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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시절 김영애, 놓치면 아까울 두 편의 영화

[부고] <왕십리> <깊은 밤 갑자기> 등 영화로 돌아본 고 김영애의 연기 인생

17.04.10 16:15최종업데이트17.04.1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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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이후 출생자들에게는 드라마 속 엄마로 기억되는 김영애이지만, 원래 그녀는 영화계에서 촉망받는 명배우였다.

1970년 MBC 공채 3기 탤런트로 입문한 김영애는 이듬해 MBC <수사반장>에 출연하여 얼굴을 알린다. 하지만 대중들의 뇌리에 '김영애'라는 이름을 강력하게 각인시킨 작품은 정진우 감독의 <섬개구리 만세>(1972)였다. 당대 최고 인기 감독으로 문희, 남정임 등을 스타 반열에 올리기도 했던 정진우 감독은 신인 김영애를 과감히 기용해 제23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진출한 것은 물론 제10회 청룡상 감독상 수상 등 굵직한 성과를 이룬다. 빼어난 미모에 안정적인 연기력까지 갖춘 김영애 또한 <섬개구리 만세>로 대중들이 주목하는 배우로 우뚝 섰다.

고 김영애의 영화데뷔작 <섬개구리 만세>(1972)ⓒ 한국영상자료원


드라마 속 엄마 이전에 스크린 누비던 김영애

스크린, 브라운관을 두루두루 오가며 맹활약을 했던 김영애는 영화보다는 안방극장의 여왕으로 기억되는 배우였다. 한국영화계의 황금기로 불리는 1960년대와 달리 유신 정권의 문화 전반적인 통제가 강화되던 1970년대의 한국영화 시장은 급속적인 침체기를 맞았다. 그나마 흥행에 성공한 대부분 영화가 호스티스 물에 집중된 현실에서 여성 배우들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은 지극히 제한적이었다. 반면, 흑백텔레비전의 보급과 더불어 수요가 증대했던 TV 드라마는 호스티스, 반공 물에 집중된 영화보다 다룰 수 있는 소재와 이야기의 폭이 그나마 넓은 축이었다. 김영애가 영화보다 드라마에서 각광받았던 것은 이러한 시대상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 속 김영애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는 사람들은 김영애를 TV에 주로 출연했던 탤런트보다 영화배우로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평가하고자 한다. 영화보다는 드라마에 집중한 터라 상대적으로 김영애의 영화 출연작은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러나 몇몇 작품만으로 한국 영화사에 또렷한 각인을 남긴 김영애에 대한 언급 없이 결코 평가할 수 없는 두 영화가 있다. 임권택 감독의 <왕십리>(1977), 고영남 감독의 <깊은 밤 갑자기>(1981)이다.

고 김영애의 히스테리컬한 연기가 인상깊었던 <깊은 밤 갑자기>(1981)ⓒ 한국영상자료원


이 두 작품 중 김영애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영화는 <깊은 밤 갑자기>이다. 이 영화는 극 중 미스터리 하녀로 출연한 이기선의 팜 파탈적 매력과 함께 김영애가 보여준 히스테릭한 이미지 없이는 쉽게 설명되지 않는 괴작이다. 김영애처럼 브라운관의 여왕으로 통했던 고 김자옥에게 고 김기영 감독의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1978)가 있다면, 김영애에게는 <깊은 밤 갑자기>가 있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깊은 밤 갑자기> 모두 21세기 감성으로 봐도 흥미진진한 공포영화이지만, 김자옥, 김영애 등 여성 배우들의 열연이 돋보이는 대표작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김영애 하면 떠오르는 영화는 <깊은 밤 갑자기>에 비해 덜 언급되는 <왕십리>이다. 지금은 한국영화의 전설로 불리는 임권택 감독이 거장의 반열에 오르기 전 만들었던 작품이었고, 신성일과 최불암의 브로맨스로 더 기억되는 이 영화에 유독 김영애의 잔상이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임권택 감독의 1977년작 <왕십리>. 이 영화에서 고 김영애는 선악을 동시에 오가는 비련의 여인을 연기하여 주목받았다.ⓒ 한국영상자료원


잊을 수 없는 작품, <왕십리>와 <깊은 밤 갑자기>

영화에서 신성일이 맡은 준태와 김영애가 맡은 정희는 본래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준태 부모의 반대로 헤어진다. 14년이 지난 후 여전히 정희를 잊지 못하는 준태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고향 왕십리를 찾지만, 더는 정희는 준태가 사랑했던 청순한 여인이 아니었다.

배다른 아이를 셋이나 키우는 정희는 현재 애인인 윤충근(백일섭 분)과 짜고, 남편 없이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거로 위장한 뒤 준태에게서 돈을 뜯어내고자 한다. 사기행각이 고스란히 드러난 이후에도 정희는 계속 준태의 곁을 맴돈다. 이때 정희는 그동안 보여 줬던 억척스럽고 천박한 모습이 아닌 자신의 잘못에 대해 속죄하는 연약한 여인으로 재등장한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정희의 캐릭터는 영화 말미 여의도 비행장(현 여의도 공원) 충근과의 주먹다짐 장면으로 절정을 맞게 된다. 앞서 준태와 마지막 밤을 보낸 정희는 충근의 요구대로 준태의 돈을 훔치는 것에 성공하지만, 그에게 돈을 건네는 대신 혼자 떳떳이 사는 길을 택한다.

<왕십리>의 정희 역시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지고 남자들을 잘못 만나 타락한 전형적인 비운의 여인상을 보여줬지만, 결말은 여타 호스티스 여주인공들의 비극적인 운명과는 사뭇 달랐다. 준태에게 속죄하는 길을 택한 정희는 준태의 돈을 갈취하지만, 앞으로는 남의 돈을 탐하지 않고 아이들과 떳떳한 삶을 살기로 한다. 비록 타락한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을 택한 정희는 불완전하지만, 남자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이루는데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둔다.

영화 <변호인>(2013)에 출연한 고 김영애ⓒ 위더스필름


<왕십리> <깊은 밤 갑자기> 이후 한동안 영화 출연이 뜸했던 김영애는 <애자>(2009)를 기점으로 스크린 연기 활동을 재개한다. 그 이후에도 영화 출연작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변호인>(2013), <카트>(2014) 등 박근혜 정부가 탐탁지 않게 여기던 사회 고발성 영화에서 뚜렷한 활약을 보여준다. 김영애는 여성 배우, 특히 중량감 있는 역할을 맡을 수 있는 중년 여성 배우의 인력풀이 유독 좁은 한국 영화계에서 꼭 필요한 존재였다.

췌장암 투병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도 연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던 김영애의 별세는 그녀의 연기를 사랑했던 수많은 국민의 가슴을 애통하게 한다. 유작으로 남은 KBS <월계수 양복점 신사들> 외에도 김영애 하면 떠오르는 대표작은 많지만, 영화배우보다는 드라마로 더 기억되는 김영애의 연기 인생은 재평가되어야 한다.

지면상 김영애의 대표작으로 거론되는 <왕십리> <깊은 밤 갑자기> <변호인> <카트> 등 모든 영화를 다룰 수 없었지만, 기회가 되면 김영애의 데뷔작 <섬개구리 만세>를 포함해 이 영화들에 관한 글을 쓰고 싶은 바람이 있다. 영화에 뚜렷이 각인된 김영애의 명연기 외에도 영화적으로도 할 말이 많은 좋은 영화들이다. 국민 엄마이기 앞서 배우로서 기억될 고 김영애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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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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