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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은 것 하나 없는 여행이지만 "지금보다 행복할 순 없어"

[세심한 리뷰] <델마와 루이스> 길 위의 두 여자, 다시 관객의 마음을 훔치다

17.03.20 18:59최종업데이트17.04.18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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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영화의 흥행과 관계없이 매력 충만한 작품들을 열린 감각으로 그러모아 세심하게 해석하는 공감의 기록입니다. [편집자말]

"정말 끝내주는 휴가야."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포커스가 여성이며 여행이다. 1991년,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후 재개봉한 영화의 백미는 두 여성의 코믹 발랄하고도 가슴 저릿한 여행이다.

모든 것은 불확실했다. 이른 나이에 남편 데릴과 결혼을 한 델마도, 안정된 직장을 꿈꿀 틈 없이 지루하고 빽빽하게 이어지는 삶 중간에서 삐걱대는 루이스도 그랬다. 결혼하여 안정된 생활 테두리 안에서 조용하고 얌전하게 지내야만 했던 한 여성의 분출되지 못한 어떤 것. 그리고 어떻게 살아도 불확실함의 연속인 삶에서 꼭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었을지 반추하게 되는 또 다른 여성의 선택.

자신들을 가로막는 것들에 분투하듯 이어지는 두 여자의 여행은, 함께 팔 걷어붙이고 떠난 동행자가 된 듯 감정이입을 하기에 딱 좋았다. 그 둘은 떠나야만 했다고, 떠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전기밥통이 되어 있거나 소리 내지 못하는 메뉴판이 되어 인격마저 상실당했을 것이라는 비약과 함께.

메마른 공기에 흙먼지가 휘몰아치듯 나부끼는 도로 위, 자유로이 떠다니는 두 여자. 대담한 여행의 시작은 그녀들의 아무렇지 않을 수 없는 일상이다.

저녁 메뉴는 뭐가 좋을지 묻는 아내에게, 뭘 먹을지 마음대로 하라며 버럭 하는 가부장적인 남편 데릴. 그에게 여행의 첫 운도 떼지 못한 여자 델마. 레스토랑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루이스는 수많은 손님을 상대하며 온종일 감정을 삼킨다. 그러던 중 이어진 둘의 간결하고 은밀한 통화. 수화기 너머 조용한 흥분이 실려 있다.

"짐 다 쌌어? 오늘 밤에 떠날 거야."

남편이 출근한 사이, 도망치듯 집을 나와 데리러 온 루이스의 차에 대충 꾸겨 넣듯 짐을 실은 델마. 허둥대는 그녀의 흥분된 미소에 화답하듯 망설임 없이 차를 모는 친구 루이스. 설렘 속에 시작된 친구와의 여행. 모든 여성이 꿈꿀 수 있는 최고의 환상이다.

자신으로 살 수 있는 기회

"지금보다 더 행복할 순 없을 거야."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나와 세상과 마주하고 있노라면, 마음의 모든 빗장을 여는 일은 아무렇지 않은 일처럼 여겨진다. 잠기지 않은 마음엔 멈추지 않고 달리는 인생의 여러 변수가 들이닥친다.

여행을 선택한 순간부터 열려있던 빗장을 뚫고 들어올 다른 세계를 받아들일 마음이 있던 델마. 델마는 남편 이외의 '다른 세계'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어린 날 만나 오랜 기간 함께한 남편에게서 무작정 도망칠 생각은 했었지만, 방법도 없고 행동도 없던 시간. 작정해야 했다. 끔찍한 결혼생활을 당장 끝내려는 작정은 꿈꿀 수 없었지만, 큰맘 먹고 남편 몰래 여행할 작정은 할 수 있던 것이다. 아내로 사는 것이 아닌 자신으로 살 기회가 필요했다. 델마에게 가장 필요했던 건, 도무지 찾을 용기도 나지 않던 빗장을 푸는 열쇠였다.

