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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나라한 여자의 일생, 잔인하다

[세심한 리뷰] 클래식한 영화로 재탄생한 <여자의 일생>

17.04.18 14:35최종업데이트17.04.18 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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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의 흥행과 관계없이 매력 충만한 작품들을 열린 감각으로 그러모아 세심하게 해석하는 공감의 기록입니다. [편집자말]

<여자의 일생> 프랑스 작가 모파상 원작 소설을 영화화했다. ⓒ 그린나래미디어(주)


한 여자가 소녀에서부터 할머니가 되기까지의,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은 일생. 영화 <여자의 일생>은 1883년 출간되어 유명세를 떨친, 프랑스 작가 모파상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고전의 장점을 살린 클래식한 연출은 절제된 대사를 동반하며 작품에 서려있는 여운을 돋보이게 한다.

프랑스 노르망디 귀족 집안에서 자란 섬세하고 순수한 소녀 잔느의 삶이 관객에게 드러나는 첫 시작은 '환상'이다. 그 환상은 그녀가 경험해 보지 못한 영역인 사랑을 향한 것. 잔느는 손님으로 자신의 집을 찾은 남작 줄리앙에게 꿈꿔왔던 사랑의 환상을 투영한다. 그가 좋냐고 묻는 부모에게 망설임 없는 대답으로 줄리앙에 대한 사랑을 확신하는 잔느.

환상을 확신으로 결정짓고 감행한 사랑의 시작은 찬란했다. 함께 숲길을 거닐고, 아득하게 퍼진 호수를 외롭지 않게 내려다보는 사랑. 젊고 빛나는 연인의 키스만을 남겨두고 주변의 멋진 풍광이 페이드 아웃되는 착각. 설레는 사랑의 시작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나를 영원히 사랑할 거야?"
"물론이지. 당신을 영원히 사랑해."

"날 영원히 사랑할 거야?" ⓒ 그린나래미디어(주)


줄리앙의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는 다짐은 순수한 소녀 잔느가 가진 사랑을 더욱 견고하게 붙든다. 의심 없이 시작한 사랑, 그리고 이어진 결혼. 그러나 환상이 실제가 될 수 없음을 증명하듯, '영원'은 현실을 초월하지 못한다.

끝도 없이 솟구칠 것 같던 남녀의 사랑은 파도의 일생과 맥을 같이 한다. 날개를 펼치고 떠오르다가 맥없이 자취를 감추는 파도. 영원한 사랑의 맹세는 부서지는 파도와 함께 잠식한다.

환멸의 시작

사랑이 변하는 것은 정말로 순식간이다. 그토록 찬란했던 사랑은, 필름을 도려낸 듯 갑작스레 지루한 생활로 변질된다. 남녀가 속삭였던 영원한 사랑은 자취를 감추고 없다.

어둡고 추운 밤, 타는 장작 앞에서 홀로 앉아 있는 잔느. 그녀와 떨어져 따로 앉아 있는 줄리앙의 손을 타고 낱장의 카드가 흩어졌다 모아졌다 움직였다. 불길에 몸부림치는 장작만이 소리를 내는 공간. 그 정적이 깨진 건, 굳게 닫혀 있던 잔느의 입을 통해서다. 외롭고 추운 계절, 혹독한 냉기를 이겨낼 방법은 장작을 태우는 일 뿐이라 여겼던 것일까. 잔느는 하녀 로잘리에게 아무도 없는 2층 방에도 장작을 태워달라는 부탁을 하고, 반대로 장작 낭비를 막는 남편 줄리앙과 대립의 각을 세우게 된다.

