 잃지 않을 때에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고. 좋은 것일까 나쁜 것일까. 영화는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단지 인물들이 서로를 향해 보였던 사랑만이 그들의 삶 속에 흔적처럼 남을 뿐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날 이후로, 엄마는 나에게 같은 불안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대신 엄마는 나로부터 무엇이 다가오든 크게 놀라지 않기 시작했다. 무언가 몰랐던 것이 있었다는 것에 미안해하지 않기 시작했다. 나 또한 엄마에게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하지만 연애를 하는 사람에게는 아직 그것이 불가능 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새로이 발생하는 일들, 몰랐던 생각들, 미처 눈치 채지 못한 부분들을 나누고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느낀다. 엄마와 나는 평생 서로를 알아 가겠지만 끝끝내 서로가 누구인지 완벽하게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한 순간에 느꼈던 감정까지 미지의 것으로 남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20세기 관계 사랑 아네트 베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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