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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더 하려 했는데, 조금 일찍 끝났죠?"

사라지는 실업야구, 그 끝에 있는 백재우 플레잉 코치

03.03.07 13:50최종업데이트03.03.07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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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장 안에 놓여 있는 커다란 야구공이 보였다. 투명하고 예쁜 유리 상자에 담겨 있는 볼링공만한 야구공엔 사인이 가득했다. 예전에 은퇴한 선수들에게 기념 선물로 주기 위해 만들었던 야구공. 선물도, 변변한 은퇴 경기도 없는 백재우 플레잉 코치(한국 전력, 40)와 나란히 마주한 야구공은 유난히 더 크게 보였다.

작년 11월 포스틸이 해체를 발표했고 얼마 전 한국 전력과 제일 유리가 그 뒤를 이었다. 상무를 제외한 3개의 실업팀이 모두 해체를 선언한 지금 실업야구는 사실상 막을 내린 것과 다름없다. 국가 대표 9년, 한국 전력에서 14년을 보낸 백 코치는 지금 실업 야구의 끝자락에 있다. 실업 야구 현역 최고령 선수인 그를 지난 26일 한국 전력 숙소에서 만났다.

▲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
ⓒ 백재우 제공
숙소를 함께 사용한 대부분의 선수들이 짐을 싸 집으로 돌아갔고 남은 선수들은 두어 명. 썰렁한 숙소를 채우고 있는 건 건조대에 널려 있는 선수들의 옷과 신발장에 가득한 축구화였다.

요즘 어떻게 지내세요?

“발령 기다리고 있어요. 어제(25일) 정식으로 (회사)운영 위원회가 야구단을 없애기로 결정했거든요. 오늘은 회사에 다녀왔고요. 선수들이 일하고 싶은 지역을 써 내라고 해서.”

처음 소식을 들었던 건 언제였나요?

“사실 작년 11월에 소문이 돌긴 했어요. 그런데 올해는 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빨리 없어진 거죠.”

소식을 듣고 어땠는지.

“우선 굉장히 안타까웠죠. 포스틸이 해체 발표를 한 후에 불안했는데 현실로 다가오니까. 팀이 없어지는데다가 실업야구도 같이 없어지니까 아쉬움이 남죠.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작해서 작년까지 딱 30년 했네요. 내 인생의 3/4 을 맡겼네. 마음이 묘해요. 근데 회사가 어렵다는데... 위에서 결정을 내린 거니까.”

전주고-원광대를 거쳐 한국 전력에 입단한 그는 졸업할 당시 해태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다. 그리고 2년 뒤 쌍방울도 입단을 제의했지만 모두 거절하고 오로지 한국 전력에서만 14년을 뛰었다. 혹시 아쉬움이 남진 않을까?

"프로보다는 (국가)대표팀에 더 미련이 남았었고, 당시엔 돈보다는 명예를 생각했죠. 지금까지 후회해 본 적은 없어요. 그리고 지금은 어차피 다 끝난 일인데요.“

대표팀을 9년이나 맡아온 덕에 기억에 남는 경기도 부지기수.

“85년 대륙간컵 준우승, 86년 세계 야구 선수권 준우승, 88년 시범 올림픽 경기 준결승에서 일본이랑 붙어서 졌을 때... 너무 많아요.”

그는 지금까지 야구를 하면서 하고 싶었던 것은 다 해봤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아쉽거나 미련이 남는 일은 없다고 한다.

“야구로 이루고 싶은 건 다 이뤘어요. 국가대표가 꿈이었는데 국가대표도 9년 동안 했고, 2001년엔 세계 야구선수 위원으로 위촉돼서 월드컵 야구도 참관하고, 오래하니까 좋던데요. 그런 것도 뽑아주고(웃음) 선수 생활은 더 하려고 했는데 조금 일찍 끝났죠.”

실업 야구는 82년 프로야구가 생기기 전까지 한국 성인 야구의 최고봉이었다. 하지만 프로 야구의 등장과 함께 인기를 잃었고 결국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는 그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할까?

“우선 프로 때문에 실업 야구가 설 자리가 없었다는 것. 언론도 프로에 치중했고 대한 야구 협회도 방관했고요. 협회는 초중고대만 가지고 하겠다는 건데... 그럼 실업자가 많이 생기잖아요.”

그는 실업 야구가 사라지면서 생기는 많은 실업자를 가장 우려했다.

“우리나라 아마 야구 선수들이 4-500명쯤 있는데 프로에서 뽑아가는 애들은 몇 안 되잖아요. 각 구단에서 열 명씩 뽑는다고 해도 80명인데 나머지 애들은 갈 곳이 없어요. 초중고 애들도 많이 그만 둘 거예요. 해봤자 갈 곳이 없는데...초등학교 가 봐도 애들이 안 하려고 한다니까요. 가는 문이 좁으니까 일본처럼 사회인 야구가 활성화 된 것도 아니고. 지금도 놀고 있는 애들이 허다해요.”

▲ 1990년 에드먼트 세계 선수권 대회때 이종범(좌) 백재우(우)
ⓒ 백재우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동대문야구장 얘기를 꺼내자 그는 단호히 “말도 안 된다”고 했다.

“동대문야구장은 당연히 없어지면 안돼요. 우리나라 야구 역사의 산실인데... 서울시에서 추진하는 건데 깊게 생각을 안 하는 것 같아요. 당장 야구를 할 곳이 없잖아요. 목동은 잘못 지어져서 할 수도 없는데... 경제 논리로만 따지는 게 안타까워요.”

그렇다면 아마 야구가 살길은 무엇일까?

“협회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해요. 프로팀도 같이 나서야 돼요. 하고 싶어도 취업이 보장이 안 되면 안돼요. 학생 야구는 방과 후 운동을 해야죠. 운동과 공부를 병행해야 되요. 지도자들에 대한 처우도 보장을 해야 하고요. 4강에 들어야 대학을 갈 수 있는 시스템이라 성적을 못 내면 지도자를 자르고, 그러니까 지도자들은 학생들이 운동만 하게하고, 결국 공부 안하고 운동만 한 애들이 나와서 갈 곳이 없는 거예요. 성적에 따라서 대학에 진학하는 시스템 자체가 없어져야 하는 거죠.”

그는 이제 유니폼이 아닌 양복을 입고, 그라운드가 아닌 사무실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30년 동안 야구공을 만지며 살아온 그에게 두렵진 않은지 물었다.

“그런 건 없는데 적응을 잘 해야죠. 처음부터 배워야죠. 다른 선수들은 약간 그런 애들도 있는데 다 모아놓고 그랬어요. 운동했던 것만큼만 열심히 하면 다 잘될 것이다. 무엇이든 새로 시작하는 건 다 그렇잖아요.”

하지만 그가 야구공을 떼놓는 건 잠시일 것이다. 그에겐 아직 못 다한 꿈이 하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지도자가 돼서 좋은 선수들을 많이 키우고 싶어요. 내 인생의 마지막인데...”
2003-03-07 12:25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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