사소한 일상의 갈등은, 결혼 후 부서져버린 사랑의 환상을 대변한다. 고작 장작 따위에서 정체를 드러낸 조각난 사랑. 환멸은 사소한 갈등이 반복되는 동시에 서서히 축적된다. 함께 사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섬처럼 떨어져 있는 남녀. 순수했던 한 소녀가 꿈꿔온 환상이 깨지고, 경험해보지 못했던 환멸과 고독이 몰아치는 현실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의심이 많을 때, 모든 것이 어렴풋할 때, 쪽빛하늘 한 조각과 희망을 마음에 품는다.' ⓒ 그린나래미디어(주)


용서의 강요

잔느와 어릴 적부터 같이 자라온 하녀 로잘리의 임신 사실은, 바람기 많은 남편 줄리앙의 실체이다. 비밀 하나 없이 가까웠던 잔느와 로잘리. 두 여자의 관계가 한 남자의 잘못된 행동으로 인해 무너졌다. 더욱 충격적이며 가슴 아픈 것은 그런 남편을 용서하라는 주변의 강요이다.

"인간의 구원은 용서에 있소, 잔느."

잔느의 저택을 찾은 신부는 종교적인 설득만으로 잔느의 아픔을 대면한다. 이에 동조하듯 잔느의 엄마마저 '용서'를 언급한다. '사람은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로 절망을 겪은 딸에게 구원을 줄 수 있으리라 믿는 것이다. 구원받기 위한 용서가 과연 필요한 것일까. 하녀 로잘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줄리앙을 보며 '용서'라는 말은 차마 꺼낼 수가 없다.

잔느가 느끼게 되는 환멸의 순간은 또 한 번 이어진다. 로잘리와의 스캔들을 망각 속에 묻어 버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닥친 새로운 바람. 농장을 둘러보고 사냥을 간다던 줄리앙의 진짜 행방은 반복된 충격으로 다가온다. 자신이 가깝게 지내던 부인과 남편이 외딴 오두막에서 밀애를 즐기는 것을 목격한 아내. 한 여자의 생이 절망 속에 갇혀 버렸다.

반복되는 환멸

흔들리는 바람에 온몸을 내맡긴 듯 위태로운 여자.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대상은 이제 결혼생활에서 얻은 아들 하나뿐이다. 그러나 희망의 유일한 대상인 아들에게서도 위로 받지 못하는 여자의 혹독한 일생은 적나라하게 관객의 가슴을 관통한다.

식사를 거르는 아들을 위해 정성껏 마련한 음식을 방문 앞에 두고 돌아서는 핏기 없는 여자의 뒷모습. 불러도 대답 없는 아들 방 유리창에 하릴없이 돌을 던지는 엄마. 노크를 수 없이 해도 열리지 않는 아들 방 문 앞에서 한없이 절망하는 중년여성. 세월을 비껴나지 못한 주름진 얼굴의 잔느에게 고독한 엄마의 현실이 겹친다.

'넌 나의 삶, 꿈, 희망….' ⓒ 그린나래미디어(주)


결국 사랑하는 여자와 함께 살기 위해 잔느의 곁을 떠나 버린 아들 폴에게서 날아오는 편지에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아닌 살기 위한 몸부림만 담겼다. 진 빚을 갚아달라는 내용이 반복되는 편지임에도 불구하고, 자식의 안부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늙은 엄마의 처지는 애달프다. 자식의 '도와 달라'는 그 말에 가진 돈을 내어주지 않을 부모는 아마 없을 것이다.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아들에게 향하는 잔느의 물질적 정신적 집착은 과도하게 비춰진다.

빚을 갚아달라는 편지만 날아올 뿐, 늙어버린 어미를 찾지 않는 자식. 하나 남은 그 대상에게 마지막 환멸을 느끼며 여인이 생을 마감하는가 싶더니 감독은 다시 여지를 남긴다. 사랑한 여자가 죽었고, 그녀가 남긴 어린 딸을 홀로 돌볼 여력이 없다는 아들의 편지를 읽고 손녀를 데려온다. 고난의 주름이 깊게 팬 잔느의 텅 빈 눈빛에 생명을 바라보는 특유의 설렘이 스민다.

먹먹한 여자의 일생이 드디어 끝나리라 안도했던 짧은 순간은 우습게도 잠깐이다. 다시금 꿈과 기대를 걸 만한 작고 예쁜 존재가 그녀의 일생 끝자락을 붙든 것이다. 꿈틀대는 생명의 환희를 바라보며 언젠간 또 반복될 어찌할 수 없는 괴로움을 상상하는 건 관객의 몫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순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naver.com/rnjstnswl3)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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