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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립군>의 흥행 실패, 스크린 탓만은 아니다

[권오윤의 더 리뷰 126] 성장물로서의 미덕, 상투적인 후반부에 발목 잡히다

17.06.08 09:30최종업데이트17.06.08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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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선조는 왜군을 피해 한양을 떠나 북쪽으로 피신합니다. 그렇게 시간을 벌면서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혹시나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分朝)를 실시합니다.

사실 말이 분조지, 요동으로 망명할 생각도 있었던 선조는 본인의 책임을 광해군에게 떠넘긴 것이었습니다. 굳이 정실의 자식도 아니고, 장남도 아닌 광해군을 세자로 삼아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한 임무를 부여한 것이니까요.

그런데도 광해군은 자신의 임무를 충실하게 이행했습니다. 주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거점을 이동해 가면서 왜군을 교란했고, 각 지역으로 사람을 보내 의병 활동을 격려했습니다. 또한, 명나라 군사들이 투입된 이후에도 남쪽 지방을 내려가 민심을 수습하는 일을 도맡는 등 임진왜란 동안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해집니다.

안정적이고 탄탄했던 전반부

영화 <대립군>의 한 장면. 분조를 이끌게 된 광해군(여진구)는 토우(이정재)가 이끄는 대립군 무리를 호위 병력으로 쓰게 된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이 영화 <대립군>은 분조 초기 예상치 못한 고초를 겪게 된 광해군의 성장과 그의 호위 부대로 배치되어 함께 하는 '대립군'들의 희생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대립군이란, 다른 사람의 군역 의무를 지는 대신 그 보상으로 식솔들을 먹여 살렸던 사람들을 말합니다.

의주로 떠나는 선조는 광해군(여진구)에게 평안도 강계로 가서 의병을 모아 왜군에게 대적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여기에 토우(이정재)가 이끄는 베테랑 대립군들이 호위병으로 차출됩니다. 무사히 광해군을 모셔다드리기만 하면 금전적 보상은 물론 벼슬까지 내리겠다는 제의도 받지요. 이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 광해군 일행과 함께 길을 떠납니다.

그러나 궁궐에서의 안락한 생활에 익숙해 있던 광해군과 신하들이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결국, 토우를 비롯한 대립군들이 빼어난 전투 실력과 임기응변으로 주도권을 갖게 되고, 그 과정에서 광해군도 점차 자신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중반부까지 광해군의 인격적 성숙을 차분히 다루는 과정은 비교적 잘 짜여 있습니다. 대립하는 가치관을 주요 인물들에게 배정하고, 구체적인 에피소드를 통해 가치관의 갈등 양상을 제대로 포착한 각본이 돋보입니다. 최근 한국 영화 중에서 캐릭터의 성장을 밀도 있게 다룬 작품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반갑기도 했습니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크게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내면의 갈등과 성장을 섬세하게 표현한 여진구, 처절한 전장에서 지내 온 대립군 리더로서 카리스마가 돋보인 이정재가 연기 대결을 펼치는 장면들은 아주 볼 만합니다. 여기에 김무열, 박원상, 김명곤, 이솜 등 조연진들의 탄탄한 연기가 뒤를 받칩니다.

대사가 잘 안 들리는 부분이 꽤 많아 아쉬움을 남긴 사운드 부문을 제외하면 미술, 촬영/조명, 편집, 특수효과 등등 여러 분야의 기술적 완성도 또한 좋았습니다. 해외 작품과 비교해도 딱히 나무랄 데 없는 수준입니다.

클리셰의 반복,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후반부

영화 <대립군>의 한 장면. 다른 사람 대신 군역을 서 주고 그 대가로 식솔들을 먹여 살리는 대립군. 토우(이정재)와 곡수(김무열)은 그들을 이끄는 리더 격의 인물들이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하지만, 광해군이 백성들의 아픔을 느낄 줄 알고 그들과 동고동락할 마음을 먹은 다음부터 한 시간 남짓 이어지는 후반부 전개는 이렇다 할 재미와 감흥을 주지 못합니다. 그저 플롯 상으로 있어야 하는 사건들이 줄줄이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후반부의 하이라이트인 강계산성 전투는 지금껏 우리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공성전을 효과적으로 잘 표현한 축에 속하는데도 말이죠.

이렇게 된 이유는 이미 승패가 정해진 싸움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광해군 일행이 질 리도 없는 일이지만, 그들이 실패할 수도 있겠다 싶은 위기 상황이 딱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가슴을 졸이면서 볼 일이 없습니다. 그저 다양한 클리셰들의 나열처럼 보일 뿐입니다.

그나마 이전까지는 '과연 광해군이 변화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물음이 궁금증을 유발했었지만, 후반부에서는 이미 완성형의 '될성부른 떡잎'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다음 장면이 어떻게 될지 더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절정부까지 해결하지 못한 광해군의 내적 문제가 있었다거나, 광해군과 토우의 사이를 심각하게 갈라놓을 만한 현실적 한계(예를 들면 신분제의 장벽 같은)를 설정했더라면 훨씬 더 흥미로웠을 것입니다. 이런 문제들이 만들어 낸 딜레마 상황에서 주요 인물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를 지켜보는 데서 극적 재미가 생길 수 있으니까요.

올해 들어 한국 영화는 흥행에서 이렇다 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과는 달리, 한국 영화 화제작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봐 주는 경향은 이미 많이 사라졌습니다. 관객들은 점점 까다롭게 영화를 고르고 있기 때문에, 재미없다는 입소문이나 나쁜 종류의 루머가 퍼지면 일정 규모 이상의 흥행은 어려운 실정입니다.

<대립군> 역시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마케팅 비용을 포함한 이 영화의 총제작비는 110억 원을 상회합니다. 사극이고 임진왜란 배경이기 때문에 전쟁 장면 묘사 등을 고려하면, 요즘 한국 영화 제작비 규모에 비추어 봐도 과도한 수준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개봉 후 1주일이 지난 현재의 흥행 추이를 감안하면 손익분기점인 관객 수 330만 명에는 턱없이 모자란 성적표를 받아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이유를 배급 타이밍이나 극장 측의 홀대 탓으로 돌리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한 주 먼저 개봉한 저예산 다큐멘터리 <노무현입니다>와 스크린 수가 비슷하지만, 평일 관객 수가 그 절반 수준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언제나 문제는 영화의 제작비 규모에 걸맞은 완성도와 재미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IPTV로 볼 수 있는 상황에서, 관객들은 극장 관람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에 걸맞은 재미와 감동을 원합니다. 한국 영화 흥행이 부진을 거듭하며 이상 징후를 나타내는 지금, 한국 영화 산업 관계자들의 분발이 어느 때보다 절실해 보입니다.

영화 <대립군>의 포스터. 중반부까지 광해군의 내적 성장을 섬세하게 묘사한 것이 돋보이지만, 후반부의 상투적인 전개는 이전까지의 모든 미덕을 잊게 만들 정도로 흥미진진함이 부족하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대립군 이정재 여진구 김무열 정윤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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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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