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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탁의 기사'에 가려진 '마녀',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다

[까칠한 관객] 연극 <벙커 트릴로지>의 첫번째 에피소드 '모르가나'

17.02.17 18:17최종업데이트17.07.24 14:39
다소 까칠하게 공연을 보고, 이야기 합니다. 때로 신랄하게 '깔'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잘 만든 작품에게는 누구보다 따뜻하지 않을까요?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작품들이 더 많이 올라오길 바라봅니다. [편집자말]

뚜껑을 열기 전까지는 다소 우려가 됐지만, 막상 막을 열고 나니 기대 이상이었다.ⓒ 곽우신


전쟁이라는 소재를 서사에 잘 녹여내기란 참 힘들다. 전쟁을 억지로 미화해서는 안 된다. 이 속에서 반전(反戰)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내야 하지만, 그렇다고 전쟁의 참상을 너무 직설적으로 표현할 때엔 거부감이 든다. 자칫하면 진부해지기 쉬운 소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어려운 소재를 잘 녹여내어,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내면서도 너무 폭력적으로 그리지도 않은, 더불어 메시지까지 전달하는 작품이 등장했다. 바로 연극 <벙커 트릴로지>다.

이른바 '지탱'이라 불리는, 지이선 작가와 김태형 연출의 조합은 연극 뮤지컬 팬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두 사람의 협업에 많은 기대를 샀던 이 작품은, 더 나아가 이 작품은 장춘섭 미술감독, 구윤영 조명감독, 배미령 작곡가와 배우 이석준, 박훈, 오종혁, 신성민, 이승원, 임철수, 김지현, 정연을 캐스팅하며 더욱 화제가 됐다.

제스로 컴튼의 트릴로지 시리즈를 원작으로 삼는 이 <벙커 트릴로지>는, 전작 <카포네 트릴로지>처럼 세 에피소드로 구성된다. 이 세 에피소드는 서로 독립된 듯하지만 묘하게 이어지는 흐름을 보인다.

특히 이 작품은 극장 무대를 실제 '벙커'처럼 설치하여 그 매력을 증폭했다. 관객들은 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벙커에 실제로 입장하면서,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밖에서 총성과 폭발음이 들리고, 순찰기가 꽤 낮은 높이로 나는 듯하다. 진동까지 느껴지는 벙커를 경험하며, 관객들은 그 전쟁의 상황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체험은 작품에 대한 몰입도를 높일뿐더러, 작품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더 다가갈 수 있도록 돕는다.

지금부터 글 한 편에 <벙커 트릴로지>의 에피소드를 하나씩 조명해보고자 한다. '모르가나'는 간략하게, '아가멤논'과 '맥베스'는 조금 더 상세히.

이 서사 속에서 최대로 지닐 수 있던 젠더 감수성


멀린의 연설에, 전쟁을 그냥 거친 산을 등반하는 정도라고 생각하고 지원하게 되는 원탁의 기사들. 그들이 맞닥뜨린 건 등반 정도가 아니었다.ⓒ 곽우신


'모르가나'를 관람하기 전, 이 에피소드가 '아쉽다'는 평을 여러 번 들었다. 그래서 우려가 컸다. 시놉시스만 봐도, 에피소드 이름과는 달리 이야기는 주로 아더, 가웨인, 랜슬롯에 의해 흘러간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극에서 여성 캐릭터를 잘 쓰기 위해 창작진이 치열하게 고민한 흔적이 드러났다.

모르가나는 아더왕의 전설인 <원탁의 기사>를 재해석한 이야기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초기, 영국의 승리와 영광을 위해 모병이 한창이던 시절. '멀린'으로 불리는 교장은 학생들을 향해 소리친다. 영국의 영광을 위해 나가 싸우라고. 서로를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들에 빗대어 놀던 친한 친구들은 큰 생각 없이 전쟁에 참여한다. 전쟁은 금방 끝날 것이고, 본인들은 금의환향할 것이니까. 다만 아더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웬을 두고 가는 것이 아쉬웠고, 그웬을 짝사랑하는 랜슬롯도 그녀가 걱정될 뿐이다.

이들은 전쟁의 참혹함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 끔찍한 전쟁 속에서 이들은 환상과 환청에 시달린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그 와중에 가웨인은 노맨스랜드, 아무도 없는 개활지에서 여자를 봤다고 주장한다. 모르가나, 그녀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

'모르가나' 에피소드에서 여성 배우는 각 캐릭터에 따라 다른 환상으로 등장한다. 아더와 랜슬롯에게는 그웬(기네비어)으로, 가웨인에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모르가나로 말이다.

캐릭터가 아쉽기는 하지만...

모르가나의 정체는 불분명하다. 누구의 시선에서 그려지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완전히 바뀐다.ⓒ 곽우신


물론 '모르가나' 속 모르가나 캐릭터가 아쉽기는 하다. 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여성은 세 에피소드 중 가장 소극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는 사회적으로 전쟁을 남성의 이야기로 설정하며, 여성은 마치 전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한 '무임승차자'와 같은 역할로 축소하는 현실과도 맞닿는다. 또한, 극 중 모르가나가 전형적인 창녀/성녀의 이분법에 갇히는 것처럼 보인다.

변론의 여지는 있다. 우선 여성이 창녀/성녀로 그려지는 공간은 극 중에서 명확히 '남성의 환상 속'이다. 남성이 어떻게 여성을 바라보는지, 그 시선을 문제로 보여줬다는 점에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부분이 있다. 또한, 모티프를 따온 <원탁의 기사>에서 기네비어와 모르가나가 어떻게 묘사되는지를 생각해보면, 다소 어쩔 수 없는 측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또한, 모르가나에서 랜슬롯과 가웨인의 관계는, 친구로 설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위계 관계가 드러난다. 예를 들어, '남자다운' 랜슬롯은 '남자답지 않은' 가웨인을 계속 놀린다. 그 위계 서열은 '남성성'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었다.

즉 모르가나는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남성성'이 '여성'과 '여성성'을 어떻게 재단하는지, 그리고 그 남성성이 만들어내는 위계질서와 서열이 어떤지를 잘 고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모르가나' 에피소드가, 연극 무대가 지녀야 할 최소한의 젠더 감수성은 확보한 셈이다.

결론적으로 '모르가나'는 아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고발하고 있는 것들은 꽤 유의미하다.

왕은 기사들을 구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전쟁은, 모두를 죽인다.ⓒ 곽우신


[관련 기사]
☞[모르가나] '원탁의 기사'에 가려진 '마녀',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다
☞[아가멤논] 전쟁이 죽이는 건 남자만이 아니다, 전쟁은 여자를 지운다
☞[맥베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전쟁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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