확신할 수 없는 삶

데릴(크리스토퍼 맥도날드)과 델마(지나 데이비스).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경직되고 단조로운 일상을 단단히 옭아맨 자물쇠처럼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미소. 음료와 식사를 서빙하며, 주문을 받으며 간혹 입꼬리에 번지는 미소는 루이스의 것이 아니다. 분명 그녀 얼굴에서 나온 미세 근육의 움직임이지만 그 웃음이 루이스 마음으로 가닿아 행복의 파문을 일게 하지는 않는다. '지금 이대로 괜찮아?' 살면서 괜찮은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흐트러진 적 없는 단단한 일상에 훅 들어온 의문. 그리고 더는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 루이스의 눈빛엔 삶에 단련된 강인함과 동시에 짙은 불안이 서려 있다.

'지금 여기서 행복하지 않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결혼생활과 더욱 나은 직장생활로 꿈꾸는 안정감은 평생 목적지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의 불안에서 기인한다. 확신할 수 없는 삶인데 가정을 꾸리고 집을 장만하고 좋은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안심하려 애쓴다. 철로 위를 벗어나지만 않으면 안전한 기차가 된 듯 목적지를 모르고 정해진 자리에서만 달린다.

어차피 목적지의 방향은 열려있다. 문을 열고 나와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과 마주할 수 있게 되는 용기가 그토록 망설여왔던 선택을 할 수 있게 만든다. 오픈카 특유의 개방성은 두 여자가 여행에서 맞닥뜨리게 될 어떤 상황에도 열린 문을 닫지 않겠다는 의지로 여겨진다.

가혹한 남성

일은 벌어졌고 돌이킬 수 없다.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하늘의 빛을 온몸으로 받고 대지의 숨결을 품으로 받아내며 거리를 달리는 두 여성은 확실히 눈에 띈다. 방해공작은 곳곳에서 터지고, 그들을 가만두지 않는 대상이 모두 남성이라는 점은 정말 유감이다. '끝내주는 휴가'는 낯선 남성들의 등장으로 점점 알 수 없어진다.

그들은 늘 비슷한 이유와 방식으로 접근한다. 여행길은 여성 둘이서 감당하기에 버거운 존재들이 출몰하는 야생이다. 클럽에서 처음 만난 아름다운 여자를 어떻게 한 번 꼬드기고 말겠다는 강간현장이 휘몰아치는가 하면, 어렵게 마련한 여자의 여행비용마저 몰래 강탈하려는 잘생긴 범죄자도 등장한다. 여성을 비하하는 상스러운 말로 도로 위의 흙먼지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어 그녀들의 화를 돋우는 트럭 운전기사까지. 지저분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남성들은 꾸준히 두 여자를 괴롭힌다.

"여자가 저렇게 우는 건 재밌어서가 아니야."

루이스의 그 말에도 진저리치며 우는 델마를 비아냥거리며 희롱하던 강간남 할렌은 루이스가 쏜 총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는다. 자신들에게 닥친 범죄를 막아서느라 또 다른 범죄를 자행한 여자들. 꿈꾸던 여행길. 그 앞을 꾸준하게 남성이 막아설수록 여성은 범죄를 피할 길이 없다.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된 두 여성에게 여행해야만 하는 의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살인의 죄에서 도망치기 위해. 꾸준한 남성들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깨어있다는 것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너와 함께라서 기뻐."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번갈아 가며 쉼 없이 운전대를 놓지 않는 델마와 루이스. 곳곳의 빛나는 풍경은 도망치는 신세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준다.

"이렇게 여행해 볼 기회가 없었어."
"지금 하고 있잖아…."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 모르는 길을 하염없이 달리는 두 여자에게, 어딘지도 모를 여행지의 낯선 찬란함이 위안이 된다. 낯선 것에 더 후해지는 여행지에서의 심리. 자신을 처음 어루만지게 되는 낯선 여정.

"너 지금 깨어 있어?"
"한 번도 이렇게 깨 있어 본 적 없는 것 같아."


분명 눈 뜨고 살았건만 줄곧 감고 있던 듯 무겁게 열리는 눈을 빛내며, 길 위의 선택 속으로 온몸을 내맡긴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곳으로 갈 준비가 되어 있는 두 여자.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힘에 그간 짊어져 왔던 생의 무게가 실린다. 깨어 있는 채로 꿈을 꾼다는 것은 아마 눈을 뜬 채로 온 힘을 다해 액셀러레이터를 밟는 그런 기분일 것이다.

"우리 잡히지 말자. 계속 가는 거야."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순지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blog.naver.com/rnjstnswl3)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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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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