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어느 시기를 보내고 있든 누구에게나, 자기 인생은 애틋하기 마련이다. 어려운 순간도 잘 견뎌주기를 바라는 마음, 남들처럼 적당히 평범하게, 기왕이면 조금 더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언제나 마음처럼 잘 되지는 않는다는 게 문제지만.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 속 혜자도 그랬다. 25살의 혜자(한지민)는 자기가 별로 잘난 게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좀 잘 됐으면 싶고, 70대 노인이 된 혜자(김혜자)는 "다 늙은 몸뚱아리 기대할 것도 없다"지만 자신이 영 안쓰럽다. 그리고 알츠하이머 환자 혜자는 꿈과 현실을 부단히 오가며 과거의 기억을 새롭게 마주한다. 그렇게 혜자의 애틋함을 따라가다 보면, 지금의 순간들이 겹겹이 쌓여 한 편의 인생이 만들어진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닫는다. 결코 순탄하지 않은 삶이었으나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다"던 마지막 고백이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 포스터

드라마 <눈이 부시게> 포스터ⓒ JTBC

 
혜자가 그려낸 청년과 노인의 삶

<눈이 부시게>는 주인공 '김혜자'를 통해 지금을 살아가는 청년과 노인의 삶을 동시에 비춘다. 서 있는 지점은 다를지 언정 나름의 고충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에서는 비슷한데, 그 풍경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아프다. 25살 취준생 혜자는 하루 빨리 취업해서 미용사 엄마와 택시기사 아빠의 짐을 덜어주고 싶지만, 꿈이었던 아나운서가 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다. 계속 도전할 자신은 없으면서 포기할 용기는 더더욱 없다.

혜자 오빠와 친구들도 처지는 비슷하다. 오빠 영수(손호준)는 '별풍선 대박'을 꿈꾸며 방구석에서 1인 방송을 시작했지만 사실상 백수에 가깝고, 가수를 꿈꾸는 상은(송상은)은 몇 년째 연습생 신분이다. 기자 지망생인 준하(남주혁)는 아침부터 밤까지 알바를 하느라 바쁘다. 이들에게 무엇이든 도전할 수 있는 젊음의 특권이란 없다. 자꾸 발목을 잡는 냉혹한 현실만이 있을 뿐.

취업 걱정 없는 70대 노인의 삶이라고 마냥 편할 리 없다.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는 것도 속상한데, 세상이 보는 시선도 따갑다. 엘리베이터에 타도 존재 자체로 눈치가 보이고, 예뻐지고 싶은 마음은 쉽게 비아냥거리가 된다. 사람들이 집값 떨어질까 걱정해 요양원 건립을 반대하자, 결국 이들이 향하는 곳은 노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홍보관'이다.

그렇지만 드라마는 한 순간에 노인이 된 혜자의 입을 빌어 '기본 옵션'처럼 느껴지는 젊음의 특별함을 역설하는 동시에, 노인들이 그저 수동적이고 무기력할 것이라는 편견에도 정면으로 반박한다. 혜자와 다른 노인들이 함께 힘을 합쳐 준하를 구출하는 장면은-비록 혜자가 지어낸 환상이었을지라도-늙고, 힘없고 약한 존재들이 어설프지만 유쾌하게 세상에 맞서는 모습을 그려낸다.

혜자의 간절함이 만들어 낸 세계
 
 드라마 <눈이 부시게> 중

드라마 <눈이 부시게> 중ⓒ JTBC

 
현실에서는 끝내 살리지 못했던 남편 준하를 상상 속에서나마 데리고 나온 후에야, 혜자는 비로소 젊은 날의 자신과 마주한다. 석양이 지는 바닷가에서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있는 혜자 뒤로,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뒤집는 한마디가 나지막이 흘러나온다. "저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습니다."

판타지 로맨스물로 시작한 드라마는 2회를 남기고 과감하게 장르를 바꾼다. 그제서야 가족들이 왜 혜자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는지, 딸을 보는 아빠의 표정이 왜 그렇게 의미심장했는지가 선명해진다. 혜자의 시간여행은 아들의 사고를 막고 또 남편을 살리고 싶었던 간절함이 만들어 낸 모습들이었다.

<눈이 부시게>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노인 혜자를 서사의 주체로 내세우고, '타임슬립'이라는 설정을 통해 기억이 뒤섞이는 내면을 깊게 파고든다. 수천 번이라도 시계를 돌려 구하고 싶었던 사람은 사실 아들이었고, 남편과 닮은 담당 의사를 보며 먼저 간 남편 준하를 떠올렸다. 혜자의 기억은 어느덧 눈앞의 아들을 몰라볼 정도로 점점 흐릿해지지만, 눈 오는 날 아들이 미끄러질까 골목길을 쓸던 순간은 또렷하다. 그런 혜자는 결코 과거 속에 갇혀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롯이 그 기억들로 버티고 선 사람이다. 드라마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내면이 그리 단편적이지 않으며 한 사람의 인생은 그보다 더 복잡다단함을 보여준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 중

드라마 <눈이 부시게> 중ⓒ JTBC

 
마지막에 이르러 <눈이 부시게>는 일찍 남편을 잃고, 혼자 미용실을 운영하며 다리 불편한 아들을 키워낸 한 여성의 다사다난한 인생사를 펼쳐낸다. 그리고 그 시선은 혜자와 연결된 또 다른 여성들의 삶으로 옮겨간다. 혜자는 자기 미용실을 이어받아 저처럼 힘들게 살고 있는 며느리(이정은)가 못내 안쓰럽고, 은숙 엄마(원미원)는 젊어서 오빠들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하더니 결국 병을 얻은 딸의 처지가 한스럽다. 혜자가 며느리에게 "남편도 자식도 훌훌 벗고 너로 살어"라며 "난 니가 무슨 결정을 하든 늘 네 편이다"라던 말은 다음 세대의 여성들에게 건네는 위로이기도 하다.

눈이 부시게 오늘을 살아가라던 지극히 평범하고 교훈적일 수 있는 말이 다름 아닌 '김혜자'의 입에서 흘러나올 때, 그 말은 생생하게 살아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리고 '눈이 부시게'의 의미가 찬란했던 젊음의 한 순간만이 아니라, 때로는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던 인생 자체라는 걸 알게 된다. 매 순간을 치열하고 간절하게 살아냈던 혜자가 그랬듯, 우리네 인생도 그렇게 애틋하기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문화콘텐츠 리뷰 미디어 <치키>(http://cheeky.co.kr/2883)에도 실렸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세상의 변화는 우리네 일상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믿는, 파도 앞에서 조개를 줍는 사람.

  • 당신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
top